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43화 (143/191)

143화 오랜만이야

합작법인에 35억 원을 출자하면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제 천하태평의 계좌잔고는 거의 제로.

여기저기 투자를 더 벌이고 싶어도 더는 벌릴 수 없게 됐다.

곧 암호화폐거래소가 생길 테니 오히려 현금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제는 망망대해에 던져놓은 그물을 거두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어떤 그물은 고등어, 오징어는 물론 생각지도 않은 참다랑어까지 올라올 수도 있고 어떤 그물은 물고기는커녕 그물끼리 서로 엉겨 붙어 다 버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검증된 투자를 주로 했으니 대부분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소집한 임시주주총회.

건환이까지 천하태평 다섯 명의 모든 주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총회꾼은커녕 출입기자나 입회 경찰관 한 명 없는 단출하기 그지없는 총회였다.

김철수이사.

역시 총회꾼 전적이 있어서인지 공격적인 질문을 먼저 던졌다.

"천대표! 언제든 얘기할 수 있는데 굳이 주총 소집한 이유가 있어?"

"네,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자고요."

"지금 잘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계속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뇨. 이제 제대로 시작해야죠."

"시작이라니?"

"기투자분을 회수해서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겁니다."

성환이나 원모 또 저런다는 듯이 옆에서 대놓고 혀를 찼다.

"암호화폐라고? 그게 뭔데?"

"네. 중앙은행이 발행하지 않고 블록체인 기술에 기초한 디지털화폐에요."

가격이 크게 오를 거라는 사실만 알지 사실 나도 개념을 잘 몰라서 그저 사전적 의미를 읊어주었다.

"도토리 같은 거야?"

"네, 뭐. 비슷하면서도 다르죠."

"그게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거지?"

회귀 전 내가 암호화폐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과 똑같은 반응이다.

이해를 하려 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아무리 가치가 없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가치 있어.' '오를 거야' 하니까 정말 천정부지로 가격이 솟구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 암호화폐가 말 그대로 떡상하자 예전에 쓰레기라고 콧방귀 끼면서 투자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원망했었다.

두 번 다시 같은 후회를 할 생각은 없다.

회귀했다는 걸 깨닫고 처음 가졌던 생각이 바로 이거였다.

건환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암호화폐 투자 안건에 투표라도 하자는 말씀이세요?"

"아직은 아니지만 비슷해. 투자하려면 기존 투자 건들을 먼저 정리해야 하니깐."

"네? 정리한다고요?"

"맞아. 기회비용을 생각하자는 거지."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의 문제다.

기회비용이란 하나의 안을 선택하면서 포기하게 되는 가치 중 최고의 가치를 말한다.

선택한 안의 가치가 기회비용보다 무조건 커야만 한다.

설령 아무리 좋은 투자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회비용이 되는 암호화폐의 수익률보단 높을 수 없다.

단지 나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할 수가 없어서 답답할 뿐이다.

할 수 없이 이렇게라도 모여서 공론화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수밖에 없다.

확고한 나의 의지를 알았는지 다들 성환이 쪽을 돌아봤다.

2대 주주니깐 말리라고 넌지시 눈치 준 거다.

성환이도 알아챘는지 헛기침 한 번 하며 말했다.

"투자는 그때 가서 결정하시죠. 말만 듣고는 잘 모르겠으니깐."

이 정도면 일단 절반의 성공.

일단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성환이 말에 다른 주주들은 더 이상 반대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천대표 그럼 오늘 모인 목적이 뭐지?"

"투자 회수 건으로 논의하려고요."

"회수하다니 뭘?"

"YK 정영균대표 투자 건이요. 이제 현금화할 시기인 거 같아서요."

"뭐라고? 아니 왜? 정영균대표 지금 얼마나 잘나가는지 뻔히 알면서."

정영균대표의 YK.

작은 창고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으로 창업 몇 년 만에 대박 신화를 써가며 곧 유니콘 기업 등극이 확실하다고 업계 평이 자자하다.

정말 다행히도 설립 초기 우리 천하태평이 단돈 7천만 원으로 10%의 지분을 잡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다른 업체들로부터 몇 번의 투자를 더 유치함으로써 우리 지분율은 4%로 낮아지긴 했지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몇 년 안에 수백억이 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회귀하던 때까지도 상장하진 못했었다.

아무리 높은 수익률이 기대되더라도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무리다.

아깝긴 하지만 지금 현금화해서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거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팔아도 충분히 괜찮은 수익이 될 겁니다."

"물론 그렇지만. 나중에 상장하고 팔면 훨씬 큰돈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김철수 이사의 말이 맞긴 하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몇 년 안에 상장도 하지 못할뿐더러, 그 사이에 암호화폐가 훨씬 더 떡상할 거라고 천기누설할 수도 없고.

방법은 하나뿐.

인정에 호소하는 거다.

"이사님. 절 못 믿으십니까?"

'그럴 줄 알았다'라는 식으로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총꾼으로 만났을 때부터 와이프 병원비는 물론 성환이 소유회사로 꽂아주는 등 수렁에서 건져준 게 누군데.

역시 한마디로 상황 종료다.

"나야 천대표. 당연히 믿지."

원모와 건환이가 성환이를 쳐다봤다.

대신 나서달라고 한 거다.

그러나 성환이는 두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한번 믿어보시죠. 뭐. 어차피 다들 반대했는데도 거기 투자하자고 우긴 게 대표님 본인인데."

내가 대충 아는데 저건 '날 믿는다'라기보단, '그러든지 말든지 한번 해 봐라'라고 한 거다.

자기한텐 천하태평의 투자수익보단 천하제일로 금의환향하는 게 더 중요할 테니.

* * *

강남의 한 사무실.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인원이 늘다 보니 사옥을 옮긴 듯했다.

어두침침하고 햇볕도 잘 안 들어오는 창고 같은 곳에서 이제는 강남의 뻔쩍뻔쩍한 건물 꼭대기 층에 회사명까지 떡하니 박아놓고 입주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천대표님."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정영균대표.

여유 있는 웃음과 함께 자신 있게 내미는 손은 제법 잘나가는 경영자다웠다.

"네 오랜만입니다. 정대표님."

"정말 아쉽게 되었군요. 꽤 오랫동안 함께 할 줄 알았는데요."

"뭐. 다음에도 언제든지 함께할 기회가 있겠죠."

"삼촌께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촌 동생 회사에도 투자하셨다고요."

정승균대표 회사에 특허권 출자한 걸 말한 거다.

"네 맞습니다. 워낙 집안에 출중한 인물들이 많으시네요."

"에이 뭘요. 다들 부모님 말씀 잘 안 들어서 그런 거죠."

정영균대표가 제대로 짚었다.

부모님들은 항상 '큰일 해라 '성공해라' 말로는 주문을 외우면서도 실상은 험한 가시밭길 밟지 말고 꽃길만 걸으라고 강요한다.

물론 실패와 좌절을 겪지 말고 안정적으로 살라며 걱정스러운 마음에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건 성공은 험한 가시밭길 뒤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부모님 말씀 잘 안 듣고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극복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자만이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거다.

물론 실패해서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힘 역시 가지고 있다.

잠시 후.

천하태평이 가진 지분을 전부를 매입하겠다는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정영태교수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네. 천대표님. 지난번에 아들놈한테 도움 주셨다고 들었어요."

"도움이라뇨? 가능성에 투자한 거죠. YK 지분도 다른 업체가 아니라 교수님께 매각하게 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나도 조카 회사라서가 아니라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거예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영균대표님 예전에 천하제일 입사에서 떨어진 게 참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이럴 줄 몰랐었는데. 허허"

과거 정영균대표가 천하제일 입사 지원했을 때 내가 도왔던 얘기, 면접 때 답변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흐뭇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드디어 주식양수도계약서에 사인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7천만 원을 투자했었지만, 계약서상 매각금액은 120억 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몇 년 만에 무려 200배에 육박하는 수익.

물론 초대박 수익으로 기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허탈함도 고개를 살짝 들었다.

마냥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더 큰 수익을 얻을 게 뻔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돈과 성공이 그에 비례해서 삶을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기 때문이다.

돈이나 성공 말고도 행복의 필요조건이 더 있다는 얘긴데.

그게 뭘까 곰곰이 고민하면서 걸음을 내디뎠지만 딱히 뭔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길가에 모범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이 정도 벌었는데 한 번쯤은 타도 되는 거 아냐'라고 잠시 흔들렸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택시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마음을 흐트러트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참을 걸은 뒤 드디어 도착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들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특히 원모가 활짝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대표님!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셨습니까' 아니냐?"

"대표님 말고요."

"그럼 뭐?"

"120억이요."

"뭐? 벌써?"

"네. 이십 분 전에 찍혔던데요? 원래 오늘 계약금만 받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잔금은 다음 달인데?"

"오늘 잔금까지 다 보내버렸나 본데요."

"어차피 조카 회사라서 특별한 리스크 없다는 걸 아니깐 그랬나 보네. 물론 자금도 여유 있고."

"그리고 예전 한남동 빌라처럼 그런 것도 있겠죠."

"빌라라니?"

"네. 계약 깨자고 딴말이라도 할까 봐 잔금까지 한 번에 쏴버린 게 아닐까요?"

물론 주식은 부동산과 다르지만 그래도 원모 녀석 나름 응용력도 갖췄다.

김철수 이사도 나서서 한마디 했다.

"역시 정교수님이시네. 아주 화끈하셔."

매각에 반대할 때는 언제고 특히 김철수 이사가 제일 신나 하는 것 같았다.

성환이 역시 환호성을 내지르진 않았지만 흐뭇해하는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떼돈이 들어왔다는 말과 다들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니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서의 허무함, 안타까움 같은 감정은 어느 정도 털어버릴 수 있었다.

법인계좌에 찍힌 120억 원.

세금 떼고도 100억 원 가까이는 가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정영균 대표 건은 회수했고 남은 투자들을 정리해봤다.

첫 번째 이태성대표의 비라.

천하제일에서 같은 서비스 출시하면서 관련 사업은 접었고 그 뒤 연명한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비전 없다.

잠정적 실패다.

두 번째 김범룡대표의 신발추천 어플.

잘나가면서 사업을 키우다가 마카오 도박에 연루되면서 망했고 최초 3억 원에 추가 투자 20억 원까지 모두 날려버렸다.

확정적 실패다.

세 번째 유수호대표의 신도시 아파트 개발 건.

50억 원 대여는 두 달 뒤 100억 원으로 회수할 예정이며, 50억 원 지분 투자는 2년 뒤 분양 완판되고 큰 수익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잠정적 대박이다.

네 번째 정승균대표의 30억 원 특허권 현물출자건.

아직은 가능성 단계.

사실 사업성보단 성환이의 천하제일 우호 주주(정영태교수) 섭외 차원에서 투자한 거다.

가능성 반반.

다섯 번째 JV 투자 건 35억 원.

유수호대표와 공동 시행으로 강남 도심형 실버타운 사업.

준공 후 매각해서 현금화할 수도 있지만, 자체 운영함으로써 계속적인 수익 창출도 가능하다.

잠정적 대박이다.

두 달 뒤에 회수할 수호개발 대여금 제외하고 나머지 투자 건들 모두 당장 회수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회수하면서 암호화폐에 투자하면 된다.

흐뭇한 마음에 소파에 누워 싱글벙글하고 있는데 누군가 찾아왔는지 사무실 벨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울리는 벨 소리.

그래, 기분도 좋은데 내가 한번 가준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문 쪽으로 향하니 바깥에선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열어서 가볍게 포옹했다.

"수만아! 웬일이야?"

"차장님! 아니지 대표님이시죠. 안녕하셨습니까?"

예전 천하제일 중국사무소에 근무하던 하수만 대리다.

조윤경이 탈 엘리베이터 안 잡아놨다고 의전 실패로 내쳐져서 퇴사했다가 내 추천으로 J사 정동사장이 현지 채용했던 그 친구다.

그 이후로 몇 년 만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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