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44화 (144/191)

144화 또 다른 기회

성환이도 반갑게 맞이했다.

"하대리님. 오랜만입니다."

"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난번 출장 때 뵙고 처음이죠?"

"벌써 그렇게 됐나요?"

원모나 김철수이사 역시 예전 천하제일에서 같이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수만이와 오랜만에 안부를 주고받았다.

"정동사장님은 잘 계시지?"

"잘 계시겠죠."

"'계시겠죠'라니? 모르는 거야?"

"네. J사는 그만둔 지 조금 됐습니다."

수만이가 회사 그만뒀다는 말에 원모가 살짝 경계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냥 인사차 온 게 아니라 아무래도 천하태평으로 조인하고 싶어서 떠보려고 왔나 싶은 거다.

아무래도 자기보다 선임이었으니 살짝 불편한가 보다.

"아니 왜? 직급도 잘 챙겨주고 보수도 괜찮았던 걸로 아는데."

"그건 다 괜찮은데요. 내년에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게 돼서요. 아무래도 국제학교 보내야 할 거 같은데 학비가 만만치 않아서 말이죠."

"회사에서 지원이 안 되는구나?"

"네. 아무래도 주재원이 아니라 현지채용이다보니깐요."

해외 파견 주재원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자녀들의 학비 지원이다.

수업료와 식대는 물론 통학버스까지 포함하면 자녀 한 명당 연간 사천만 원을 훌쩍 넘다 보니 회사지원 없이는 보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수만이 같은 경우 천하제일 본사에서 파견 나간 주재원이 아니라 J사에서 자체 채용한 인력이다 보니 학자금 지원이 당연히 안 되었을 거다.

물론 정동사장이 맘만 먹으면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직원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사실상 어려웠을 거다.

"그럼 다른 회사로 옮긴 거야?"

"네. 상해에 있는 동방식품 자회사요. 주재원 대우해줘서 딸 아이도 국제학교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잘됐구나. 상하이면 생활하기도 더 좋겠네. 경쟁사로 잘 옮겼네."

다양한 업종에서 다양한 일을 해보면 좋겠지만, 신규채용 회사에서는 당장 급한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업종 경험이 있는 경쟁사 출신들을 데려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럼 한국엔 왜 온 거야?"

"본사 집합교육 때문에요. 한국 본사가 이 근처라 지나기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조인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인사차 들렀다는 말에 원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그럼 저녁이나 먹자."

"저녁 좋죠."

"몇 년 전에 성환이가 다음에 만나면 쏜다고 했잖아."

성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내가요?"

"그래. 바로 네가. 설마 기억 안 나?"

"전혀요."

"수만아 넌 기억하지?"

수만이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 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성환은 황당했는지 헛기침 한 번 했다.

"쳇. 그러죠, 뭐. 그랬다고 치죠."

싫지는 않은지 빼지 않고 따라나섰다.

약속이 있다고 한 김철수 이사와 원모는 빠지고 세 명이서 저녁을 함께했다.

몇 년 전 중국 출장길 이후로 오랜만의 만찬이었다.

천하제일을 그만두고 천하태평을 창업한 일.

그리고 성환이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하고 나와 합류한 일과 지난 몇 년간 나름 제법 성공을 거두며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수만이는 예전 북경에서 엘리베이터 안 잡아놓았다고 욕 바가지로 먹고 쫓겨난 게 떠올랐는지 조윤경 얘기를 할 땐 같이 울분을 참지 못하듯 격하게 흥분했다.

조금 심하다 싶었는지 성환이 눈치를 살폈다.

"조성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훙분해서요."

"아니에요. 저도 예전에 콩밥 먹은 거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빈 병이 한 병씩 늘어나면서 다들 얼굴도 적당히 상기됐다.

하지만 새 출발 한다는 수만의 얼굴이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할까.

뭔가 얘기를 꺼내고 싶은데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만아. 혹시 우리 쪽으로 합류할 생각 있어?"

이제 벌인 사업들 차근차근 정리하고 현금화할 시기라 특별히 충원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재무팀 그리고 북경 주재원 후임이라는 인정에 이끌려서 제안 한번 해 봤다.

"네? 제가요?"

"그래. 중국통인 네가 필요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성환이도 나서서 거들었다.

"네, 그러시죠. 어차피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 있는 분이 조인하면 좋죠."

그러나 수만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 괜찮습니다. 와이프가 중국 생활에 만족해서요.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요."

예의상 한 번 더 물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와이프가 계획 다 끝내놔서요. 아이는 고등학교 때까지 국제학교 보내고 대학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럼 계속 주재원 생활해야겠구나?"

"네. 학비 대주는데 잘리면 안 되죠."

수만이 말이 맞다.

주재원은 급여보다도 주거비나 교육비가 훨씬 더 매력 있다.

십 년 전에도 주재원 한 명당 2억 이상 들어간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이 한창 성장할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성장이 멈추거나 큰 이슈라도 생기면 제일 처음 짐 싸는 것 또한 주재원일 수밖에 없다.

"요즘 뉴스 보니깐 중국하고 통상마찰도 심한데 괜찮겠어? 이렇게 분위기 안 좋은데?"

"괜찮아요. 저희는 아무래도 식품 쪽이라 타격이 적어요. 그리고 애초부터 현지화를 해서 소비자들이 한국 브랜드인지도 잘 모르고요."

"그렇지. 내가 한국인이니까 알고 있는 거지."

중국에선 동네 마트만 살짝 가보더라도 동방식품 제품들이 눈높이 매대에 떡하니 차지하고 있어서 많이 친숙하니깐 당연히 중국 브랜드라고 생각할 거다.

설령 문제가 생겨도 수만이는 눈치 빠르고 경험 많아서 나름 잘 헤쳐나갈 거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투자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천하태평에서 중국회사도 투자하세요?"

"물론이지. 돈에 국적이 있는 건 아니잖아. 단지 지금은 더 큰 기회가 있어서 기존 투자건 회수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성환이가 못마땅한 듯 나섰다.

"왜 또 암호화폐 얘기하려고요? 우선 들어나 보시죠. 무슨 건인데요?"

수만이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저희 그룹 내에서 검토한 투자 건이 하나 있는데요."

"동방식품에서?"

"네. 유안이라고 이번에 인수 협상하다가 막판 의견 차이로 나가리된 건이 있어요."

"무슨 의견 차이인데?"

"저희는 애초에 경영 참여 요구하면서 SI(전략적투자자)로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상대측에서 갑자기 경영권을 안 놓겠다, FI(재무적투자자) 역할만 하라고 해서 결렬됐어요."

딜 구조에서부터 어긋난 거다.

전략적투자자(SI)란 경영권을 확보하거나 사업을 영위할 목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투자자를 말하며 통상 업종이 비슷하거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에 적합하다.

한편, 재무적투자자(FI)란 경영권은 관심 없고 오직 매각차익만을 노리면서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투자자를 말하며 주로 연기금, 금융기관 및 사모펀드 등에 해당한다.

"사업 회사한테 FI를? 좀 그러네."

"네. 우리 같은 대기업이 FI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사업하는 회사가 사업할라고 인수하는 거지 몇 년 갖고 있다가 팔고 나갈 건 아니잖아요. 먹튀도 아니고."

"그렇지 그런 먹튀는 우리 같은 천하태평한테나 어울리지."

갑자기 수만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혹시 천하태평에서 투자하실 수 있으십니까? 포트폴리오 차원에서요."

수만이 녀석,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늘었다.

보험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능글맞게 마치 의도하기라도 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하마터면 '그럴게'라고 바로 답할 뻔했다.

하지만 설령 보험왕이라도 나를 넘길 순 없다.

확률에 대한 기댓값으로 산출된 보험료는 보험회사의 마진을 포함하고 있으니 절대적으로 가입자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 가입에 따른 안도감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라면 모를까.

수학적으로 따지면 가입하는 순간 손해 보는 게임이다.

"안 돼. 우린 지금 크게 못 벌려. 벌린 것도 거둬들여야 할 형편이야."

"그렇군요."

수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네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아까워서 그러죠. 돈이 될 게 뻔한데 놓치는 거 같아서요."

성환이는 호기심이 살짝 생기는지 한마디 했다.

"수만님. 그 회사 사업성은 어때요?"

"네, 아주 좋아요. 원래 상해지역에서만 판매하다가 작년부터 주변 지역까지 진출했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전국으로 확장하려고 투자받는 거예요. 확장하면 대박 날 게 확실해요."

수만이가 이 정도 얘기하면 정말 좋다는 건데.

문제는 회수 기간이다.

"그럼 투자 기간은 어느 정도고?"

"상대측에서는 영업망 확대하면서 실적만 받쳐주면 적정 수익 붙여서 일 년 뒤 바로 되팔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해요."

일 년 만에 수익을 보장하겠다니.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이상한데? 너무 빠르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은행 대출받는 게 훨씬 나은 거 아냐?"

"대출한도가 꽉 차서 더 이상 추가 대출이 어렵나 봐요."

"제2 금융권도?"

"네. 그래서 사채시장까지 알아봤는데 음성적으로 빌리면 비용처리가 안 된다고 해서 포기했나 보더라구요."

"금액하고 수익률은?"

"30억 정도에 일 년 50% 보장해준다고 해요."

일 년에 50%라.

기간도 그렇고 수익률도 그렇고 일단 나쁘지 않다.

단, 사업이라는 게 예상대로만 흘러갈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 50% 수익이 아니라 원금도 못 건질 수도 있는 게 사업이다.

성환이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재차 물었다.

"정말 50% 보장이요?"

"성환아! 세상에 보장이 어딨냐? 담보 잡는 것도 아니고."

"담보 잡을 수 있으면 연간 수익률을 50%를 주겠어요? 어차피 10% 미만이라도 충분히 땡길 수 있을 텐데."

"알면 됐구만."

"그런데 사업성이 좋다잖아요."

"사업성은 불확실한 거지."

"불확실성이 커야 보상도 큰 법이죠."

어째 종전과 입장이 달리진 기분이다.

이제까진 내가 투자하자고 조르고 성환이 말리거나 마지못한 듯 그냥 해라, 이 정도였는데 이번엔 반대가 됐다.

"지금은 투자할 때가 아니라니깐!"

"또 그 암호화폔지 뭔지 말할라고요? 어차피 거기 몰빵할 것도 아니잖나?"

'몰빵할 건데'라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 실체도 없는 것에 집중 투자를 한다는 건 절대 납득할 수 없을 테니.

성환이 이놈 평상시엔 이런저런 투자안에 별 관심을 두지 않더니 이번에 이상하게도 적극적이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벌려놔야 나중에 암호화폐에 투자할 금액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뭐. 객관적으로도 나쁘진 않다.

정말 일 년짜리라면.

어차피 거래소 생기고 초창기부터 바로 떡상하진 않을 테니 살짝 늦게 발 담근다고 손해 보진 않을 거다.

차라리 수익 확실한 곳에서 짧게 먹고 빠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수만이가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잠시 떴다.

바로 조성환을 째려봤다.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내가 뭘요?"

"암호화폐 투자 못 하게 하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아이. 그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마찬가진데."

이 자식 내 필승 투자 공식을 과소평가했다.

정해진 미래를 모르는 입장에서 당연한 반응이다.

"그럼 뭔데 왜 갑자기?"

"천하제일 경쟁사잖아요. 천하제일이 중국 내에서 영업망 뚫느라 J사도 인수하고 별의별 짓 다 하는데도 잘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들어간 후에 이 회사가 중국 전역 유통망을 가진 전국구로 커지면 누구 덕분이 됩니까?"

"설마! 네가 해낸 거라고?"

"당근이죠. 재주는 곰보고 부리라고 하고 난 챙기기만 하면 되죠."

천하제일이 지난 이십 년간 못한 걸 자기가 해냈다고 조인철회장의 눈도장을 박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거다.

"소수지분 가지고 경영 참여도 못 하는데 그게 말이 되냐? 어차피 1년 안에 털고 나오는 건데?"

"그러니깐 되게 해야죠."

"우리가 해병대냐? 안 되면 되게 하라야?"

"대표님이 잘하시는 거 있잖아요. 협상의 달인 아니십니까?"

원하는 게 있을 땐 살짝 상대방 띄워줄 줄도 알고 몇 년 사이 조금 변하긴 했다.

특별히 회사에 현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출장 겸 여행 삼아 머리 식히고 올 수도 있고.

"그래. 까짓거 출장 한번 가지 뭐. 대신 수틀리면 바로 오는 거다."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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