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김선생
"여긴 주차장인데. 맞게 온 거야?"
"당근이죠. 네비가 설마 거짓말하겠어요? 얼마 주고 심은 건데."
"빈 땅이라고 하지 않았어?"
"놀리기 뭐하니깐 주차장이라도 하는 거겠죠."
테헤란로에 있는 빈 땅이라.
주위를 둘러봐도 건물이 없는 땅은 오직 여기뿐이다.
뭔가 그림이 그려졌다.
어제오늘 무려 세 번에 걸쳐서 주차장 관리인 할아버지를 도와드렸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분명 이 땅의 소유자를 알고 있을 것이다.
월급 받는 직원 아니면 임차인일 수밖에 없을 테니.
참을 수 없는 웃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성환이 이상하게 여긴 듯 한마디 했다.
"뭐지?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신나는 거지?"
"내가 여기 주차장 관리인 할아버지를 잘 알아."
"관리인을 알아서 뭐 하게요? 우리 회사 빌딩으로 치면 유수호가 아니라 경비아저씨를 안다는 거잖아요."
"맞아. 대신 그분이 땅 주인을 잘 알겠지. 최소한 연락처라도 알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전히 미덥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됐고. 어떻게 아는 사인데요?"
"그게 말야……."
성환이에게 어제오늘 있었던 신기한 인연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성환이 별다른 감흥은 없는 듯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 또한 시큰둥했다.
"그게 뭐요? 난 또 뭐 대단한 인연이라도 되는 줄."
"됐고. 일단 들어가."
"네?"
"주차장에 차 대라고."
"여기다요?"
"괜찮아. 주차비는 원모한테 말해서 경비 처리하게 해줄게."
"사람을 뭘로 보고. 아니 여기 흙바닥이라 먼지 많잖아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나한텐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게 주차비 내는 건데.
이놈은 먼지 쪼금 앉는 게 더 두렵나 보다.
"그럼 회사 가서 차 대고 걸어오든지."
그건 또 귀찮은지 툴툴대며 주차장에 진입했다.
차를 대놓고 관리인 할아버지가 계신 컨테이너 쪽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계세요?"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귀를 기울였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끼익~.'
컨테이너 문을 열자 낡은 세간살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간이침대는 물론 간단한 요기도 해 드시는지 가스버너와 식기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한쪽에 옷과 이불까지 있는 걸 보니 가끔 여기서 주무시기도 하나 보다.
"아무도 안 계시나 보네."
"다음에 오죠, 뭐."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뒤에서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오셨죠? 무슨 일이신지?"
뒤를 돌아보자 관리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저요. 접니다."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눈은 초점이 살짝 빗나간 듯 다른 곳을 향했다.
새벽이라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었지만 사시기가 있으셨나 보다.
옆에 있던 성환이 깜짝 놀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허걱! 아저씨……? 맞죠?"
할아버지 역시 성환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물었다.
"혹시 성환이니?"
"네. 맞아요. 김씨 아저씨 맞으시죠?"
사시가 아니었다.
방금 할아버지가 날 보고 놀란 표정을 지은 게 아니라 성환이를 보고 그랬던 거다.
흐트러져있던 퍼즐이 맞춰진 듯.
뭔가가 땡하고 머리를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할아버지가 바로 김선생이다!
세상에 그렇게 돈 많다는 분이 굳이 직접 주차장 관리까지 하다니.
게다가 이렇게 누추한 곳,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컨테이너 안에서 먹고 자기까지 하면서.
여름엔 찜통이고 겨울엔 자연 냉장고가 따로 없을 텐데.
20년 동안 숨어 지냈다는 게 이해가 갔다.
사는 곳, 주로 방문하는 곳과 씀씀이가 달라졌을 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동선이 겹쳐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는구나. 너무 커서 몰라보겠어."
"네. 아저씨도 많이 늙으셨네요. 아주머니는요?"
면전에서 늙었다고 하다니.
성격도 원래 그렇지만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라는 얘기다.
"집사람도 많이 늙었지."
김선생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듣기 싫은 말 했다고 바로 돌려까다니.
"에이, 그 말이 아니잖아요. 아주머니 안녕하시냐고요?"
"그럼. 잘 지내지. 조회장도 안녕하신가? 티비에선 요즘 뜸하시네."
"네. 여전하십니다."
이십 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인연.
못 봤던 동안 서로의 안부를 몰아서 물으며 다정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무척 어렵겠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 분위기면 끝이다.
답안지를 들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랄까.
바로 들어가서 유대표에게 떵떵거릴 수 있겠다.
김선생이 차를 대접하겠다고 커피포트를 찾았다.
잽싸게 성환이 발을 툭툭 쳤다.
'이제 됐다. 본론을 꺼내라'라고 얘기한 거다.
성환이 역시 바로 알아차렸는지 김선생이 차를 내오자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아저씨!"
"어. 그래 말해봐."
"저희가 오늘 왜 왔는지 아세요?"
"근처에 온 거 아닌가? 주차하려고?"
"아닙니다. 아저씨 뵈러 온 거예요."
"나를? 무슨 일로?"
성환이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온 목적을 말했다.
매물로 나온 이 땅을 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꼭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김선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안 돼."
"네? 안 되다뇨? 우리 사이예요?"
김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물론 자네 집안과 내 사이는 각별하지. 하지만 내가 자네 손을 들어준다면 이건 공정하지 않은 거잖아. 게다가 난 단순히 돈 때문에 팔겠다고 한 게 아니야."
"그럼요?"
"땅의 가치를 높이려는 거지."
"가치요?"
"땅은 누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에 있어서 엄청나게 차이가 나. 내가 젊었을 땐 무조건 돈만 좇느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돈을 좇는 게 뭐가 나빠서요?"
성환이 말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비록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하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김선생의 생각은 많이 다른 듯했다.
전혀 동의한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다들 그러니깐 지금 강남 바닥이 이렇게 삭막하게 변했잖아."
"삭막하다뇨?"
"헛된 욕망만 충족시켜주려고 인간미를 잃었다고 할까?"
성환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래를 가로저었다.
김선생 이십 년간 두문불출했다더니 왜 그런 건지 대충 이해가 갔다.
과거에 악착같이 사채놀이하면서 떼돈을 벌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손을 더럽혔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남을 짓밟는 것도 모자라, 피눈물까지 흘리게 하는 등 악랄한 짓 꽤 많이 했을 거다.
그러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구나'라고 깨달아 더 이상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그 바닥을 뜬 것이다.
성환이가 더 징징대고 매달려봐야 소용없을 거 같다.
그만하라고 조용히 성환이 발끝을 툭툭 쳤다.
성환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내 포기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저씨."
"그래. 잘 생각했어."
혹시 포기하겠다는 말로 오해할까 봐 내가 끼어들었다.
"저기요. 할아버지. 아니 선생님."
김선생이 금세 환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왜? 퇴근할 때 도와줄라고?"
이젠 대놓고 짐꾼 해 달라고 한다.
"죄송해요. 오늘 야근 있어서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토지 건이요."
야근이란 말에 성환이 째려봤다.
"토지 건이라니?"
"저희도 정정당당하게 참여하겠습니다. 어떻게 활용할 건지 사업계획서 제출하겠다고요. 대신 조그만 업체라고 제대로 보지도 않고 빼버리시거나 던져 버리시면 안 됩니다."
아무래도 계획한 대로 실현할 가능성은 대기업이 높겠지만 대기업은 고비용구조 때문에 수익성을 극대화하려고만 할 거다.
그러니 오히려 우리같이 작은 업체들이 유리할 수도 있다.
공정한 경쟁만 가능하다면.
김선생 무슨 말인지 대뜸 알아들었다.
"내 약속하지. 대기업이라도 잘 봐주고 작은 업체라고 무시하지 않겠네. 공정하게 판단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게."
됐다.
이 정도면 평평해진 운동장이니 한번 해 볼 만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성환이가 주차비 내겠다는데도 극구 말리시더니 오히려 용돈이라고 지폐 한 장을 건네주었다.
역시 천 원짜리였다.
성환이는 사양하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차에 올랐다.
기분 좋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용돈 받으니까 좋냐?"
"당근이죠. 너무 오랜만이라 좋은데요."
하긴 성환이한테 용돈을 쥐여줄 만한 사람은 없었을 거다.
"용돈도 받았으니깐 밥 사라."
"갑자기 무슨 맥락이지? 딸랑 천 원 받았는데 밥 사라니."
"그 돈 말고 카드로 사면 되잖아."
"그러죠. 대신 메뉴는 내가 정합니다."
어째 기분이 좋은지 순순히 응했다.
메뉴야 뭐든 상관없다.
짜장면만 아니라면.
"그러시던지."
잠시 후 성환이 차를 세운 곳은 어느 식당 앞.
상호를 보진 않았지만, 빨간색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간판이 '나 중국집이에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뭐.
'그래 난 오늘 정말 짬뽕이 땡긴다.'
'난 꼭 해장이 필요하다.'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 * *
다음 날 새벽.
'빠빠빠빠빠! 빠빠빠빠빠!'
알람 소리다.
천하제일 그만둔 지 꽤 되니 이젠 알람 소리가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일어나기 싫은 건 여전하다.
이상하게 아무 생각 없을 땐 새벽부터 저절로 눈이 떠지더니 알람 맞추고 일찍 일어나려고 마음먹으니깐 일어나기가 어렵다.
역시 강제성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새벽공기는 역시 한결같이 맑고 청량하다.
지하철역 편의점 안에서 캔 커피 하나를 들고 출입구를 주시했다.
잠시 후.
역시 같은 시각 김선생이 나타났다.
문을 박차고 나와 김선생을 뒤쫓았다.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건넸다.
"어! 선생님 아니세요?"
어색함 전혀 없이 꽤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뒤돌아선 김선생의 표정은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싫지는 않은 듯 자연스럽게 짐을 건넸다.
"어이쿠 무거우신데 제가 들어드려야죠."
오늘도 역시 지하철 안에는 제법 자리에 여유가 있었다.
자리에 앉자 김선생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해 뜨고 출근한다고 하지 않았나?"
"원래는 그렇죠. 그런데 오늘도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져서요."
"오늘은 어제랑 완전히 다른데? 졸린 거 티 나네."
"아닙니다. 원래 눈이 처져서 그래요."
"도와주는 건 고맙다만 반칙은 안 되네."
공과 사는 구분한다고 선긋기 한 거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냥 말동무나 해드릴라고요."
지하철 안에서 또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자연스럽게 김선생의 인생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며칠 동안 같은 시각에 같이 출근하면서 점점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젊었을 때 어떻게 해서 큰돈을 벌었는지 그리고 왜 지금에서야 후회하게 되었는지 마음속 얘기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유학 보내놨더니 아예 눌러앉았다는 자식들 얘기부터 할머니와의 알콩달콩한 시절 얘기들까지.
어르신들의 로맨스도 나름 재미있었다.
오늘도 역시 선릉역에 내려 봇짐을 들고 역삼역 방향으로 향했다.
김선생 또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렸다.
"선생님! 누구 찾으세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매일 두리번거리세요?"
"그냥 보는 거야. 내 건물들."
"네? 선생님 건물이요?"
김선생이 손을 뻗어 여러 군데를 가리켰다.
"응. 이거랑 저거, 저것도."
테헤란로에서만도 여러 채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더니 정말인가보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자기 건물 한번 보려고 일부러 역삼역이 아닌 선릉역에서 내린 거였다.
강남 빌딩 부자의 마음이 어떨지 궁금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십니까?"
"그렇지. 하지만 한편으론 삭막해."
"삭막하다뇨?"
"사람이 안 보이잖아. 일상이 없고 그냥 쳇바퀴 돌아가듯 바쁜 전쟁터 같다고 할까?"
무슨 말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컨테이너에 도착했다.
매일 오다 보니 단련됐는지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고맙네."
"아닙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요."
김선생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게. 나 안 기다려도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