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40화 (140/191)

140화 주차장

새벽녁 아직 해 뜨려면 한참이나 남은 이른 시각.

오늘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젯밤 맥주 한잔 더하지 않고 바로 잠자리에 들은 덕분인지 갈증, 어지러움, 두통 같은 숙취 하나 없이 개운한 새벽을 맞이했다.

이 정도면 유대표가 건넨 견디셔도 필요도 없을 듯.

오늘도 역시 씻고 바로 집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새벽.

코끝을 스치는 청량한 새벽공기 냄새를 맡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교통카드를 대고 승강장으로 내려갔는데 어디선가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흘긋 쳐다보니 누군가가 저 앞 의자에 앉아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의자 옆에 놓인 하얀색 봇짐.

어제 그 할아버지다.

이런!

잘못하면 오늘도 역시 선릉역부터 주차장까지 짐꾼 노릇할 각이다.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못 본 척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치 애초에 여기 서서 전철을 기다리려고 한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안 통했다.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젊은이!"

내 능력 때문에 들리는 건지 이 정도 거리라면 어느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미동도 없자 재차 부르는 소리에 할 수 없이 돌아봤다.

마치 방금 처음 본 것처럼 안면에 웃음기를 띠고 인사를 건넸다.

"어!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려. 또 만났네."

할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으며 봇짐을 쳐다봤다.

'오늘도 짐꾼은 너다'라고 한 거다.

같은 동네에 사는 데다 직장마저 비슷한 데라는 걸 뻔히 아는 마당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무거우시죠? 가는 방향도 같은데 제가 들어드릴까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답했다.

"고맙네. 젊은이."

괜히 일찍 일어났다.

잠을 더 못 이루더라도 차라리 침대에서 뒤척이는 게 낫지.

내일부턴 일찍 일어나더라도 절대 새벽엔 안 나올 거라 다짐해봤다.

어제완 달리 지하철은 제법 여유가 있어서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갈 수 있었다.

이틀 만에 세 번을 부딪치니 제법 가까워졌다고 느꼈는지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자네 결혼은 했나?"

"네. 하긴 했었죠. 바로 이혼하고 쭉 혼자 삽니다. 지금은 아주 편합니다."

"쯧쯧. 그러면 쓰나? 좋은 사람 만나야지."

"좋은 사람이 있어야죠?"

"좋은 사람 있지. 짚신도 다 제 짝이 있는 법이여."

할아버지는 할머니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중매로 만난 것부터 신혼생활 그리고 요즘 황혼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자랑삼아 얘기해주었다.

요즘은 할머니가 관절이 많이 약해져서 거동이 불편하다고도 했다.

"할머니 몸도 불편하신데 왜 언덕 윗동네에 사세요?"

"집사람이 극구 반대해서 말이지. 이 동네에 오래 살아서 친구들이 다 여기 있다고."

이사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고 하는 걸 보니 보기완 다르게 형편이 많이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친구라면 이사 가서 얼마든지 새로 사귀면 되지 않나요?"

"아랫동네에는 맨 젊은 사람들밖에 없어."

"어르신들 많이 계신 곳도 있겠죠."

"그러려면 서울 밖으로 가야 해. 하지만 서울 밖에는 대학병원이 없지. 게다가 차 없으면 병원은커녕 마트 한번 제대로 못 다녀."

물 맑고 공기 좋아 어르신들이 살기 좋은 곳은 서울 근교가 맞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그런 자연환경 같은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편리함이나 접근성 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나이 들수록 큰 병원 가까운 대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듣고 보니 어르신 말씀이 맞네요."

"그래. 어쩔 수 없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지하철은 역삼역을 지나 선릉역을 향하고 있었다.

아뿔싸! 늦었다.

역삼역에 내려서 내리막길로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그냥 지나쳐버렸다.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아니 할아버지! 그때 보니깐 근무하시는 주차장이요. 역삼역이 더 가까운 거 같던데요? 왜 힘드시게 굳이 선릉역에 내려서 오르막길로 올라가시죠?"

"볼 데가 좀 있어서 그려."

"볼 데라뇨?"

"그런 게 있어."

뭘 본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도 역시 선릉역에서 언덕을 올라가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봇짐을 들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누굴 찾기라도 하는 건지 할아버지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참 뒤 드디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컨테이너 앞에까지 봇짐을 들고 가서 내려드렸다.

"고생했구만. 번번이."

"아뇨. 고생은요. 몇 번 드니깐 이제 가볍기까지 한데요?"

할아버지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반짝였다.

"자네 혹시 매일 이 시간에 출근하는가?"

헐!

매일 짐꾼 해달라고 한 거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절대 아닌데요. 요 며칠 잠을 일찍 깬 바람에 나온 겁니다. 원래는 해 뜨고 한참 뒤에 출근해요."

"해 뜨고라니?"

"네. 제가 대표거든요. 제 맘대로 출근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렇구만."

할아버지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려고 했다.

보나 마나 또 천 원짜리 한 장 쥐여주려는 거다.

극구 만류하듯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저희 회사 가면 음료수 많아요."

"에이, 그래도 받지. 번번이 도와줬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다음번에 또 기회가 있겠죠."

"그려. 그럼 다음번에 만나면 그땐 꼭 음료 한잔 사겠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턴 정말 해 뜨고 나서 집에서 기어 나올 거다.

물론 저녁때 퇴근할 때도 집 근처 그 편의점 앞은 절대 지나치지 않고 멀리 돌아가고 말 테다.

* * *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날이 밝지 않았다.

원모가 출근하려면 두 시간도 넘게 남았다.

역시 아침에 힘 좀 썼다고 피곤이 몰려왔다.

소파에서 잠시 누워있겠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는지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대표님! 대표님!!"

처음엔 툭툭 몇 번 건드리더니 반응이 없자 막 흔들어댔다.

눈을 번쩍 뜨니 원모 녀석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어서 뒤통수만 보였다.

"뭐야? 어딜 보는 거야? 부끄럽냐?"

"아휴. 언젠 또 얼굴 들이대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역시 어제 뭐라고 한마디 했다고 담아 놓고 있었나 보다.

원모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요즘 정말 집에 안 들어가시는 겁니까?"

옷도 비슷해서 회사에서 잠이라도 잤는지 알았나 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잖아."

"그럼 좋은 분 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소개팅 시켜드릴까요?"

소개팅이라.

회귀하기 전 기간까지 합치면 이십 년도 더 지났을 듯.

살짝 동하긴 했다.

"소개팅이라니? 누군데?"

원모가 마침 잘됐다는 듯 씨익 웃고서 말했다.

"와이프 작은고모가 계신데요. 이혼은 한 번 했는데 애는 없답니다."

이런 씨댕.

이혼이나 애는 상관없지만 고모라니.

날 자기 처고모부로 삼으려 하다니.

"뭐라고 고모?"

"네. 고모긴한데 나이도 대표님보다 어리다는데요."

"그럼 설마 결혼이라도 하면 네가 날 고모부라고 부르는 거냐?"

"아마도…… 그러겠죠?"

"미친……. 꺼져!"

"이쁜데요?"

진작 말하지.

"고마워 조카!" 하면서 원모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하지만 원모 역시 족보가 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살짝 발을 뺐다.

"에이. 역시 안 되겠네요. 그런데 혹시 결혼정보 회사는 어떠십니까? 요즘엔 돌싱들도 많이 가입한다는데 말입니다."

"미쳤냐? 지금 이렇게 편한데 결혼이라니?"

"에이 그래도 반려자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표님은 제가 부럽지도 않으십니까?"

"부럽긴 개뿔. 조금만 기다려봐라. 네가 날 부러워할 테니깐."

원모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절대요."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이라더니.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절대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성환이 출근했다.

물론 우리 천하태평이야 근태관리가 없긴 하지만 조금 너무하긴 했다.

허구한 날 점심 먹을 때쯤 쓰윽하고는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미안해서라도 살금살금 기어들어 오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터벅터벅 내딛는 걸음 소리가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일찍 좀 다니자."

"지금 충분히 이른데요? 그리고 우리가 출근 시간이 있었던가요?"

"그래도 아침에 머리 맑을 때 무슨 일을 할까 기획도 하고 정리도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나도 놀러 온 거 아니거든요?"

성환이 무언가 서류뭉치를 건넸다.

"이게 뭐냐?"

"수호가 얘기한 강남 토지요. 방금 수호네 사무실 들러서 등기부등본이랑 이것저것 받아왔죠."

유수호대표 사무실이라면 우리 빌딩 꼭대기 층인데.

서류 하나 받아오는 것쯤이야 아무리 오래 걸려도 십 분 안쪽인데 오전 내내 일 한 것처럼 으스댔다.

그래도 뭐 나름 중요한 일을 하긴 했다.

비록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다만 어쨌든 유대표가 정식으로 내 공동사업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니까.

성환이 건넨 등기부등본을 열어봤다.

우선 표제부.

말 그대로 제목 같은 거다.

땅의 주소와 용도 그리고 면적이 기재되어 있다.

건물이 없는 빈 땅으로 지목은 대지이며 면적은 천 평도 훌쩍 넘었다.

소유자를 기재한 갑구.

명찰 같은 거다.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며 김준형이란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김선생의 본명일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제한사항을 기재한 을구.

담보 잡힌 게 있는지 확인하는 건데 아무것도 기재된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 큰 땅을 대출 하나 없이 현찰 주고 사서 지금까지 쭉 갖고 있었다는 뜻인데.

역시나 김선생!

소문만큼 재력가가 분명하다.

주소는 대충 우리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지금 당장 가자."

"어딜요?"

"어디긴 여기지."

"빈 땅인데요? 설마 김선생이 지키고 앉아있기라도 하겠어요?"

"혹시 모르지. 아니면 그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을 거 아냐."

"에이. 그분 아무도 모른 다잖아요.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수호가 이미 해 볼 만큼 해봤겠죠."

성환이 말이 맞다.

두문불출하는 사람이 행적을 밝히고 다니진 않을 테니.

"그럼 김준형씨 집으로 가볼까?"

갑구 소유권에는 소유자의 이름과 집 주소가 기재되어 있다.

"여기요? 수호가 이미 가봤데요. 그냥 빈 집이라던데요?"

"그러겠지? 그럼 너무 쉽겠지?"

뭐, 빌딩이 몇 개라는데. 그까짓 집이야 여러 군데 수십 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테니.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별수 없네. 그럼 그냥 땅이나 보고 오자."

"대표님 혼자 가시죠."

"네가 수행비서 하기로 한 거 잊었어?"

성환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정 부렸다.

"아이 좀 적당히 하시면 안 됩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확 그냥 유라한테 가서 네가 수작 부린 거라고 불어 버릴까 보다."

성환이 인상을 쓰고 일어났다.

"네네. 그냥 가시죠."

"뭐야! 왜 이렇게 순순히 일어나는 거지?"

"그럼 다시 앉을까요?"

"아니야 뭔가 있어……. 너 혹시 유라씨 다시 만나기라도 하냐?"

"에이. 유라는 무슨……."

성환은 억지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지만, 표정까지 감출 순 없었다.

보기보다 순진한 자식!

다시 유라랑 만나는 게 확실하다.

던지기에 당해서 구속되는 등 오해로 인해 자연스럽게 헤어진 거니 둘 사이에 악감정이 남아 있지도 않았을 테고 충분히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거다.

잘하면 이거 약점 잡아서 몇 번 정도는 우려먹을 수도 있겠다.

성환이 차에 올라타고는 네비로 주소를 찍었다.

정말 네비가 나타낸 지도에는 휑한 게 건물 하나 없는 공터처럼 보였다.

도착 예정 시간은 2분이라고 찍혔다.

"뭐야 이렇게 가까워? 기름값도 아까운데 그냥 걸어가지?"

"이미 시동켰거든요? 그리고 기름 한 번 안 넣어주면서 웬 기름값 타령. 누가 보면 한 번이라도 넣어준지 알겠네."

"닥치고 출발해."

차는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와 테헤란로에 진입했다.

오늘 새벽에 봇짐 들고 걸어 올라가던 그 길이었다.

도착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오늘 아침에 갔던 그 주차장과 비슷한 데인가 보다.

300미터.

100미터.

점점 가까워지더니 네비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차가 멈춘 곳은 오늘 아침에 봇짐 들고 끙끙대며 왔었던 바로 그 주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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