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제삿날
따르릉, 따르릉.
알람이 울렸다.
어젯밤 짐을 푸르고 잠을 청했을 때는 분명히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일요일이란 얘긴데.
하지만 알람은 속절없이 계속해서 울렸다.
천하제일을 나온 이후로는 분명히 알람 스트레스가 사라졌는데.
울리든 말든 아무 때나 일어나서 아무 때나 내킬 때 출근하면 되니까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하다.
찝찝한 기분에 휴대폰을 찾았는데 하필이면 탁자 끝 팔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시차 적응 때문인지 도저히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한참을 씨름하는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
누가 아침부터 전화한 거였다.
어렵게 일어나 휴대폰을 들어보니 원모 번호가 화면에 떠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는 온갖 짜증을 담아 수화기에 대고 쏘아붙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일요일 아침부터. 미쳤냐?"
수화기 저쪽 너머에선 한숨 소리부터 나왔다.
"휴……. 내 이럴 줄 알았어. 대표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한 건 너지. 3일 동안 못 잔 잠, 겨우 자는 거 네가 방금 깨웠거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왜? 오늘이 네 제삿날 되고 싶냐? 끊어 이 자식아."
"제삿날은요. 오늘 제 결혼날이잖습니까!"
헉!
기껏 저놈 결혼식 참석하려고 그 소중한 LA 일정에서 하루도 더 못 빼고 와버렸는데 도로 아미타불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LA에서 며칠 더 있다가 올걸.
"원모야 미안! 시차 적응 안 돼서 나도 모르게. 정말 미안하다. 다음 결혼식 땐 꼭 갈게. 주례도 봐주고."
"아직. 시작 안 했거든요? 혹시 몰라서 전화해봤는데 역시나십니다. 대표님."
목소리엔 원망이라기보단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휴. 다행이네. 지금 바로 갈게."
"네. 빨리 오시지 말입니다. 곧 시작할 텐데요."
결혼식 당일 신랑한테 전화 받기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나를 이렇게나 원하고 있었다니.
이 자식도 분명 친구 한 명 없어서 자칫 결혼식장이 썰렁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나 보다.
"그래……. 그런데 원모야."
"네?"
"근데 그거 알아?"
"뭘요?"
"아까 내가 한 말. 오늘이 네 제삿날…… 맞아."
"뭐라고요?"
"곧 알게 될 거야."
결혼이 곧 인생의 무덤이라는 걸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 모른다.
그래도 명색이 수족 같은 녀석의 결혼식이니 오랜만에 장롱 깊숙이 처박혀있던 슈트를 꺼냈다.
다행히 곰팡이 같은 건 피지 않았다.
장롱 속 단 하나뿐인 명품.
한땀 한땀 이태리 장인의 숨결이 스며있는 검은색 슈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워낙 가볍고 밀착감이 있어 마치 셔츠를 입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회귀 전 임원일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름 패션에 신경 썼었는데 회귀한 후로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에 그냥 닥치는 대로 걸치고 다녔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 번 꾸며 입고 나가니 뭔가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는 것도 같고 걸음걸이도 당당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혼식장은 제법 분주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두 사람의 출발을 축하해주는 자리인데 정작 두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다.
여느 결혼식처럼 신랑 신부 부모님의 지인들이 손님들의 대부분인 것 같았다.
식장 문 앞에서 줄 서서 이름을 알기는커녕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신랑에게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도무지 이런 광경이 이해 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신랑 신부가 주인공은커녕 단지 들러리 행세만 하는 건 앞으로도 쭉 계속될 거다.
성환이는 처음 결혼식장 온 사람처럼 어찌할 줄 몰라 우물쭈물하던 차에 날 보자마자 반겼다.
"오셨어요? 웬일로 안 늦었네요."
"저놈이 아침부터 하두 전화질해서 말이지. 너도 전화 받았냐?"
"아……. 네."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축의금 봉투를 건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금액.
거금 30만 원을 넣었다.
회귀 전 임원 때도 이 정도의 금액을 넣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축의금 봉투를 건네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바로 봉투를 까고는 장부에 이름과 금액을 적는 것이었다.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지만.
내 나름대로 꽤 두둑한 봉투를 내밀었기에 참을 만했다.
장부에 천태평 30만 원이라고 적었다.
장부를 슬쩍 훔쳐봐도 나보나 많이 낸 사람이 없었다.
이 등은 역시 김철수 이사
20만 원.
상당히 무리한 거다.
성환이도 슬며시 봉투를 건넸다.
축의금을 받던 사람이 봉투를 열어보고는 입을 떡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단위가 달라서였는지 까무러치게 놀란 거다.
내 이름과 금액 바로 밑에 조성환 1,000만 원이라고 적었다.
10초도 안 돼서 이 등으로 내려앉았다.
그것도 1/30도 안 되는 현격한 차이로.
내가 건넨 30만 원.
물론 큰 금액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해 보였다.
"야 미쳤어? 부담되게 왜 이렇게 많이 내?"
"왜긴요? 당연히 부담되라고 그런 거죠."
부담 느끼라니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이게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 모르세요?"
"뭔 소리야?"
"회장님이 그러시는데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봉투를 줄 기회가 생기면 처음에 생각한 금액보다 0을 하나 더 붙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언젠간 그 사람이 반드시 열배 백배로 돌려준대요."
평상시에는 조크루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로만 버티는데.
그렇게 아끼고 아끼면서도 역시 쓸 때는 과감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나보다.
사람을 구슬릴 줄 안다고 할까.
그러니 천하제일을 이렇게까지 큰 재벌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을 거다.
원모가 우리 둘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오십니까?"
"시차 적응 땜에, 쏘리. 그리고 축하한다."
정말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다르니.
원모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도 있는 거다.
예식이 시작되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막상 식장 안에는 그 많던 하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김철수 이사도 역시 안 보였다.
축의금만 전달하고 식장을 떠나거나 바로 식당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성환 역시 이해가 안 가는 듯 한마디 했다.
"왜 이렇게 없지? 아까 엄청 많았는데? 김이사님도 안 계시네요?"
"다들 밥 먹으러 가겠지."
"네? 막 예식 시작했는데 밥을 먹는다고요?"
"당근이지. 어차피 예식은 다 형식일 뿐이야. 저기 서 있는 당사자들이나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해야 하나 보다 하니깐 하는 거지."
성환은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도 밥이나 먹자."
"식도 안 보고 식당으로 가자고요?"
"괜찮아. 나중에 사진만 찍으면 돼. 사진에 있음 온 거고, 없으면 안 온 거야. 어차피 신랑 신부는 정신없어서 기억도 못 해."
"그럴 거면 식장엔 왜 오는 거지?"
"글쎄다. 나도 모르겠다. 신랑 신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텐데. 그건 그렇고 너 식권 받은 거 있지?"
"식권이라뇨?"
"아까 축의금 낼 때 안 받았어?"
"네?"
축의금 받은 사람이 금액 보고 놀라서 식권 주는 것도 잊었나 보다.
아니면 천만 원이란 금액을 낸 사람이 식장에서 밥을 먹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환이 축의금 창구에 가서 식권을 달라고 하니 한 뭉텅이 통째로 쥐여주려 했다.
"됐습니다. 한 장이면 됩니다."
그러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장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건환이가 서 있었다.
바로 옆에 람지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
"저희도 같이 가시죠. 아침 걸러서 배고픈데."
람지도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네. 저희 다 같이 가요."
식당은 일 인당 하나의 메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뷔페식이었다.
우리 일행의 식권 4장을 건네받은 직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람지를 알아본 거다.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나 보다.
람지가 식당 문 쪽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람지야. 뭐 찾니?"
"네. 안내문 있는지요."
"무슨 안내문?"
"운동부나 먹방 출연자 출입 금지 뭐 이런 거 있는지요."
예전 운동부 출입 금지라고 써 붙였던 무한리필집을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연히 출입 금지란 팻말 같은 건 없었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안쪽 테이블에서 김철수 이사가 우리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시차 적응 때문에요."
"그래도 용케 일어났네."
"신랑이 하두 전화해서 말이죠."
"천대표한테도 왔어?"
김철수 이사한테도 전화했나 보다.
아는 사람은 싹 다 돌린 듯.
치밀한 녀석이다.
람지와 함께 자리하자 안내한 직원이 매니저를 향해 강렬한 눈빛을 건넸다.
데프콘 발동!
람지가 떴다는 걸 알리려는 것이다.
"람지야. 너 뜨니깐 다들 긴장하는데? 주방 난리나겠군."
람지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 오늘 저녁에 방송 있어서 점심 거의 못 먹어요. 그냥 맛만 보려고요."
람지는 정말 맛만 보려는지 접시에 조금씩만 음식을 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두 접시째를 비운 성환이와 나는 디저트를 먹으며 사진 찍는 시간만 기다리는데 람지는 계속 들락날락했다.
알고 보니 맛만 보되 모든 음식의 맛을 보겠단 거였다.
그러면 그렇지.
식사 도중 낯익은 사람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천하제일 지주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경리 여직원들 서너 명이 음식을 가지고 우리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어머 차장님! 오랜만이에요."
백대리가 반가운 마음에 손뼉 치며 인사를 건넸다.
"백대리님도 잘 지냈죠?"
"그럼요. 원모님이랑 같이 근무하신다면서요? 아 맞다 대표님이시죠 이제?"
"네. 제가 거두고 있습니다."
"회사 계실 때도 그렇게 붙어 다니시더니 그럴 줄 알았어요."
백대리 옆자리 출납직원도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지난번 안치홍상무 정보 뺄 때 이용해먹은 것 때문인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오랜만에 회사 얘기를 나누는데 백대리가 람지 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설마 알아본 건가?
계속 쳐다보며 긴가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에 계약직으로 일 년간 같이 근무하다 조윤경의 패악질로 쫓겨난 아람이란 걸 눈치챈 모양이다.
람지 역시 백대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간 불편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기를 알아봤다고 생각한 거다.
백대리가 람지를 향해 말을 꺼낼 듯 말 듯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저……. 저기……."
람지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라버리듯 답했다.
"아닙니다."
백대리 그래도 기분이 언짢지는 않은 듯 한마디 덧붙였다.
"에이. 맞는 거 같은데? 람지씨 아니세요?"
다행히 아람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람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반갑게 답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전 또 그 말인지 모르고. 네 저 맞아요."
"어머, 맞구나! 팬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일 년을 같이 근무하던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라니 K-의료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실 때 성환이가 턱짓으로 건환이를 가리키며 눈빛을 쏘아붙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리는 게 자기 입으로는 차마 못 물어보겠고 나한테 물어봐달라고 하는 거다.
수행비서까지 해준다니까.
그까짓 거 부탁 한번 들어준다.
"건환아!"
"네 대표님. 말씀하십시오."
"최동욱 실장 여자친구 생겼냐?"
건환이는 성환이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얘기해도 되는지 분위기 파악하려는 거다.
성환이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고 있어. 우리도 우연히 봤어."
"네. 맞아요. 그러면 그분인 거도 아시는 겁니까?"
나랑 성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뒤에서 개인사 묻는 게 좀 모양 빠졌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건환이가 말끝을 흐렸다.
얘기해도 되나 안되나 고민하고 있는 거다.
"괜찮아. 대놓고 같이 다니던데 뭘. 스캔들 날것도 아니고. 최실장이 셀럽은 아니잖아."
건환이가 곤란한 듯 눈치를 살피다 답했다.
"유라씨가 걸그룹 활동 그만두고 배우로 전향했을 때 엔터사에서 전폭적으로 밀어줬거든요. 사실 배우로선 막 출발점에 섰는데 주연급으로 바로 올라탔죠."
"배우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그것도 그런데 유라씨 부모님께도 도움 주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무슨 도움인데?"
"LA에서 세탁소 하시는데 소송이 걸렸나 보더라구요. 그 일로 실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도움 주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이번에도 출장 겸해서 소송일 봐 주고 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환이 말대로 아름다운 그림은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