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34화 (134/191)

134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성환이는 뭔가 찜찜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세탁소에서 무슨 소송을 한다고? 건물주가 나가라고 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손님하고 분쟁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슨 문젠데?"

"세탁물이 잘못됐다고 한 거 같아요."

"무슨 세탁물? 분실된 거야? 아니면 훼손됐나?"

성환이 꼬치꼬치 캐물으니 건환이가 살짝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도 자세히는 좀……. 실장님의 그런 개인적인 일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그럼 최동욱 그자한테 더 가깝게 접근해서 자세히 알아봐봐."

건환이는 곤란했는지 대답 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성환이가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캐묻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건환이 입장도 알 것 같았다.

조용히 성환이 팔을 붙잡고 자제시켰다.

"건환이 입장도 생각해야지."

"아니 그래도……."

건환이가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서 내보였다.

"이게 유라씨 담당 매니저 번홉니다. 제가 엔터사에 있을 때 꽤나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서요. 제가 전화 미리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말하기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말해 봐. 뭔데?"

"이런 일로 제가 도움드리는 건 여기까지인 거 같습니다."

조그만 회사라도 직접 대표를 맡다 보니 뭔가가 달라졌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니.

꼭 맞는 말이다.

성환이 꽤 못마땅한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잠시 후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건환아.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예전처럼 무슨 일 생기면 꼭 알려주는 거지?"

아직 우리 편인 거 맞냐고 넌지시 물었다.

건환은 눈을 마주치고 답했다.

"네. 당연하죠. 대표님."

잠시 후.

사진 촬영이 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예식이 시작한 후 도착한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 원모에게 인사를 청했다.

참석했다고 얼굴도장 찍는 거다.

30분도 채 안 돼서 식이 모두 끝나고 식장을 빠져나왔다.

성환이가 시계를 보더니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제임스! 나야. 통화 가능?"

"……,"

"너 유라네 아버지 세탁소 알지? 거기 무슨 일 있었는지 좀 알아봐 줘."

유학 시절 친구한테 전화 건 거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아직 그 둘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 * *

며칠 뒤.

건환이 덕분에 담당 매니저를 통해 유라와 최동욱의 데이트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매니저가 개인 일상 그것도 아주 은밀한 데이트 장소까지 안다는 게 이상했지만.

음주운전이나 파파라치, 스토커 혹은 데이트 폭력 등 그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이렇게 행선지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데이트 장소를 들은 성환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전 천하제일에 있을 때 회식 핑계로 룸 두 개 잡고 유라랑 몰래 두 탕 뛰던 그 일식당이었기 때문이다.

김철수이사의 도움으로 결국 러브스토리로 아름답게 포장되긴 했지만 스캔들이 나서 꽤 곤욕을 치른 바로 그곳이었다.

예전 여자친구는 물론이고 자기 영역까지 침범당했다는 기분에 꽤 기분 상했나 보다.

"대표님. 두 명 예약해 놓을게요."

"예약이라니? 거기 갈라고? 미쳤냐 너 스토커야?"

"지금 쫓아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쫓아다니는 게 아니면 뭐지? 쫓기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최동욱 교활한 그자가 뭔가 개수작을 부렸을 거 아닙니까? 유라한테 그자의 본색을 알려줘야죠."

"아무리 그래도 남의 연애사를 엿들으라고?"

"연애사를 들으라는 게 아니라 소송 건만 들어주세요. 대표님이 Deal done이라고 하지 않았나?"

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게다가 오랜만에 맛나고 비싼 것도 먹을 수 있고.

남는 장사다.

"오케이 수행비서! 잊지 마라."

다시 며칠 뒤.

강남의 한 일식당.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미리 잘 준비해달라고 부탁도 안 하고 예약도 다른 이름으로 했다.

성환이는 혹시 누군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차까지 놔두고 택시로 이동했다.

먼저 자리하고 삼십 분쯤 기다리자 마침 근처 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빠. 일찍 왔네요."

"어. 차가 안 막혀서. 유라도 잘 지냈어? 시차 적응은 잘됐고?"

"네. 그럼요."

유라와 최동욱이 만났다.

귀를 쫑긋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자 성환이가 바로 눈치챘다.

"왔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뭐래요?"

"좀 닥쳐줄래? 설마 만나자마자 뽀뽀하고 그러겠냐? 그냥 인사하고 잘 지냈냐 뭐 그런 말 하는 거지."

성환이 표정이 밝아졌다.

"뭐 하는 짓이야? 어느 부분이 그렇게 좋아?"

"인사한다는 거……. 유라는 원래 만나자마자 안고 뽀뽀하는 거 좋아하는데. 유라가 그자 별로 안 좋아하나 보네."

"잠깐……. 아니다. 뽀뽀하기 시작하는 거 같은데? 그것도 너무 뜨거운데."

"뭐라고요?"

성환이 분기탱천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젠틀하면서도 너무 과격해. 유라가 막 그냥 너무 좋다는데?"

좀 과했는지 농담인 걸 눈치챘다.

"쳇.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알았어. 별거 없어. 그냥 밥 먹으면서 쓰잘데기없는 얘기 중이야. 우리도 밥이나 먹자."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룸으로 들어온 종업원.

빠른 곁눈질로 나와 성환이를 쓰윽 한 번 훑어봤다.

바로 결정한 듯.

메뉴판을 성환이에게 내밀었다.

대단한 내공이다.

나이만 보고 누가 살지 판단한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엿본 거다.

그리고 오늘의 호스트를 정확히 짚어냈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틀린 게 하나 있다.

비록 얻어먹는다고 해도 메뉴는 내가 결정한다는 사실.

메뉴판을 낚아채서 덮어버리고는 종업원에게 돌려줬다.

"제일 비싼 거요."

"그럼 술은요?"

역시 베테랑이다.

이 기회에 창고 구석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된 비싼 위스키를 처리할 요량인가보다.

하지만 차마 술도 제일 비싼 걸 시킬 수는 없었다.

회에는 역시 처음처럼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술은 제일 싼 거로 주세요. 처음처럼이요."

그러나 베테랑답게 실망하는 기색 전혀 없이 웃으며 주문을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파인다이닝에서의 식사.

만족스럽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성환이 계속 눈치를 줬다.

"소송 얘기만 듣는다고 했다."

"누가 뭐래요? 근데 듣긴 하는 겁니까? 집중해야지만 들린다면서요."

"집중하고 있잖아."

"내가 볼 땐 먹는 데만 집중하는 거 같은데요."

"입은 먹는 데 집중하고 귀는 건넛방에 집중하고 있으니깐 그만 좀 닥쳐줄래. 귀까지 먹는 데 집중해버릴라."

입을 삐죽거렸다.

"네. 대신……. 아니에요."

사실 먹는 데 정신 팔려 제대로 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관심도 없는 남의 연애사 따위는 한 귀로도 듣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성환이 성화에 못 이겨 대충 들어볼까 하는데.

최동욱은 역시 젠틀했다.

배려심 많고 잘 챙겨주는 스타일인 듯.

최동욱이 이것저것 신변잡기 얘기하면서 빙빙 돌리다가 지나가는 식으로 툭하고 내뱉었다.

"참. 유라야. 소송은 잘 해결됐다고 부모님께 소식 못 들었어?"

"네. 들었어요. 다 오빠 덕분이라고 하던데. 고마워요"

"내 덕분은 뭘. 이제 유라도 맘고생 내려놓고 일에만 신경 쓰세요."

"네네. 감사해요."

엎드려 절받기도 아니고 생색 한 번 내려는 티가 확 났다.

그러나 뭔가 큰 거라도 기대했지만, 뜻대로는 안 된 듯했다.

"우리 다음 주말이 만난 지 100일인데 여기 다시 오는 게 어때? 난 왠지 여기가 좋은데. 유라는 어때? 참! 혹시 여기 와 본 적 있어?"

알면서도 슬쩍 물어본 거다.

"네……. 오빠 저도 괜찮아요."

대답한 듯 안 한 듯 모호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예전 성환이와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식당을 떠나고도 행여나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한참을 나가지도 못하고 더 있었다.

그사이 들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다음 주말이 100일이라고요?"

"설마 또 오자는 건 아니겠지? 소송도 어차피 취하됐다고 하니깐 더 이상 얘기 나올 것도 없을 텐데."

"네. 할 수 없죠."

성환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잠시 후 성환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제임스? 그래. 나야."

며칠 전 유라 부모님 LA 세탁소 일 알아봐 달라고 했던 친구다.

"……,"

"뭐라고?"

뭔가 알아낸 건지 통화하는 내내 성환이 표정이 꽤 심각했다.

"무슨 브랜든데? ……아 J사 거?'

"사진도 찍어놓은 것도 있다고? 그거 좀 보내줘 봐."

"……,"

"어. 알았어. 땡큐 브로."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심각해?"

"유라 부모님이 세탁물 소송으로 꽤나 고생하셨다네요. 세탁소 일도 잘 못 보고 법정 들락날락하면서 많이 피폐해지셨다고."

"세탁물 소송이라고?"

"네. 바지 훼손됐다고 누가 소송 걸었나 봐요. 한인타운이라 교포사회가 한동안 떠들썩했데요. 교포끼리 돕지는 못할망정 해코지한다고 욕 꽤나 먹었답니다."

초창기에 LA로 건너간 한국계끼리 똘똘 뭉치면서 LA 폭동 등 굵직한 사건도 잘 이겨냈다는 걸 방송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억척스러워도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까짓 거 바지 한 벌 그냥 물어주면 땡 아닌가? 그딴 걸로 소송까지 한다고?"

"고객 만족 보장이라고 문에 붙여놓은 게 있다나 봐요. 그걸 지키지 않았다고 소비자보호법 위반했다고 손해배상 소송 제기했다는데요. 거긴 미국이잖아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송 비일비재해요."

"그래서 해결했대?"

"네. 몇 달 질질 끌다가 얼마 전에 소 취하했다고 하네요."

"그걸 최동욱이 도와줬나 보군."

"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답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소송 제기한 사람이 맡긴 바지가 그 사람 원래 사이즈랑 다르데요. 맡긴 옷이 훨씬 작았나 봐요. 게다가 평상시 비싼 옷 한번 안 맡겨본 사람이 갑자기 그 비싼 J사 브랜드 옷을 맡긴 것도 이상하다고 하고."

"뭐라고?"

"한국 방문했을 때 선물받은 거라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지. 입을 수도 없는 걸 드라이 맡긴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잖아."

"내 말이요."

지난번 정승균 대표의 특허 소송 건이 떠올랐다.

성환 역시 그 순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증거는 전혀 없지만, 최동욱 짓거리가 확실하다고 느낀 거다.

"너도 그 생각이냐?"

성환은 뭘 물어본 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짓이네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난번 조회장이 조윤경을 혼내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 최동욱 그자가 정말 재벌가 자제가 맞나 본데."

성환은 고개를 훽하고 돌리고는 무섭게 째려봤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냐'라고 답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됐고. 지금 유라한테 가서 말해야겠어요."

"뭐야? 쫄래쫄래 가서 고자질하겠다고?"

"그럼 어떻게 해요?"

"말한다고 믿겠냐? 증거가 있어야지 믿지. 그리고 증거를 네 손으로 들이밀지 말고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해야지."

"어떻게요?"

내가 뭔가 묘안이라도 떠올랐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쳐다봤다.

"음……. 이제 생각해 봐야지……. 네가."

"뭐야. 그게 다예요?"

빠르게 짱구를 굴렸다.

"너 혹시 J사 브랜드 옷 사본 적 있어?"

성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갑자기 셔츠 윗단추 두 개를 풀어서 목 뒤쪽을 까서는 상표를 보이게끔 들이밀었다.

"보입니까? 마이 페이버릿 브랜드거든요 아마 나랑 누나가 여기다 쏟아부은 돈이면 웬만한 건물도 샀을 겁니다."

옷값으로 건물을 살 수 있을 거라니.

다른 사람들 말이었으면 그냥 농담인 줄 알고 웃어넘겼겠지만, 왠지 이놈은 농담하는 거 같지 않았다.

"가자!"

"어딜요?"

"어디긴? J브랜드 매장이지. 소송 건 사람이 한국에서 선물받은 거였다며?"

"거기 가서 뭐 하게요? 물어보기라도 하게요?"

"가 봐야지. 현장에 답이 항상 있잖아. 그리고 아까 친구한테 사진도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성환이 핸드폰을 열고는 스크롤을 올렸다.

"네. 방금 보내줬네요. 품명, 사이즈, 색상 다 있어요."

"그래. 지금 가서 확인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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