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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36화 (136/191)

136화 선택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주와 같은 룸을 예약해 놓고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만의 재방문이었지만 역시 고급식당은 다르다.

충분히 물릴 법도 했지만 어떤 메뉴 하나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대표님 여기 드시러 왔습니까?"

"그럼 식당에 드시러 오지 싸러 오겠냐?"

"에이 참. 더럽게."

"너도 빨리 먹어놔. 이따 재미있는 구경하려면."

"재밌을지는 가봐야 알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내 말대로 될 거니까 잘 봐."

"손 안 대고 코 푼다고요?"

"당근이지."

최동욱과 유라의 약속 시간보다 꽤 일찍 도착한 바람에 기다리는 동안 주문한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배를 두드리며 두 사람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또각또각 하이힐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라가 온 거다.

성환이 역시 무슨 소리라도 들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너도 들리냐?"

"네. 뭔가 딱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래도 유라 구두 소리 같은데요?"

발소리까지 구별하다니.

둘이 같이 지내 온 세월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고.

노크와 함께 옆방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라야! 일찍 왔네."

최동욱의 목소리다.

"오빠 왔어요?"

"미안. 어디 좀 들렀다 오느라고 늦었어. 오래 기다렸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방금 전에 그 J브랜드 매장에 들러서 선물을 챙겨온 모양이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온 지 삼십 분은 족히 넘은 거 같은데.

배려심 꽤 많은 친구인 듯.

내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성환이가 눈치챘는지 조용히 물었다.

"최동욱도 왔어요?"

검지를 입에 갖다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동욱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은 거다.

아직 음식 주문도 안 했는데 벌써 선물을 까려는지.

성환이 쪽을 바라보고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지금이야. 보내라고 해!"

성환이 바로 핸드폰을 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임스? 나야. 지금 바로 보내줘!"

전화를 끊자마자 몇 초도 안 되어서 옆 방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울렸다.

최동욱이 포장 박스를 꺼내려는 순간 유라가 잠시 제지했다.

"오빠 잠깐만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미국에 있는 친구한테 문자가 와서요."

문자 확인을 하려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문자에는 세탁소에서 아버지가 훼손시켰다고 한 바지의 브랜드명과 사이즈, 색깔과 함께 실물 사진까지 담겨 있을 거다.

한정판으로 한국에서는 사이즈별로 하나씩만 팔렸다는 내용과 함께.

"왜 무슨 일인데?"

다정하게 묻는 말에 유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니. 그냥 이상한 문자가 왔네. 잘못 보냈나 보죠. 뭐."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아직은 그게 뭘 말하는지를 몰라서였을 것이다.

최동욱이 하던 일을 마저 하려고 했다.

선물을 꺼내 유라한테 건넸다.

"100일 기념으로 조그만 선물 하나 준비했어."

유라는 순도 100%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머머. 오빠. 고마워요."

분명히 최동욱이 들어왔을 때 손에 들고 있는 걸 봤을 텐데.

역시 가수보단 연기자가 적성에 맞는 듯.

업종 변경 제대로 한 것 같다.

"맘에 들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

"당연히 마음에 들겠죠. 오빠가 얼마나 센스 있는지 다 아는데."

'부욱부욱'

과격하게 포장지를 뜯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듯.

이번엔 유라의 입에서 감탄사가 아닌 탄식이 새어 나왔다.

"흐억. 아니 이게 뭐야 오빠! 이거……."

"뭐야 이게!"

최동욱의 다급한 목소리.

선물박스 안에 들어있던 물건을 확인한 거다.

"뭐야! 내 옷이랑 바뀌었잖아?"

"오빠 옷이라고요?"

"그래. 이런. 매장 매니저가 실수했나 본데. 네 선물이 아니라 내 옷을 포장했나 보다. 미안해 유라야."

"이게 오빠 옷이라고요?"

뭔가 눈치챘는지 유라가 재차 물었다.

"그래. 미안. 잠깐만 기다려 봐. 내가 차에 가서 제대로 된 거 가져올게."

최동욱이 씩씩거리며 밖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라가 포장 속 옷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 같았다.

방금 전 미국 친구한테서 온 사진과 비교해 보는 거다.

보나 마나 같은 브랜드에 같은 사이즈, 같은 색깔의 옷이다.

당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으득!

잠시 후.

최동욱이 본래 선물을 들고는 룸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 유라야. 이게 네 선물이야."

아까와는 180도 다르게 유라는 감탄사는커녕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유라야? 선물 바뀌어서 기분 안 좋은 거야?"

"……."

"왜 그래? 실수잖아. 그것도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매장 직원 그런 건데."

"……."

유라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차갑게 물었다.

"오빠 이게 뭐예요?"

"응? 그냥 바지잖아."

"오빠 이 옷……. 우리 아빠 세탁소에서 소송 건 바지랑 똑같은 거 알아요?"

"뭐라고?"

"완전히 똑같은 바진데?"

그러나 최동욱은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연히 답했다.

"똑같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어째서? 이 브랜드 바지가 한두 개 팔렸겠어? 브랜드만 같은 거겠지."

"아니. 사이즈랑 색깔도 똑같거든요. 그리고 이 옷 한정판이라 전세계에서 몇 벌 팔리지도 않았다고 하고."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에요? 이 바지 소송 건 사람이 한국매장에 있던 거 선물 받았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한국에서는 사이즈별로 한 벌씩만 팔렸다고 하고."

이쯤 되자 최동욱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런 거 아니야. 유라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절대 그런 거 아니야."

그러나 잠시 후.

와장창!

뭔가를 테이블로 집어 던졌는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너무 소리가 커서 성환이도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앞으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유라야. 잠깐만……."

"연락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유라야. 내 얘기 좀……."

'삐거덕 쾅'

날아 차기라도 했는지 문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라가 박차고 나가버린 거다.

* * *

내가 노트북 화면의 주문내역에서 특이사항란을 가리켰다.

"이게 뭐요?"

"바로 이게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야."

"그냥 포장 해달라고 요청한 건데 이게 왜요?"

"그냥 포장이라니? 자세히 봐봐. 원피스는 핑크색 포장지로 선물포장해 달라고 써 있잖아. 그리고 바지는 그냥 일반 포장해달라고 써 있고."

"그래서요?"

"바꾸자."

"네? 바꾸자니?"

"이 남자 바지를 핑크색 포장지로 포장해달라고 바꿔쓰면 되잖아. 그럼 다음 주에 최동욱이 뭘 들고 가겠어?"

이제야 알아들었는지 성환이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아하!"

성환이 재빨리 자판을 두드리며 남자 바지와 여성 원피스의 포장 주문을 바꿔놓았다.

잠시 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매니저가 직원들과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각자 양손마다 한 벌씩 총 여섯 벌의 의상을 들고 있었다.

"대표님! 주문해주신 의상 가져왔습니다.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요. 매니저님이 알아서 잘 골라주셨겠죠."

성환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매니저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받아들었다.

'드르륵'

경쾌한 단말기 긁는 소리.

차 한 대 값이 그렇게 빠져나갔다.

* * *

유라가 나가자.

한참을 씩씩거리던 최동욱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씨X."

저게 본래의 성격일 것이다.

혼자 있을 때나 극도로 화나거나 예민할 때 본인의 원래 성격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남들과 함께 있을 때 배려심 있고 착한 모습 보이던 것은 결국 모두 위선이었다.

건환이도 이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성환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전전긍긍했다.

아까 분명 다른 방에서 누군가 문을 걷어찬 소리를 들었을 텐데 유라가 나간 건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됐다!"

"네? 계획대로요?"

"응. 아주 퍼펙트해."

"손 안 대고 코 푼 건가요?"

"코 푼 거뿐이겠어? 밑까지 닦은 기분인데."

성환은 기분이 좋았는지 더럽다고도 안 하고 주체할 수 없는 웃음만 터뜨렸다.

"아무리 우리가 포장 주문을 바꿔썼다고 해도 그 매니저가 뻔히 여자 옷을 핑크색 선물 포장해 달라고 한 지 알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왜겠어?"

"일부러 그랬다는 거예요?"

"일부러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알면서 못 본 척은 한 거지."

"아니 왜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내보였다.

"돈 때문이라고?"

"당근이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우선 매니저는 자기 손으로 바꿔쓴 게 아니잖아. 우리가 몰래 바꾼 거니까 본인은 몰랐다고 할 수 있잖아. 책임에서 자유로운 거지."

"에이. 그래도 최동욱이 득달같이 따지면 어떡할라고?"

"매니저는 나름대로 선택한 거야."

"선택이라뇨?"

"너랑 조윤경이 사들이는 금액을 생각해 봐. 게다가 조윤경 주변 무리들까지 합치면 그게 얼마일 거 같아?"

"물론 상당하겠죠."

"최동욱이 아무리 많이 벌어봐야 결국 월급쟁이인데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거 아냐. 매니저는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처음엔 나도 아무리 바꿔써 봐야 고쳐놓거나 최소한 최동욱한테 상품 건넬 때라도 확인차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긴 했었다.

그러나 옷값으로 빌딩을 올릴 수도 있을 거라던 성환이의 말.

그리고 성환이 입어보기는커녕 맞는지 대보지도 않고 옷 여섯 벌을 사버린 것.

성환이 카드 내밀고 자동차 한 대값을 지불할 때 매니저의 만족스런 표정을 봤을 때 당연히 성환이 쪽을 선택할거라고 확신했었다.

최동욱 역시 샵에 전화를 걸어 분풀이를 해댔다.

다시는 안 오겠다.

가만두지 않겠다.

망하게 하겠다 등등.

온갖 협박과 욕설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씩씩거렸다.

매니저야 물론 자기의 선택에 따른 예측 가능한 리스크였을 테니 충분히 감수했을 거다.

욕 정도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일 테니.

중요한 건 VVIP 고객을 절대 뺏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참을 씩씩거린 후 최동욱이 문이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는지 주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나와 버린 거다.

성환에게 눈짓했다.

성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문밖을 나서니 마침 나오던 최동욱과 마주쳤다.

"어이쿠 이런. 실장님 계셨습니까?"

성환이가 오랜만에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런 만남에 당황하긴 했지만, 최동욱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고 호응했다.

"어! 조성환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나 표정 관리에는 실패했다.

똥이라도 씹었는지 썩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무리 참을성이 있다곤 해도 심리적 타격이 상당했나 보다.

"왜긴요. 식사하러 왔죠. 여기가 제 단골인데요. 실장님께선 약속 있으셨나 봐요?"

성환이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네."

성환이 최동욱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어? 혹시 데이트? 여자친구 선물 준비하셨나 봐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성환이 조소를 띤 채 비아냥대듯 물었다.

"아니지. 혼자 계신 거 보니깐 바람이라도 맞으셨나 본데요?"

최동욱 참기가 어려웠는지 귀가 새빨개졌다.

"네……. 그럴 일이. 좀."

"제가 주제넘게 끼어들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좋은 시간 되십시오."

성환이 인사를 건네자 최동욱도 목례로 답하고 주차장 쪽으로 내려갔다.

최동욱이 자기 차에 오르자마자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씨X."

"가만 안 둬! XX들!"

저잣거리에서나 들어봄 직한 저렴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요?"

"성환아. 아무래도 네 짓인지 알았나 본데. 괜찮겠냐?"

"알든 말은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상관없잖아요.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죠. 이제 대놓고 적대적으로 가도 되니깐."

특허 건도 그렇고 연애사까지.

우리가 훼방 놓은 걸 알았을 테니 분명히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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