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도와주세요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자 알아볼 수 있었다.
최동욱이 맞았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성환이도 자리에 일어나서 맞았다.
"오, 조성환님 아니십니까? 긴가민가했는데 맞네요. 안녕하십니까? 어디 다녀오시나 봅니다."
표정이나 말투를 볼 때 진심으로 반기는 느낌이다.
성환이 역시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실장님. LA 쪽에 일이 있어서 출장 다녀오는 길입니다."
최동욱은 자연스럽게 내 쪽을 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천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그러게요. 반갑습니다."
얼떨결에 답하긴 했지만, 살짝 이상했다.
회귀한 후로는 우연히 인사 나눈 적은 있었지만, 통성명까진 안 한 것 같은데.
몇 번 마주치다 보니 오해했나?
아니면 어차피 피차 잘 아는 사이 아니냐고 넌지시 얘기한 것일 수도 있다.
최동욱이 성환이에게 말했다.
"조성환님. 이번 출장길 잘 해결되셨나 봅니다."
그냥 덕담 삼아 건네는 말인지 아니면 벌써 어디서 듣고는 특허건 해결한 걸 얘기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의미심장한 웃음에 기분이 묘했다.
성환이도 역시 같이 생각이었는지, 제법 강한 어조로 답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방해하는 놈들이 있었는데 잘 해결했습니다. 실장님께선 무슨 일로 가셨는지요?"
최동욱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미국회사랑 인수 협상 건도 있고 개인적인 일정도 볼 겸해서 왔습니다."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 더 이상 대화 없이 몇 초가 흘렀다.
서로 존재를 알면서도 알은체를 할 수 없는 형제 사이의 침묵.
무슨 말을 더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되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실장님."
최동욱이 인사를 건네고 커튼 밖 퍼스트클래스 쪽으로 사라졌다.
성환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아버지 운전대나 잡던 사람이 이제는 그룹 내에서 제일 잘나가게 돼서 일등석에 앉아있고, 그룹 내 직함 하나 없는 자기는 커튼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했나 보다.
격세지감이 느껴졌을 거다.
괜히 쉬고 있는 승무원을 찾았다.
"위스키 좀 주세요."
"온더락으로 드릴까요?"
"스트레이트로 부탁드립니다. 가득이요."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 위스키를 그것도 알잔으로 시키는 걸 보니 심리적으로 꽤 큰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더니 제법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돌아봤다.
"대표님. 능력 한번 발휘해주시죠."
"뭔 개소리야?"
"최동욱 실장이요. 누구랑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봐 주시면 안 돼요?"
"뭐야? 이젠 막 시켜 먹냐? 내가 네 비서야?"
정색하자 성환이 잔뜩 누그러뜨린 채 쳐다봤다.
"아니 그건 아니구요. 서로 주고받으면 좋잖아요."
"넌 뭘 줄 건데? 계열사 하나라도 떼주게? 지주사면 몰라도 그딴 건 관심 없다."
"에이. 그런 거 말고요."
"그럼 뭐?"
"제가 일 있을 때마다 기사해드리잖아요."
뭐 귀 몇 번 쫑긋 기울여주는 걸로 기사를 두다니.
분명 남는 장사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Deal done."
커튼 안쪽 퍼스트클래스 쪽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객들이 조용하다기보다는 애초에 몇 명 타질 않아서였을 것이다.
아무리 미국행이라고 해도 천만 원도 넘는 일등석 자리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환이 재촉했다.
"뭐에요? 안 들려요?"
"어. 별소리 안 들려. 사람도 몇 명 안 탄 거 같은데? 최동욱 혼자 온 거 아닐까?"
그런데 잠시 후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아까 잠깐 잠들었을 때 자리에 없던데.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어. 저기 뒤 칸에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오느라고."
최동욱의 목소리다.
여자 목소리는 어딘가 들어본 것 같긴 했지만, 한 번에 잘 떠오르진 않았다.
"만나다니 누굴?"
"있어. 예전에 우리 회사 다니던 사람."
"에이. 회사 직원이 어떻게 비즈니스를 타."
"그냥 직원 아니야. 우리 회장 아들이야."
"뭐라고? 천하제일 그룹 회장 아들이라고?"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왜 그래? 유라야. 설마 아직 못 잊어서 그런 거야?"
"아니야. 다 잊었어. 나쁜 짓만 하고 다니고."
유라라.
성환이 예전 여자친구 걸그룹 센터 그 유라다.
미국으로 이민 간 세탁소집 딸.
어렸을 때 유학 시절부터의 인연으로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사귀게 됐었다.
스캔들 터졌을 때 김철수 이사의 작업 덕분으로 언론에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잘 포장까지 됐었지만 결국 뽕쟁이 누명 쓰고 옥살이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최동욱 옆자리에 앉아있다!
비록 잊었다고는 말했지만, 유라 목소리에서의 떨림은 여전했다.
아니 더 심하게 요동쳤다.
"가서 인사라도 하고 오지 그래."
"됐어. 오빠. 인사 안 해도 돼."
최동욱의 말 자체는 쿨해 보였지만, 사실 말투를 들어봤을 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 애틋한 연인 사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걸 알았는지 성환이 다시 재촉했다.
"들리죠? 뭐래요?"
사실대로 대답하기는 살짝 곤란하다.
성환이도 이제 겨우겨우 잊었을 텐데.
더군다나 지금은 자기 이복형의 여자친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아니야. 혼자인 거 같아. 아무 소리도 안 나."
성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 쳤다.
"에이! 출장이라고 하니깐 당연히 일행들이랑 같이 왔겠죠. 누구랑 친한지 누가 누가 최동욱 라인으로 탔는지 알아봐야죠."
적의 수하들을 미리 알아놓는다는 건 좋은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정말 수하들을 동반했다면 그들은 일등석이 아닌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을 거다.
"에이 설마 회사 직원이 일등석을 같이 탈라고? 일등석은 임원도 못 타."
"그럼 최동욱은?"
"최동욱이 그냥 임원은 아니잖아."
차마 '그냥 임원이 아닌 그룹 넘버투에 회장의 숨겨놓은 아들이잖아. 게다가 너의 옛 여친인 슈퍼스타랑 같이 탔으니까'라고 답할 순 없었다.
"그냥 내가 보고 올까?"
"에이. 아서라 냅 두고 잠이나 자라."
잠시 후.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는지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다.
눈을 떠보니 성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이 깜짝이야. 뭐야. 대가리 안 치워?"
성환은 원망스러운 듯 눈을 흘기며 노려봤다.
"알았죠?"
"뭔 소리야?"
"최동욱이 누구랑 같이 있는지."
이놈!
정말 일등석 쪽으로 가서 확인하고 왔나 보다.
"어."
"왜 얘기 안 했어요?"
"그냥. 좋을 거 없잖아. 이제 너랑 상관도 없고."
* * *
천태평대표 뭔가 조금 이상하다.
뭐라도 들은 게 확실한 거 같은데 못 들었다니.
그냥 귀찮아서 안 들린다고 한 거 같진 않고 뭔가가 있으니깐 이렇게 한참이나 집중했을 텐데.
실컷 들어놓고 아무 소리도 안 난다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그냥 커튼 열고 들어가 버릴까 보다.
아니 그냥 냅 두자.
천대표 말대로 아무리 임원이라고 해도 정말 일등석을 탈 리는 없겠지.
회장님 성격상 아무나 일등석 타라는 규정을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
옆자리 천대표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래 나도 신경 끄자.
화장실이나 갈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을 구분하는 커튼 가림막이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났다.
꽃향기 가득 머금은 평범한 향수가 아니다.
은은한 봄에 핀 꽃 냄새가 아닌 푸르른 여름 새벽 편백 나무 숲속에서나 맡을 수 있는 청량한 나무 냄새가 올라왔다.
잠시 후.
커튼이 살짝 열리면서 누군가의 얼굴이 나왔다.
이 향기의 주인.
역시 유라였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선글라스로 눈매까지 감췄지만. 향기까지는 감출 순 없었다.
"죄송합니다."
부딪힐 뻔했다고 사과하고는 바로 돌아 들어갔다.
이어서 승무원이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찾으세요? 앞쪽에도 있습니다."
나를 못 봤나?
못 봤을 리가 없다.
분명 한눈에 알아봤을 텐데 못 본 척한 거다.
나를 아직 망나니 뽕쟁이로 알고 있어서 그런 건가?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나?
그러나 선글라스 때문에 눈빛을 보진 못했지만 급하게 얼굴을 떨구는 그 찰나는 놓치지 않았다.
분명히 봤다.
더군다나 지금 비행기에 오른 지 몇 시간인데 화장실을 못 찾아서 비즈니스석까지 왔을 리 없을 테니 분명 내가 탄 걸 알고는 살짝 보려고 온 거다.
내가 찾아가 볼까?
인사만이라도 청해볼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굳이 피할 필요는 없잖나.
게다가 내가 찬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차인 건데.
불은 꺼져 있고 대부분 자는 시간 커튼 넘는다고 제지할 승무원도 안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커튼 넘어 익숙한 향기를 쫓아갔다.
보인다. 뒤통수…….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
역시 잠 안 자고 그냥 앉아있다.
조용히 다가가 헛기침을 해보려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누워서 잠자고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설마 했는데…….
최동욱이다.
둘이 한 비행기에 타고 LA를 다녀온 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라의 옆자리는 바로 내 자리였는데.
이제는 저자가 차지했다.
차마 유라를 부를 순 없었다.
최동욱을 보자마자 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커튼 넘어 내 자리로 넘어오며 살짝 뒤돌아봤지만, 더 이상 유라의 뒤통수를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지 눈이 마주쳤음을 느꼈다.
최동욱 이놈!!
아무리 헤어졌다곤 해도 어떻게 나의 유라를 만날 수가 있지?
저놈은 분명히 나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거다.
천하제일은 물론이고 나의 모든 것, 가족이나 심지어 내 여자까지.
자리로 돌아오니 옆자리 천대표가 잠에서 깨려 하고 있었다.
노려보니 화들짝 놀라며 가위라도 눌린 양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고 있었죠?"
* * *
비행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안전하게 착륙했다.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지고 승객들이 서둘러 짐을 챙기고 나가는데도 성환이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안 나가냐?"
"조금만 있다 가죠."
"왜 부딪힐까 봐? 죄졌냐? 뭐가 뻘쭘하다고."
"아니. 그냥요. 최동욱 저자한테 태연하게 인사말 건넬 기분은 아닙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다.
꽤 상심이 큰 듯.
세상의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했었을 텐데 갑자기 굴러온 돌이 들어와서 자기 걸 하나씩 빼앗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 조금 있다가 가자."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나와 입국 심사대를 향했다.
"대표님 뭐 하나 해주시죠."
"또 뭐?"
"내가 기사도 하고 딴 것도 할게요."
"뭐 비서 같은 거라도 할라고?"
"하죠. 뭐."
기사 겸 수행비서라니.
그것도 재벌 2세를.
남는 장사다.
"우선 들어나 보고. 뭘 해달라는 건데?"
"유라를 최동욱한테서 떼어놔 주세요."
"연애 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굳이 왜? 게다가 최동욱 능력 있겠다, 돈도 잘 벌겠다, 그 정도 좋은 사람한테 가면 유라씨한테도 좋은 거 아냐?"
"좋은 사람이 아니니깐 그러죠."
"뭐가?"
"나 때문일 거예요. 내 모든 걸 빼앗을라고 그런 거지 결국 나중에 매몰차게 버릴 거에요. 유라는 충분히 괜찮은 친구예요. 그런 놈한테 이용당하면 안 돼요."
"최동욱이 그런 사람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깐 대표님이 그걸 알아봐달라는 거죠. 이용만 하려는 건지 정말 좋아해서 접근한 건지요. 이용하려고 하는 거면 유라한테 알려줘야죠."
"방법은?"
"최동욱의 심복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
"심복?"
"건환이 있잖아요."
"에이. 그러다 최동욱하고 어긋나기라도 하면 나중에 정작 중요한 일 터졌을 때 도움 못 받을 수 있어. 지금 잘나가는 건환이 본인한테도 피해가 갈 수 있고."
"정작 중요한 일이라뇨? 돈, 회사 그런 게 중요하다고?"
"그럼 아니야?"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그거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요."
"그게 뭔데?"
성환이 조용히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여기요. 예전에 대표님이 해준 말 아닌가? 유라랑 스캔들 터졌을 때 머리 말고 여기가 하는 말을 따르라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탁탁 쳐가며 답했다.
철이라도 들었는지 뭔가가 달라졌다.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