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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37화 (137/191)

137화 혼자만의 착각

월요일 아침.

요즘 들어 통 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어렸을 땐 이틀 밤새고 난 후 한 번도 안 깨고 스무 시간도 넘게 자본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아무리 많이 자도 여섯 시간을 넘기기 어렵다.

오늘도 역시 저절로 눈이 떠졌다.

특별히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시끄럽거나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아직 어스름이 걷히지 않는 새벽 시간에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다시 누워서 잠을 청해봐야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할 뿐 잠들지 못할 것이란 걸 뻔히 알고 있었다.

회귀한 후로는 부쩍 더 심해졌다.

이런 게 바로 불면증이란 말인가.

수면제 처방이라도 받아놔야 하나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마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철저하게 응징해야 할 상대가 있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도저히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 그냥 회사나 가자.

어차피 뜬눈으로 지새울 바엔 차라리 맑은 정신으로 회사에 가서 사업구상이나 해 보자 하는 마음에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6시도 안 된 이른 시각.

텅 비어있을 것 같았던 예상을 깨고 2호선 지하철 안에는 자리가 이미 상당히 들어차 있었다.

다행히 엉덩이를 붙일 자리 한 칸은 남아 있었지만.

새벽의 지하철 풍경.

새로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해보겠다는 각오나 다짐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새벽이 아니라 늦은 저녁 퇴근 시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를 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고된 노동에 지쳐 녹초가 되어버린 듯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지하철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버거운 삶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다고나 할까.

학교에서 배우던 것과 다르게 왜 부지런함은 가난이라는 말과 더 가까울까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교대, 강남, 역삼역을 통과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내렸다.

낮에 한창 일할 시간에는 테헤란로, 강남대로에서 볼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

다들 어느 빌딩 지하, 주차장 뒤편, 음식점 주방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일상을 도와주기 위해서 묵묵히 일해 주시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분들의 노고에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선릉역에 도착하자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 중에서도 많은 수가 내렸다.

지하철 출구 계단을 오르는데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낑낑대며 봇짐을 들고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고마운 건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작은 거부터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하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무거워요."

"에이. 무거우니깐 제가 도와드려야죠."

낚아채기라도 하듯 봇짐을 빼앗아 들었다.

그런데.

숨이 턱 막히는 게 정말이지 무겁다.

한 손으로 들자마자 몸이 한쪽으로 휘청거리는 게 하마터면 계단에서 구를 뻔했다.

짧은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고맙다고 할걸.

이 할아버지 왕년에 운동 꽤 하셨던 분이었나보다.

할아버지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멋쩍게 말을 건넸다.

"거봐. 내가 무겁다고 했잖나."

"아닙니다. 무겁다뇨. 거뜬합니다."

그러나 대답과는 다르게 양손으로 힘겹게 받쳐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갔다.

"할아버지 어디까지 가십니까?"

제발 바로 옆 건물이라고 해라.

속으로 되뇌었다.

내 생각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할아버지는 안심하라는 듯 편안하게 답했다.

"가까워. 쩌어기 주차장!"

그러나 역시 항상 예상은 빗나가게 마련이다.

가장 안 좋은 쪽으로.

가깝긴 개뿔.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은 두 블럭도 더 지난 곳에 있었다.

게다가 역삼역 쪽으로 난 오르막길.

차라리 역삼역에 내려서 내리막길로 오지 왜 선릉역에 내렸지 하고 원망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팽개쳐 버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무거운 짐을 들고 할아버지가 가리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든가? 내가 들어도 되는데……. 난 매일 들어서 괜찮은데."

너무 힘든 나머지.

네 그럼 그러세요. 하고 던져버릴 뻔했다.

그래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답했다.

똥 씹은 표정 같은 건 아예 드러내지도 못하게 꽁꽁 숨기고.

"아닙니다. 정말 가까운데요. 헉헉."

나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에 할아버지가 꽤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휴, 어쩌나. 미안해서."

말 시키지 말고 빨리 걷기나 하시지.

왜 그렇게 더디게 가시는지 발맞춰서 가느라 힘이 배로 드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도착한 주차장.

딱 봐도 수백 대도 넘게 주차할 수 있을 만큼 굉장히 크면서도 네모반듯한 땅이었다.

강남 한복판 그것도 이 비싼 테헤란로에 이런 땅이 남아 있었다니.

매번 지하철 타고 밑으로만 다녀서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대박의 기운이 넘쳐나는 땅이었다.

그러나 한 쪽에는 딱 봐도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녹슨 컨테이너 하나가 놓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컨테이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다 왔구만. 고생 많았어, 청년. 고맙구만."

청년이라니.

회귀한 이후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꽤 오래전에 들어봤음 직한 말.

노동의 피곤함이 가시는 듯했다.

그러나 누추한 컨테이너를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컨테이너를 바라보며 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고생한 게 있나요. 할아버지가 고생하시죠."

여기 땅 주인은 아주 큰 부자일 것이다.

돈이 너무 많아서 귀찮아서 개발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거나 아니면 주변 땅까지 깡그리 매입해서 크게 한 건 해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 거다.

그러나 땅 주인의 인성은 가진 부에 비해서는 한참 못 미치는 듯.

이렇게 고생하시는 할아버지의 근무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보였다.

무슨 얘기인지 안다는 식으로 손사래를 쳤다.

"고생은 뭘. 다 내가 원한 건데."

"네. 그럼 건강하십시오."

"그래요. 잘 들어가요. 젊은이 복 받을 거네."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선릉역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벌써 피곤에 찌들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마음 한쪽에선 뿌듯함, 따뜻함 같은 감정들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도착한 회사.

평소보다 꽤 길고 힘든 출근길이었다.

책상 위에 대충 짐만 던져놓고 바로 소파로 향했다.

잠시 후.

누군가 툭툭 쳤다.

그리고는 환청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모 목소리인 것만 같았다.

그래도 꿈이겠지.

신혼여행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원모일 리가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툭툭 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잠은 댁에 가셔서 좀 주무시죠."

툭툭 치는 손길에 제법 힘이 실려 있는 게 느껴졌다.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거대한 형태의 윤곽만 있는 모습에서 초점이 점점 맞춰지면서 분명해져 갔다.

역시 원모였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게. 대가리 안 치워?"

정말 잠들었었나 보다.

그러면 그렇지.

불면증은 개뿔.

그냥 요즘 덜 피곤해서 새벽에 잠이 깬 모양이다.

이른 시간에 몸과 두뇌가 모든 정비를 끝마치고 준비되었다고 사인을 보내준 것이랄까.

오히려 건강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님! 왜 아침부터 욕을 하고 그러십니까?"

"아침부터 못 볼 꼴을 봐서 그렇지. 너 같으면 딱 눈떴을 때 내 얼굴이 보이면 어떻겠어? 욕이 안 나올 거 같애?"

"그건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욕을 부르는 놈이다.

"이런 씨……. 아니다."

"네? 제가 뭐 잘못 말했나요?"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다. 이해한다. 나도 그런데 너라고 안 그러겠냐?"

"그렇죠."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회사엔 웬일이야?"

"얼마 안 되긴요. 벌써 일주일 됐는데요?"

"신혼여행 안 간 거야?"

돈 아낀다고 나한테 주례를 부탁하질 않나.

이놈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둘렀다.

"에이 설마요. 갔다 왔지 말입니다. 세부로 4박 5일이요."

"뭐라고 4박 5일? 신혼여행인데? 세계 일주 같은 건 못하더라도 유럽이나 미국 같은데 먼데도 갔다 올 수 있잖아. 그래도 일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왜긴요. 회사 때문이죠. 일주일 휴가로는 유럽 같은 덴 무립니다."

"뭔 소리야? 회사 때문이라니? 우리가 너한테 뭐라고 했냐? 특별히 할 일도 없으면서. 있다고 해도 전화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데 뭐 하러?"

"우리 회사 말고 와이프 회사 말입니다. 눈치 꽤나 보인다고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었나 보더라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음에 가죠, 뭐."

"다음이 오겠냐? 그때 가면 회사 분위기가 바뀔 거 같아?"

"네?"

"아이 생기면 더 못 갈 거잖아. 적당히 클 때까지는. 지금이 사실상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인데. 중년 되기 전까진."

내 말이 실감이라도 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까짓 눈치 좀 본다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구만."

"헐. 대표님 언젠 또 다음 결혼 어쩌고 하셨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결혼 한 번 실패했는데 다시 하겠냐?"

결혼에 대한 회의감 때문인지 아직까진 새 출발에 대한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래 지내다 보니 내 생각을 읽었는지 말을 이어갔다.

"세상 사람들이 다 대표님 같진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대표님도 슬슬 반려자분을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난 생각 없는데?"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정말 이혼할 때는 다시 결혼하면 성을 갈아버리겠다고 다짐했었다.

물론 좋은 사람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정말 연분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뭐 성이야 갈아버리면 그만이고.

일주일 만에 돌아온 원모를 보니 갑자기 옛 기억, 내가 결혼했을 때가 떠올랐다.

나도 신혼여행은 딸랑 4박 5일만 갔다.

딱 일주일 만에 회사에 돌아와서 업무 복귀했었다.

그땐 회사 일은 나 혼자 다 하는 거 같고 내가 빠지면 도무지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어찌나 부족했는지.

신혼여행 길게 다녀오겠다고 하면 뭔가 눈치 보이고 전력에서 제외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었다.

시간이 흐르고 임원이 되고 나니깐 깨닫게 되었다.

윗사람은 밑에 직원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 대체 불가능한 전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다시 설명해야 하고 해서 잠시 불편할 뿐, 대체재는 얼마든지 널려있다.

신혼여행 짧게 다녀와서 바로 업무 복귀한다고.

심지어는 회사 전화로 착신 걸어놓고 여행지에 스쿠버다이빙 하면서도 전화 받고 업무 처리해 봐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다는 거.

오히려 그렇게 해야지만 회사에 붙어있을 수 있는 처지라고 자신감 없이 자인하는 것뿐이 안 된다.

윗사람은 그런 거에 신경 일도 안 쓴다.

내가 신혼여행 떠났을 때의 사무실 풍경은 이랬을 거다.

김부장이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두리번거린다.

"야! 천태평 어딨어?"

옆자리 이대리가 대신 답한다.

"며칠 전에 결혼하고 신혼여행 갔잖습니까."

"아! 참 결혼했었지? 그럼 김대리 불러와 봐."

"네."

그리고 며칠 후 신혼여행 복귀한다.

사무실에서 김부장과 마주치자 김부장이 놀란 듯 묻는다.

"야. 천대리 신혼여행 안 갔어?"

"지난주에 다녀왔습니다."

"아! 그런가?"

이게 끝이다.

신혼여행을 길게 다녀오든 말든 그냥 그렇구나 한마디 할 뿐.

윗사람 누구 하나 '맞아! 저 녀석은 회사에 충성하는 놈이지' 하면서 마음속에 담아두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몇 년만 지나면 결혼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자기 혼자 자기 평판을 과대평가해서 회사에서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하는 거다.

자기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즉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회사 일에 충성하면 조직 내에서 더욱 존경받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거다.

존경은커녕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결국 본인만 불쌍한 건데.

자기 인생이 중요하고 전부라는 건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 중요한 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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