146화 또 다른 투자
늦은 오후.
담당 회계사 알렉스가 우리 회의실로 찾아왔다.
한 손에는 대여섯 장 분량의 서류가 들려있었다.
알렉스가 나와 성환에게 한 부씩 건넸다.
"요약보고서 준비됐습니다."
"벌써요?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결론이 뭐죠?"
보고서를 들춰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결론을 묻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음……. 저희는 이번 실사를 통해서……."
기본적으로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확인했다는 말을 길게 늘어놓은 후 결국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대충 얼버무렸다.
두괄식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건 결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놀았다고 할 수도 없으니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할 수밖에 없는 거다.
마치 짬뽕 대신 짬뽕밥을 시켰을 때 건더기가 너무 없어 보일까 봐 당면을 듬뿍 넣은 것처럼.
대부분의 용역 결과는 대충 이런 식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절차라 거를 수도 없고 그냥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다.
중국어를 못 알아듣는 성환이 영어로 이것저것 묻자 알렉스가 유창한 영어로 대답해줬다.
도대체 알기는 하는 건지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끝나고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
질문 있냐는 말에 성환이 다짜고짜 물었다.
"숨은 빚이 있습니까? 부외부채요."
알렉스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답했다.
"저희가 제시받은 자료를 검토한 결과 부외부채가 발견되진 않았습니다."
전문가들 대부분이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즉.
'제시받지 않은 자료에서는 나올 수도 있다.'
혹은, '제시받은 자료 중에서도 전문가적인 주의의무를 다해서 살펴본 결과 발견되지 않은 거지 정말 세세히 꼬치꼬치 봤다면 나올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거기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겠다'라고 한 거다.
"그럼 우발부채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항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랜 경험상 중국회사에서 이슈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이 회사가 '정말 투명하다'라기보단 아무래도 이 친구들의 역량이나 기울인 노력이 많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슈를 사전에 파악만 한다면 인수가격에 반영하는 등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모른 채 넘어가면 나중에 문제가 커져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다.
계약서상에 매도자의 보증항목에 추가하여 책임을 부과할 순 있지만, 이미 지급된 대금에서 돌려받는다는 게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떼고 주는 게 낫지 일단 주고 나서 나중에 받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국내기업이면 몰라도 해외기업, 그것도 중국기업이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내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실사의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을까요?"
상대는 곤란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적발 감사 같은 걸 말씀하십니까?"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샅샅이 뒤져보는 거죠."
"그건 저희의 업무영역도 아니고 상대측에서도 반발할 수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긴.
수사권을 가진 공권력도 아니고 여기다 기대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정식보고서는 요약본과 유사하겠죠?"
"네."
정식보고서 받아봐야 돈값 한다고 분량만 늘려놓을 테니 볼 필요도 없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수 지분과 경영권을 함께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기존 경영진들이 계속 경영할 테니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리 심각하진 않을 거다.
기존 경영진들이 손 놓고 있지도 않을 테고.
미팅이 끝나고 알렉스가 나가자마자 성환이에게 물었다.
"넌 어떤 거 같아?"
"Not bad인데요."
"물론 재무제표만 보면 그렇지. 그런데 리스크가 없다는 게 찜찜하지 않아?"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 있다손 치더라도 리스크가 커야 보상도 큰 법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전히 미덥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거라도 더 확인해봐야겠다.
"음. 그럼 현장실사라도 가자."
"현장실사라니 어디서요?"
"어디긴 어디야 마트지."
"네? 마트요? 거기 뭐하러?"
"제품이 정말 잘 나가는지 확인 한번은 해 봐야지. 잔말 말고 따라와."
대표와 총경리에게 내일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회사를 나왔다.
내어준 차량에 올라타 호텔로 향하는 도중 기사에게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마트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기사가 내려준 곳은 이곳에 들어온 미국계 대형마트.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햄 치즈 등 육가공 식품이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유안의 제품들이 정말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소비자들 눈높이에 맞게 매대 좋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유안 제품 맞죠? 위치 좋은데요?"
성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모르는 거야. 실제로 잘 팔리는지도 봐야지."
그렇게 한참 동안을 근처에서 손님인 척 서성이면서 지켜봤다.
집었다가 내려놓는 사람,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사람, 킁킁 냄새 맡는 사람 등 별의별 손님들이 다 있었다.
그래도 그 칸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제품이었는지, 계속해서 집어가는 바람에 빈자리가 수시로 채워졌다.
"이 정도면 많이 팔리는 거 아닌가?"
"그래. 인기는 있나 보네."
하지만 찜찜함이 모두 가시지는 않았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성환이 물었다.
"뭐가 또 이상한데요?"
"이렇게 좋은 회사를 왜 동방식품이 투자하지 않았지?"
"그거야. 지분비율 때문에 깨졌다잖아요."
"그건 그런데. 좋은 회사면 소수지분이라도 가져가다 뭔가 시너지를 붙일 만한 걸 생각했을 텐데 이렇게 아예 발 뺐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건 예전에 천하제일 대표가 J사 50% 지분 인수하자고 했을 때 반대했던 거랑 마찬가지 이유 아닌가?"
지분 50% 이하면 매출이 합산되지 않아 반대했던 얘기를 꺼냈다.
"그렇지. 다수 지분 아니면 연결대상에서 제외되지."
"동방도 똑같겠죠. 시너지고 나발이고 그런 건 먼 미래 얘기고. 당장 전문경영인한테 급한 건 매출과 이익이 얼마나 늘었냐 하는 거 아닌가?"
역시 누가 오너일가 아니랄까 봐.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었을 때의 단점을 콕 집어서 얘기했다.
"그건 네 입장이고."
"대표님이 했던 말인데요?"
예전 천하제일에서 J사 인수 의사결정할 때 손들고 발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시너지효과를 위해 꼭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네 말이 맞아. 동방식품 측도 단기성과를 따질 테니 같은 총알이면 매출을 확 늘리는 쪽으로 투자하겠지. 하지만 네가 잘못 생각한 게 하나 있어."
"뭔데요?"
"우리야말로 단기성과만을 추구한다는 거야."
"네?"
"우리 목표가 뭐야? 골치 아프게 직접 경영하자는 게 아니잖아. 최소자본으로 최대한 빨리 뽑아먹고 나오는 게 목표 아냐?"
"그렇지만……."
할 말이 마땅히 없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한 투자처를 제쳐두고, 아무리 수익률이 높다고 해도 이런 불확실한 건에 투자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내 의견은 No야. 힘 빼지 말고 돌아가자."
성환이 정색하며 받아쳤다.
"안 돼요."
"안 된다니? 왜?"
"지난주에 식사하면서 회장님께 말씀드렸다고요."
"뭐? 조회장님께?"
"네. 간만에 요즘 뭐 하냐고 물으시길래 중국에 조그만 회사 하나 투자해서 전국구로 키우겠다고 큰소리쳤단 말이에요."
"뭐라고?"
"그러니깐 특별한 이슈 없으면 반드시 투자해야 해요. 최동욱도 못 하는 걸 내가 해내야 한다고."
이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결정도 안 된 상태에서 질러버리다니.
이 자식은 천하태평의 투자를 자기 열등감 해소나 조회장에게 인정받을 도구 정도로 보고 있는 거다.
물론 처음에 내가 그렇게 꼬드기긴 했지만.
지분율은 낮지만, 출자도 제일 많이 했는데 마냥 반대할 수만은 없다.
단,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할 뿐.
"알았어. 투자하자. 대신 조건이 있어."
성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바로 물었다.
"뭔데요? 말씀하시죠."
"신규 투자는 이 건이 마지막이다. 이제부턴 기존 투자건 회수하는 족족 암호화폐에 투자할 거야. 물론 네가 찬성해야 하는 거지."
"또 암호화폐 말하는 거예요?"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끄덕였다.
성환은 못마땅하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걸 깨달았는지 힘없이 답했다.
"네, 그러죠."
이놈 생각에 '쪽박이라도 쳐봐야 그리 큰돈 날리는 것도 아니고, 대박 쳐 봐야 몇 푼이나 되겠어?'라고 생각하는 걸 거다.
사실 내 입장에선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나와 성환이의 지분합계 85%를 확보했으니 일단 암호화폐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야 조금 언짢을 수도 있지만 어쩌랴.
지분율이 깡패인걸.
하지만 몇 년 안에 암호화폐가 떡상하면 섭섭한 기분도 금세 사라질 거다.
* * *
호텔 근처 중식당.
호텔에 짐만 풀어놓고 성환이와 함께 예약한 식당으로 안내받자 수만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룸 안엔 붉은색과 황금색의 화려한 장식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었고, 생뚱맞게 대리석으로 상감한 어두운 색조의 가구가 놓여있었다.
마치 '이게 바로 중국이다'라고 외치는 듯.
행운을 상징하는 붉은색,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은 고급 식당의 기본 인테리어지만 솔직히 촌스럽다.
하지만 초대해준 호스트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는 법.
매우 놀란 척 두 팔을 벌려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럭셔리하네. 뭐하러 이렇게 비싼 델 잡았어."
네가 사라고 한 거다.
수만이가 일어나 반갑게 맞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오셨으니깐 제대로 대접해드려야죠. 두 분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들이 준비된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세 명이니 요리 두어 개만 해도 충분할 텐데 주문한 음식이 원형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아깝게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여기 중국이잖아요."
수만이 말대로 중국에선 많이 시켜서 손님이 음식을 남겨야 하는 게 예의다.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예의상 준비한 음식을 다 비우면 호스트한테 실례다.
왜 이렇게 조금만 차렸냐고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질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오랜 중국 생활 덕분인지 한국인 입맛에 맞는 요리만 시켜놨다.
술 몇 잔을 함께 기울이다 수만이가 물었다.
"회계법인 좀 그렇죠?"
자기가 소개해줘 놓고도 자기가 별로라고 하다니.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지만, 현실이 그렇긴 하다.
"로컬회계법인이니깐 어쩔 수 없지 뭐."
"큰 회계법인이라고 해도 선진국하고 비교하시면 안 될 거예요."
말 그대로 차이나리스크.
국제기준으로 놓고 똑같이 볼 게 아니라 항상 어느 정도 디스카운트는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기존 경영진들이 나가는 게 아니라 계속 경영할 테니깐 큰 문제 있겠어요?"
"그렇겠지."
"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계약서에 잘 녹여내면 되지 뭐."
술 몇 잔이 돌고 취기가 제법 올랐다.
그 순간.
'띠리리링' 울리는 전화 소리에 수만이가 잔뜩 긴장한 채 일어났다.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래."
한국에서도 이 시간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었는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어지간히 악랄한 상관인가보다.
수만이가 수화기를 귀에 바싹대고는 뛰쳐나갔다.
궁금한 마음에 귀를 살짝 기울이자 통화 소리가 살짝 들렸다.
"안종! 니하오. 아니……. 대표님."
성뒤에 '종'이라고 붙인 건 총경리를 뜻하는데.
대표나 자기 상관을 부를 때 붙이는 호칭으로, 사무실에서처럼 습관적으로 튀어나왔나 보다.
"……."
"네네. 그쪽하고 잘 얘기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내일 바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룸으로 돌아왔다.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표정 관리에는 실패했다.
"죄송합니다. 고객 전화라……."
회사 일이라고 하면 창피했는지 또 회사 전화 아닌 척했다.
이번에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그래 고생이 많다."
"고생은요. 그런데 내일 다시 유안으로 들어가십니까?"
"들어가서 사인해야지 어차피 우리끼리는 지분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니깐 질질 끌 필요 없잖아."
"아, 네. 잘됐네요."
잘됐다고 말은 하면서도 딴생각을 하는지 상반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아까 전화로 상관한테 갈굼이라도 당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