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30년산
시간이 꽤 흐른 듯 선릉 방향 통창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성환이나 김철수 이사 모두 출근해서 자리했다.
그러자 원모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리에 일어나서 인사를 건넸다.
"지난주 멀리 제 결혼식까지 와주시고 직접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로만?"
"에이 그럴 리가요. 제가 조그만 선물 하나씩 준비했지 말입니다."
한 명씩 손에 선물 봉지를 건넸다.
원모 말대로 정말 조그마했다.
게다가 깃털만큼 가볍기까지.
"이게 뭐냐?"
"건망고입니다."
흔하디흔한 말린 망고.
"뭐라고 망고?"
"네. 귀하디귀한 말린 망고죠."
"귀했었나?"
"에이! 엄청 비싼 겁니다. 비싼 만큼 맛도 있으니깐 댁에 가셔서 드셔 보십시오."
돈 좀 썼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으스댔다.
작년에도 먹었고 지난달에도 먹었고 내년에도 먹을 노란 포장 속 건망고.
양재동 대형마트 매대에 쫙 깔아놓은 것과 똑같은 브랜드.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집어와서 가끔 맥주 안주 삼아 씹어먹던 바로 그거다.
이따위를 결혼 답례선물이라고 가져오다니.
역시 대단하다.
이 자식 정말 세부에서 사 오기라도 했다는 건가?
설마 이놈이 입회비도 있는 양재동 마트에 갈 리는 없을 테니 정말 사 왔을 거다.
보나 마나 패키지 관광객들만 가득한 허름한 쇼핑센터에서 눈탱이 맞고 왔을 거다.
바로 봉지를 뜯어 입에 갖다 댔다.
이를 보고 원모가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대표님. 비싼 건데 아껴서 드시죠. 댁에 가서 천천히 드십시오."
집에 많거든?
우리 집 찬장에 라면보다 많이 있거든?
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진정성 있는 표정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성환이나 김철수 이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잘 먹을게, 원모야!"
"고마워요. 원모님."
예의상 건넨 말인지 모르는 원모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성환이가 목이 마른 지 탕비실 쪽으로 가자 원모가 살며시 다가갔다.
"저기. 조성환님!"
"네? 왜요?"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선물이요. 성환님 건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아까 출근하면서 살짝 책상 밑에다가 쇼핑백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환이 놀란 듯 토끼 눈을 했다.
"에? 전 괜찮은데요."
"에이 그래도 성환님께는 특별히 따로 준비해드려야죠."
"네. 근데 뭔데요?"
말은 괜찮다고 했으면서도 궁금하긴 한가 보다.
원모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리며 조용히 답했다.
"위스키입니다. 발렌타인이요. 무려 30년산입니다."
30년산 2월 14일 그 브랜드라니.
저놈이 그 비싼걸.
그것도 성환이한테만 건네주다니.
축의금 천만 원의 위력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해한다.
그렇지만 나한테도 17년산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약간 서운하기는 했다.
밝은 표정의 원모와는 달리 성환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뜨뜻미지근하게 답했다.
"아. 네."
제 딴에는 큰 맘 먹고 대단한 걸 준비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시큰둥한 반응에 원모가 의기소침해졌다.
성환이 빠르게 눈치채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위스키 마신 지 좀 됐는데."
하지만 안 들리게끔 조용히 혼잣말로 덧붙였다.
"이왕이면 싱글몰트로 하지. 웬 브랜디?"
성환이 녀석 취향 한번 완고하다.
나야 맛을 잘 모르니 그냥 연식 오래되면 최고지만.
성환이는 위스키는 한 가지 곡물로 한 증류소에서만 만든 싱글몰트만 고집하는 거다.
"네. 그런데 비밀로 해주십시오. 특히 대표님한테는요."
말과 동시에 내 쪽으로 돌아봤다.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잠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설마 들리기라도 하겠어? 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환은 당연히 내가 들었을 거라는 걸 알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주군은 자기다'라고 말해준 거다.
비단 이번 결혼식 축의금 때문만은 아니다.
어차피 예전부터 이미 넘어간 걸 느끼고 있었다.
아쉽지만 원모를 보내주겠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따지고 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내가 대표이니 일로서도 나에게 반대하지 않을 테고.
성환이와 원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왔다.
나 역시 그저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성환아!"
"네?"
"오늘 웬일로 술이 땡기네. 너 혹시 술 가지고 있냐?"
"에이, 말도 안 돼. 회사에 어떻게 술을?"
"그럼 저건 뭔데?"
손을 뻗어 성환의 책상 밑 쇼핑백을 가리켰다.
역시 성환이보단 원모가 흠칫 놀란 기색이다.
"아……. 저건."
대답이 끝나기 전 내가 재빠르게 다가가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뭐야 이게? 술 맞구만."
"아……. 그게."
"혹시 누구한테 선물이라도 받았나 보지? 그래서 못 먹어?"
"아니 그건 아니고."
"맞다. 너 블랜디 안 좋아하지? 어차피 넌 맥캘란 같은 싱글몰트만 먹잖아."
내 말에 원모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별로 내키지 않는 선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성환아. 그냥 오늘 이거 까자."
"원모야!"
태연하게 원모를 쳐다봤다.
"네?"
"같이 가자. 어차피 성환이 이런 거 안 먹을 텐데."
성환이 곤란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하면서 팔을 휘저었다.
"내가 왜 안 먹어요? 그냥 오늘 드시죠. 오랜만에."
"알았어. 원모 너도 가는 거지?"
"전…… 신혼이라."
"신혼은 무슨? 결혼 전부터 같이 살았다며."
"에이 그래도 다르잖습니까?"
"그래? 알았어 넌 빠져. 김이사님은 시간 괜찮으십니까?"
김철수 이사 역시 눈치 백 단이다.
마치 준비라도 해놓은 듯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도 빠질게.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말이지."
"네. 후배들 약속이시죠?"
성환이도 이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내뱉으려고 하자, 말을 가로챘다.
"뭐? 너도 약속 있다고? 할 수 없지 그럼. 저 술만 놓고 가. 나 혼자 먹으면 되지 뭐."
선물 받자마자 면전에서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도 없고 난처했는지 바로 포기했다.
"에이 약속은요. 그냥 메뉴 뭘로 할지 물어볼라고."
술에 어울리는 안주를 따로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지금 내가 뭘 당기는지 그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오늘은 달달 고소한 양념갈비다.
"양주니까 가벼운 걸로 가야지."
"가벼운 거 뭐요?"
"양념갈비!"
성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찼다.
"쳇! 갈비가 가벼워요?"
"그럼 가볍지 무겁냐?"
"뭔 소리래?"
"길 가다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을 봤어. 그런 사람을 갈비라고 부르지, 삼겹살이라고 부르냐? 갈비가 그만큼 가볍다는 얘기잖아."
방금 생각해 낸 것 치고는 너무나 적절한 비유였다.
역시 반론이 불가했는지 성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럼 대표님이 사시는 거죠?"
"내가 술 가져갈게. 안주는 네가 사."
"네? 술이라니?"
"이 술! 무겁지만 내가 들고 가겠다고."
성환은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달짝지근한 양념갈비만 떠올리며 점심도 걸렀다.
배고픔을 참아가며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게만 가는지.
속이 터질 듯했는데, 잠시 후 성환이 핸드폰이 울렸다.
불길한 예감이 휘감아 돌았다.
점심도 참아가며 온통 머릿속으로는 양념갈비를 어떻게 구울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급박한 일이 치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어! 수호야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수호라면 우리 빌딩 건물주인 유수호 대표?
"……."
"지난번 그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는데?"
"……."
지난번 그 건이라니.
혹시 우리가 50억 대출, 50억 투자로 천하태평 자금 총 100억이 투입된 그 미니 신도시 아파트 개발사업을 말하는 건가?
덜컥 겁을 집어삼켰다.
"그래? 알았어. 그럼 만나서 얘기해보자고."
"……."
"잉? 오늘밖에 안 된다고?"
성환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깟 양념갈비보단 100억 투자 건이 우선이다.
괜찮다는 듯 성환이를 향해 끄덕거렸다.
"알았어. 나도 오늘 괜찮을 거 같아."
"……."
"그래. 이따 보자."
전화 끝나기 무섭게 다짜고짜 물었다.
"뭐야? 아파트 개발 건 사고라도 난 거야?"
일단 평온해 보이는 표정.
큰일은 아닌 듯하다.
"그거 말고요. 아파트 개발은 잘 되고 있다니깐 걱정하지 말라네요."
"그래? 그럼 다행이네."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순위 변경.
양념갈비가 더 중요하다.
"그럼 오늘 취소해라. 우리끼리 선약이 있잖아?"
"에이. 방금 괜찮다면서요?"
"난 또 우리 사업에 무슨 일 생긴 건지 알았으니깐 그렇지."
"취소 안 되거든요?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사업 얘긴데."
"그래? 그럼 같이 가지 뭐."
"네?"
"같이 가서 양념갈비나 먹자고."
"그러시던가요."
사업 얘기도 듣고 갈비도 뜯으면서 30년산도 홀짝거리고.
제법 좋은 그림이다.
***
오랜만에 만난 유수호대표.
만나자마자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건넸다.
잔디 색깔을 품은, 술 마신 다음 날 보고 싶은 친구.
"견디셥니다."
"그건 압니다만."
"은혜는 갚아야지요."
첫 만남 때 약국에 하나 남은 견디셔를 내가 차지했음에도 먼저 한 모금 마시라고 양보했던 걸 얘기한 거다.
역시 명석한 자.
지난번 협력투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찜찜하게 남아 있었는지.
빚진 감정을 털어버리려는 거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떨쳐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네. 감사합니다만 물건의 가치는 그때그때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르기 마련입니다만."
유수호대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네. 농담입니다. 내일 약국 들르시지 말라고 그냥 미리 챙겨드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잘 받을게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성환은 이상했는지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지 둘이? 음료 하나 가지고"
"그런 게 있다. 그리고 음료 하나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대표님?"
"네. 그렇죠. 생명수나 마찬가지죠."
"아 원효대사 해골 물 말하는 거구나?"
"뭐래?"
성환이 놈 꼭 핀트 하나씩 어긋난다.
어디서 들어보긴 한 거 같은데 적재적소에 써먹는 게 부족하달까.
양념갈비 몇 판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
불러놓고 통 말을 안 하는 게 답답했는지 성환이 물었다.
"뭔데? 부탁한다는 게?"
유수호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했다.
"너 김선생이라고 알아?"
"김선생?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인가?"
"아니. 옛날에 한참 명동 바닥 사채시장에서 군림하다가 은퇴하신 분인데 못 들어봤어? 80년대에 너희 아버지께서도 도움 많이 받으셨다고 하던데?"
성환은 뭔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손뼉을 쳤다.
"아 명동의 김선생?"
"맞아. 그분."
"전설적인 분이지. 회장님께 얘기 많이 들었어.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세뱃돈도 주고 그러셨거든."
"그것도 기억해?"
"기억하지."
"왜?"
"천 원 주셨거든."
"뭐라고? 세뱃돈으로 천 원을?"
"천 원 받아보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또렷이 기억해."
세상에!
수백, 수천억 원을 굴리던 Top-tier 사채업자가 세뱃돈으로 천 원을 건네다니.
충격이다.
"우리 아버지가 많이 존경하셨지."
조크루지 조회장이 충분히 존경할 법하다.
"그런데 김선생이 왜?"
"응. 그분이 명동 바닥 떠나서 강남에서 임대업 하시거든."
"들었던 거 같아. 남의 피눈물 더 이상 보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맞아. 그런데 그분이 알짜배기 토지 하나 내놨어. 이번에 그 땅 우리가 살까 하고."
"그래? 사면 되잖아?"
"그런데 그게 좀 어려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성환이 눈치를 살폈다.
성환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회장님한테 말씀드려달라는 거야? 너한테 팔게 도와달라고?"
"맞아. 천하제일에서도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있어서 말이지. 어떻게 안 될까?"
조회장을 설득해서 포기하게 해 달라는 거다.
성환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왜?"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야. 게다가 천하제일에서도 뛰어들었다며?"
"정말 안 될까?"
"네버."
성환이 말이 맞다.
조인철 회장 눈 밖에 나 있어서 말 한마디 못 꺼낼 게 뻔하지만, 설령 말한다고 해도 바뀔 건 없을 것이다.
이익을 스스로 포기한다라는 건 조회장의 사전엔 없다.
유수호대표가 이해한다는 듯.
"그러겠지? 알았어."
혹시 몰라 말을 꺼내 본 거지 사실 큰 기대는 안 했나 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뭔가가 생길 것 같은 분위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기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좀 그렇습니다만."
"네, 천대표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한번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