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42화 (142/191)

142화 새로운 구상

너무 노골적으로 들이댔나.

선긋기도 모자라 이제 막 밀어내려나 보다.

"아닙니다. 선생님.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깐 부담 갖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연신 손사래를 치셨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이사를 하게 돼서."

"네? 이사하신다고요?"

"응. 우리 집사람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휠체어 타야 할 거 같은데 우리 동네는 위험해서 말이지."

하긴 휠체어를 타고 그리 가파른 곳에 거주하기는 어려울 거다.

맘 편히 외출하기도 힘들 테고.

"잘 되셨네요. 그럼 좋은 곳으로 가십니까?"

"마땅한 데가 없더라고."

"마땅한 데라뇨?"

"병원이랑 마트도 가까우면서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 말이야."

"서울엔 그런 데가 없을 거 같네요. 그럼 근교로 가십니까?"

"응. 판교로 가네."

판교라면 강남도 비교적 가깝고.

분당만 가도 대학병원이 있고 강남까진 아니라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다.

"아쉽네요. 그럼 주차장은요?"

"정리해야지. 어차피 매각하면 없앨 테니깐."

며칠간의 동행에 나도 모르게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김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그래. 자네도 잘 지내게."

"네. 가끔 성환이랑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언제라도 오게."

김선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천 원짜리라도 찾으려나 보다.

두 손을 뻗어 만류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저 돈 많아요."

"돈 아닌데?"

김선생이 꾸깃꾸깃 조그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내 명함이야.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냐."

무늬 없는 하얀 바탕에 달랑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래 잘 가게."

* * *

사무실로 향하는 길.

어느새 날이 밝았는지 가느다란 햇볕이 새벽의 어스름을 완전히 몰아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소파 위에 대짜로 뻗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잠이 오질 않았다.

김선생이 이사 간다는 말에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서울 근교, 마트, 병원 등.

한참 뒤 사무실 밖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리더니 사무실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퉤퉤!'

'띠리링!'

침 뱉은 손가락으로 지문인식기에 댄 소리다.

원모 자식.

그렇게 얘기해도 그새 또 저 X랄이다.

사무실로 들어서서 나를 발견했는지 한마디 했다.

"아예 노숙자 다 됐네."

"노숙자는 너지. 강아지 오줌 위로도 뒹구는 놈이."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듯 버벅거렸다.

"대표니……임 안 주무셨습니까?"

"주무셔도 귀는 열어놓거든?"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제 말은 딴 게 아니라 그저 대표님 건강이 걱정돼서요."

"잠 집에서 자고 일찍 출근하는 거뿐이거든? 나 매일 옷 갈아입는 것도 안 보이냐?"

"네?"

"어느 대목에서 놀란 거야?"

잘못 알아들었는지 귓구멍을 파는 시늉을 했다.

"아니 매일 옷을 갈아입으신다고요?"

"당근이지. 그럼 넌 아냐?"

"반찬 같은 거 흘리지 않으면 쭉 입지 말입니다."

어쩐지 항상 사무실 안이 항상 매캐하더라니, 환기시스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자식이었다.

비슷한 옷이 많나보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째 넌 결혼하고도 똑같냐?"

"네. 제가 빨래 담당이거든요."

"거봐. 내가 뭐랬어? 결혼기념일이 제삿날이라고."

원모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해가 중천을 향하자 성환이 기어들어 왔다.

기어들어 온 게 아니었다.

조금의 미안한 마음도 없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식아. 일찍 일찍 좀 다녀라. 난 새벽마다 김선생님 짐 들어줄라고 이 고생인데. 도대체 지금이 몇 시야?"

성환이 태연하게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12신데요?"

"끝이야?"

"아! 점심때구나. 식사 가시죠. 내가 살게요."

그 한마디에 화가 바로 누그러졌다.

"중국집은 사절이다."

"네. 메뉴는 대표님이 정하는 걸로."

바로 원모를 돌아봤다.

역시나 묻지도 않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는 답부터 했다.

"넵. 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으면서 비싸기도 해서 자기 돈 주고 먹기 힘든 곳이요? 전화 걸어놓겠습니다."

척하면 척이다.

* * *

아주 만족스러운 점심을 하고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성환이 꼭대기 층을 눌렀다.

"어디가?"

"수호 만나서 대책 세워야죠. 이제 아저씨하고 못 만난다면서요."

"그러자. 어차피 할 말도 있는데."

사실 아침 내내 소파에 누워 잠 안 자고 계속 생각했었다.

그 땅에 어떤 사업을 할지, 무엇을 지으면 좋을지 고민 또 고민했다.

김선생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니 답이 어느 정도 그려졌다.

유수호 대표는 우릴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천대표님,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고생은요."

"김선생님하고도 인연이 있으셨다고요?"

"네. 어쩌다 보니까요. 평상시 주위 사람들 많이 돕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성환이 흰자를 드러내고 째려봤다.

"뭐가 문젠데?"

"어련하실라고요."

유수호 대표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결국 거절당하셨다고요?"

"네. 성환이 인연으로도 힘들더라구요."

"그러면 이전 합의는 없었던 일로 하면 되겠습니까?"

기여한 게 없으니 빠지라는 거다.

해 보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이게 뭐냐고 핀잔준 거다.

"뒷문은 안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만 정문으로 들어갈 구상을 했습니다만."

유대표 호기심 어린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셨군요?"

아침 내내 소파에 누워 구상했던 걸 떠올렸다.

김선생의 입장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고민 또 고민하니 답은 하나였다.

"네. 도심형 실버타운을 짓는 겁니다."

"네? 실버타운이요? 양로원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유대표나 성환이 모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양로원이나 요양원 같은 복지시설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입주금을 내고 살아가는 주택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테헤란로에다가요?"

평당 몇억을 호가하는 강남 한복판에 사무실 빌딩이나 호텔, 백화점 같은 것도 아니고 실버타운이라니.

어이없어하는 유대표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네. 맞습니다. 여긴 전국의 유명 맛집, 마트나 백화점 등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고 근처에 대학병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접근성이 좋아서 자녀들이 찾아오기 편하죠. 공기 좋고 물 좋은 데 있어 봐야 심심하기만 하지 재미가 없잖습니까?"

김선생이 찾고 있던 게 바로 이런 거다.

어르신들이 모여 살면서 취미생활도 같이하고 도심에 자리해 인프라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으면서 큰 병원도 가까운 곳.

교통도 편해 자녀들이 수시로 방문할 수 있는 곳.

바로 강남이다.

사업성?

물론 노인 빈곤 문제가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와 헤게모니를 꽉 쥐고 있는 세대 역시 그분들이다.

점점 더 젊어지고 부유해지는 시니어 세대들이 소비 패권까지 꽉 쥐고 흔들게 될 것이다.

직접 밥 해 먹기는 귀찮고 경제적 여유도 많은데 굳이 먹고 살기 빠듯한 자녀들에게 부담 주기도 싫고 그냥 여생 편하게 즐기는 추세가 될 거다.

아무리 그래도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그 비싼 가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

돈 싸 들고 줄 설 거다.

유수호 대표에게 곧 다가올 미래를 살짝 흘리면서 사업성이 있음을 설파했다.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설명에 잔뜩 굳어졌던 유대표의 표정이 점점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네. 좋은데요. 가능할 거 같습니다."

성환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다음 주에 말씀해 주신 대로 사업계획서 제출하겠습니다."

"네. 그럼 저희는 JV(조인트벤처)에 출자할 자금 마련하겠습니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바로 원모를 찾았다.

"원모야! 자금수지계획표 가져와 봐."

"네? 자금수지요?"

"그래. 자금계획 달라고."

"없는데요?"

"뭐 없다고?"

"천하제일처럼 고정사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고 나갈 계획이 어딨습니까? 기존 투자분 매각해야 들어오고 신규 투자해야 나가는 거죠."

원모 말이 맞았다.

따로 고정수입이나 지출도 없을뿐더러 신규 투자나 매각을 계획해 놓은 건 아니니깐.

"지금 얼마 있는데?"

"네. 법인계좌에 33억 있습니다. 세 달 뒤엔 수호개발 대여금 상환받을 거구요."

잔고와 상환 스케줄이 바로 나왔다.

역시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최소 출자금액 35억보다 살짝 모자랐다.

"원모야!"

"네."

"이번에 얘기되고 있는 합작투자건 있잖아. 잘 될 거 같아."

"잘됐네요. 마침 여유자금 썩히는 게 아까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금이 조금 부족해."

"네? 부족하다뇨? 얼마나요?"

"2억. 그래서 말인데 네가 빌려 간 돈 그거 어떻게 안 될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천하태평에서 빌려 간 주임종대여금 말야. 갚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

"설마 신혼집 구할 때 빌린 돈 말씀이십니까? 단기도 아니고 말 그대로 장기대여금이잖습니까?"

회계상으로는 만기가 1년 이내에 도래하면 단기(유동성)로, 1년을 초과하면 장기(비유동성)로 분류한다.

단순히 금액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유동성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1년 이내 갚아야 할 빚이 현금화 가능액보다 많으면 망한다고 얘기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좋은 투자 기회가 있는데 부족해서 말이지. 딱 네가 빌려 간 그 돈만큼."

"안 됩니다. 저보고 지금 길바닥에 나앉으란……."

원모 씩씩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듣고만 있던 성환이 나섰다.

"대표님 너무하시네. 한여름에 노숙까지 하고 지켜낸 전세금인데 그걸 달라뇨?"

"그럼 어떻게 해? 딱 그 돈만큼 부족한데."

"이렇게 하시죠."

"뭘?"

"차환하시죠. 내가 해 드릴게요."

차환이라.

빚을 갚기 위해 다른 빚을 진다는 말인데.

돌려막기라 모양새는 안 좋지만 실제로 매우 흔한 방식이다.

"네가 대신 갚겠다고?"

"네. 내가 넣을게요. 원모님은 천하태평에 진 빚을 갚는 거고 대신 저한테 빚진 거죠. 이자는 한 푼도 안 받겠습니다."

나 같으면 거부할 텐데.

원모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데다 무이자란 말에 흔쾌히 답했다.

"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대표님께 매번 갚으라고 잔소리 안 들어도 되고 말입니다."

"네. 그러시죠."

지금이야 좋은 관계지만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건데.

원모는 자기 목에 씌어질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른다.

* * *

일주일 뒤 오후 시간.

회귀한 후 '몸이 젊어졌구나'라고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이 시간이다.

회귀 전에는 보통 짜장 한 그릇만 해도 제대로 소화를 못 시켜 더부룩했었는데 회귀 후에는 곱빼기까지 여유 있게 소화해낸다.

소파에 누워 적당한 배부름과 졸림을 만끽하는데 누군가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원모가 데리고 들어온 손님은 유대표였다.

어제 사업계획서를 제출했고 며칠 뒤에 발표한다고 들었는데.

유대표의 표정을 딱 보아하니 느낌이 왔다.

"벌써 발표 났군요?"

"네."

말없이 웃음 한 번 내비침으로써 결과를 알려줬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위해 유대표가 내민 손을 맞잡고는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

단순히 자본만 투자하는 게 아니라 공동이지만 직접 사업 시행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합작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

"천대표님 덕분에 저희도 새로운 사업 방향을 세웠습니다."

"네? 어떤 사업이죠?"

"이번 합작 건 말고도 실버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가장 뜰 산업이죠."

역시 유대표. 촉이 좋다.

업계에서 가장 잘나갈 인물임이 틀림없다.

세레머니가 끝나고 홀로 남은 사무실.

서랍을 열어 구겨진 명함 한 장을 빼 들었다.

김선생이 건넨 명함이었다.

적혀있는 번호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바로 받았다.

"어르신! 천태평입니다."

"오 자넨가?"

"이번에 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네.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그런 훌륭한 사업을 하겠다는데."

"다 어르신께서 가르침을 주신 덕분이죠."

"아니네. 잘 알아듣고 그림까지 그릴 줄 아는 자네 덕분이지. 그리고 우리 부부가 1호 입주자로 들어가기로 했네."

"아, 그러세요? 잘됐네요!"

"그래. 그런데 앞으로는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도 도울 수 있는 걸 구상해보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덕담을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통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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