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숨어있는 리스크
화장실을 간 수만이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변비가 심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듯.
걱정스러운 마음에 귀를 쫑긋 기울이자 아주 먼 거리에서 수만이의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네. 그쪽하곤 생각보다 설득이 잘되고 있습니다."
"……."
"네. 대표님. 상해로 돌아가면 바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이 늦은 시각까지 전화 보고를 하다니.
수만이 녀석 일과 시간 이후에도 회사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국제학교 다니는 아이 때문에 때려칠 수도 없고 참아야만 하는 가장의 무게랄까.
난 부양가족이 없어 제대로 알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힘없이 내뱉는 수만이의 목소리에서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만이가 배를 문지르는 척하며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배가 아파서요."
회사 일 때문이란 걸 들키기 싫은 마음에 핑계 대는 거다.
부끄러운 걸 감추고 싶은 건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니 모른 척해 줬다.
"아냐. 오랜만에 소주 마시니깐 그러겠지. 고생 많다."
"고생은요."
수만이가 뒷머리를 긁적대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며칠 뒤.
상해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번 수만이와 저녁 식사 후 바로 다음 날 교통편은 물론이고 호텔까지 싹 다 예약을 마치고 출장길에 나섰다.
성환이가 조용히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네, 손님."
"일회용 슬리퍼 좀 부탁드립니다."
"손님. 이 좌석에서는 슬리퍼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네? 설마 그럼 못 주시는 거에요?"
"네. 손님 좌석에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답변에 성환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성환이 녀석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시대를 실감할 수 있을 거다.
"그냥 가자. 어차피 두 시간인데."
"돌아올 때는 내 돈으로 업그레이드할게요."
슬리퍼 때문에 업그레이드하겠다니.
뭐. 내 돈도 아니고 상관없다.
"그러시든지. 이왕이면 내 것도 해 주면 더 좋고."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 한마디 없다.
영화 한 편 다 보기도 전에 비행기는 상해 공항에 착륙했다.
입국 심사 후 출구 쪽으로 나오면서 우리를 마중 나온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 한 명이 '환영광림! 천하태평'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험상궂게 생긴 인상의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게 '영화 황해에 출연이라도 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 남자가 안내해주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제대로 찾은 거겠죠?"
"왜. 우리 다른 데로 끌고 가기라도 할까 봐? 피켓에 쓰여있었잖아. 천하태평이라고."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차를 보내주고."
성환이 창문 내리려고 수동 레버를 끙끙대며 돌려댔지만,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창문이 안 열리니 덜컥 겁을 집어먹은 거다.
"걱정 마. 제대로 가고 있으니깐."
성환이 녀석 예전 천하제일에서 청도 출장 왔을 때의 기억과 너무 다른 대접에 격세지감을 느끼기라도 했나 보다.
예전 천하제일 출장 땐 공항에서부터 주재원들이 마중 나와 도열해 있었고 차량은 물론 숙소까지도 따로 배정받아 편하게 생활했었는데.
지금은 마중은커녕 기사 한 명 딸랑 보내준데다 창문도 안 열리는 똥차에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니 그 격차를 실감할 수밖에 없을 거다.
차량 성능은 물론이고 도로 사정 또한 훌륭한 편은 아니라 시간이 꽤 걸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 희뿌연 연무과 탁한 공기, 숨쉬기조차 어려울 듯 보이는 잿빛 하늘만이 보였다.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세트장으로 딱 어울릴 것 같다.
중국하면 딱 하고 떠오르는 전형적인 중부지방 날씨다.
미세먼지는 많더라도 비교적 화창한 날이 많은 북부지방과는 크게 달랐다.
희뿌연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 갑갑했지만 오랜만에 중국방문이라 설레기도 했다.
성환이 불평을 쏟아냈다.
"화생방이야 뭐야? 날씨가 왜 이래?"
"군대 갔다 왔냐?"
"꼭 가야만 아나요? TV에서 많이 보는데."
성환이 냄새라도 맡듯 킁킁댔다.
"뭐야. 냄새까지 나잖아?"
성환이 말 들으니 정말 매캐한 냄새라도 나는 거 같았다.
"미세먼지가 심한가 본데."
수년 뒤에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날씨를 꽤 많이 볼 수 있게 될 거다.
한참을 달린 뒤.
마침내 회사에 도착해서 정문에 내려다 주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직원처럼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성환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만스럽게 헛기침을 해댔다.
천하제일 출장 왔을 때는 현수막도 걸려있었고 마치 국빈 방문하는 것처럼 사장부터 경영진들이 모두 나와서 도열해 있었는데.
여긴 뭐 대접이 이따위냐고 하는 거다.
마중 나온 직원이 바로 동사장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유안의 동사장 왕스춘이라고 합니다."
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꽤 반갑게 맞이했다.
분위기를 보니 그렇게 홀대하는 건 아닌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천하태평의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네. 하경리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가까운 거린데요."
차 한잔을 내오면서 동사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성환이 옆에서 쿡쿡 찌르는 바람에 협상에 바로 들어갔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인수할 지분을 조금 높일 수 있을지요?"
"전략적투자자로 참여를 원하신다고요?"
"네. 회사 전망만 좋다면요."
"그래도 주요 경영은 저희가 해야 합니다."
"네. 저희 쪽에서 이사 한 명만 선임할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네, 좋습니다."
왕동사장은 껄껄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딜이 끝난 줄 알고 성환이 역시 따라 웃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해서 몰라서 그런 거다.
말로는 다 될 것처럼 하다가 막상 도장 찍을 때 가서는 딴말한다는 걸.
좋다고 말하는 건 그저 생각 한번 해 보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다.
성환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김칫국 마시지 마."
"끝난 거 아니에요? 얘기하고 악수까지 했는데."
"끝나긴 개뿔.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진 끝난 건 없어."
"그래도."
"이제 시작이라니깐."
동사장 사무실을 나와 직원이 회의실로 안내를 해 줬다.
회의실 안에는 세 명이 노트북을 노려보며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회계법인에서 나오신 분들입니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남자 한 명이 일어나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중도회계법인 알렉스입니다."
수만이가 소개해준 로컬회계법인의 회계사들이었다.
PwC 등 유명한 Big 4 회계법인은 수수료가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싸서, 어쩔 수 없이 조그만 업체를 소개받아 재무 실사를 맡겼다.
큰 기업의 상당 지분을 인수하는 M&A면 몰라도 그냥 조그만 기업의 그것도 소수지분을 투자하는 건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건 물론 문제없겠지만, 그만큼 낭비일 테니.
"안녕하십니까, 천태평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하경리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네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회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렉스 순간 당황한 듯 귓불이 빨개졌다.
항상 숫자만 보던 사람들에게 큰 그림을 물어보면 대충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음……. 나쁘진 않아 보입니다."
가장 책임 회피적인 발언.
좋다고 하자니, 나중에 결과가 안 좋으면 욕 들어 먹을 테고.
안 좋다고 해도 역시 욕 들어 먹을지 몰라, 그저 두루뭉술 얼버무리는 거다.
회귀 전 재무팀장일 때 직원들이 이따위로 보고하면 바로 서류부터 던져버렸는데.
부하직원도 아니고 일을 맡긴 업체 직원이라 조용히 참았다.
"그럼 현재까지 발견된 이슈는 있습니까?"
"아직 특별한 건 없습니다."
"네. 그럼 보고서는 언제 받아볼 수 있죠?"
"오후에 일정 마감하면서 요약보고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실사 현장에서 바로 요약보고라니.
빠른 건 좋지만, 어째 미덥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살짝 불안해졌다.
비싸도 소 잡는 칼을 쓸걸.
영 미덥지 못하다.
차라리 내가 보는 게 낫겠다.
"재무제표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알렉스가 건넨 재무제표를 대충 훑어봤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아니 숫자는 오히려 생각보다 좋았다.
일단 부채비율이 생각보단 낮았다.
차입 여력이 더 이상 없다고 한 것처럼 부채가 많긴 했지만, 누적 이익이 쌓여서 자본도 같이 늘었기 때문이다.
매출은 연평균 20% 이상 고속 성장 중이고 영업이익률은 10%를 상회했다.
이 숫자가 맞는다면 안정성, 수익성, 활동성이 모두 좋다는 소린데.
그러나 사실 중국회사의 재무제표는 믿을 게 못 된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투자자가 한 말에 따르자면, 마치 똥 밭에 흰 눈이 쌓인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겉으로는 온통 하얗고 이쁘지만,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하얀 눈 속에는 온통 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거다'라고 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실사를 통해 살짝 들춰보고, 안에 정말 작물을 심어놓은 건지 아니면 똥이 들어찬 건지 확인해 봐야 하는 거다.
중국어도 모를뿐더러 회계에도 그리 익숙지 않은 성환이 궁금했는지 물었다.
"재무제표 보니까 어때요? 감이 딱 옵니까?"
"내가 도사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에이. 재무팀 짬밥이 몇 년인데 척하면 척 아닌가?"
"숫자야 물론 알지. 하지만 숫자로 안 나타난 게 더 중요하다는 거 몰라?"
"숫자로 안 나타나다뇨?"
"말 그대로 장부에 없는 걸 말하는 거야."
"장부에 없다고요?"
"그래. 부외부채랑 우발부채 말이야."
뭔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나도 연차가 낮았을 땐 잘 모르고 숫자만 중시했다.
연차가 점점 늘고 임원까지 달게 되면서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리스크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재무제표에 나타난 숫자는 과거 실적을 나타낼 뿐 숨어있는 리스크를 알려주진 않는다.
숫자야 조금 틀린다고 한들 대세엔 큰 지장 없었다.
그러나 장부에 숨어있는 리스크는 다르다.
투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사결정을 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 있어."
"에이 그러니깐 그게 뭐냐니깐요?"
성환이가 재촉하듯 물었다.
이것은 호기심인데.
알고 싶어 하다니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역시 목적이 있고 의지가 있다면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나 보다.
"알았어. 공짜 아니니깐 잘 들어. 우선 부외부채. 뭐 같아?"
"글쎄요. 뭔가 안 좋은 부채?"
"대충 맞아. 장부 바깥의 부채란 뜻이지. 한마디로 숨은 빚. 장부에 안 나타난 거."
"장부에서 숨겼다고요?"
"맞아. 빚이 있는데 없다고 거짓 장부를 만들어 놓는 거야. 고의로 은폐하는 거기 때문에 가장 악질이라고 할 수 있지."
"모르고 들어간 투자자가 피해 입겠네요?"
"맞아. 그래서 회사 지분 인수 전에 이렇게 회계법인에 재무 실사를 맡기는 거야. 이런 거 발견하라고."
대강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발부채는요?"
"음……. 불확실한 빚이라고 할까?"
"불확실하다뇨?"
"빚인지 아닌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빚이 될 수도 있다 뭐 그 정도라고 할까?"
"그럼 빚보증 같은 거네."
옆에서 주워듣는 게 많다 보니 이해력이 빨라진 듯.
"헐, 웬일이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성환이 우쭐대기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네 말대로 어떤 회사가 대출을 받았을 때 빚보증을 섰다고 쳐. 보증 서 준 그 회사가 빚 못 갚으면 대신 갚아야 하잖아. 결국 빚이 될 수도 있는 불확실한 빚이라고 할 수 있지."
"회장님께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서 알아요."
"뭘?"
"가족, 설령 누나라고 할지라도 절대 보증 서면 안 된다고."
"가족끼리도?"
"네. 하나만 망하면 어떻게든 회복 가능할지 몰라도 같이 망하면 절대 못 일어난다고."
보통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형제들끼리 돕고 살라고 배웠었는데.
역시 재벌의 교육은 다르다.
몰인정해 보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