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Deal done
그런데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말.
지금 상황에선 충분히 진정성이 엿보이긴 하나 세상에 확실한 건 없다.
벌어지기 전까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성환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아! 또 왜요?"
분위기 초 치지 말라는 거다.
"화장실에서 휴지가 없어서 그냥 나온 느낌 안 들어?"
두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정색하며
"난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대표님은 경험 있나 봐요?"
"꼭 경험해야 아냐? 밑 안 닦은 느낌이라고들 하잖아."
정승균 쪽을 돌아봤다.
"정대표님은 어떠십니까?"
그 역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습니다. 영 찝찝한데요."
"그렇죠. 이분이 언제까지 이 회사에 다닐지도 모르고 원래 시킨 놈들이 언제든지 다시 작업할 수도 있죠. 후환을 남겨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럼 확약서를 받을까요?"
"그거 가지고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신지?"
"그 특허를 사셔야죠."
"네?"
"문제가 된 그 특허를 아예 사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솔루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손뼉을 치고는 이샨대표에게 물었다.
"저희가 매입하고 싶습니다."
정대표 말을 듣자 이제껏 온화한 미소를 짓던 이샨대표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적정한 금액을 지불하실 수 있습니까?"
조금 전까지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비즈니스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었다.
정승균도 웃음기를 거두고는 물었다.
"금액 제안을 해주십시오."
이샨대표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마치 준비하고 있기라도 한 듯 바로 답했다.
"250만 불입니다."
"네?"
정승균은 못 들을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까무러치게 놀랐다.
"저희가 보장받은 금액이 있어서 그 이하로는 힘듭니다. 금액이 부담스러우시면 특허 이전 없이 로열티를 지급하셔도 됩니다."
은인은 은인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
아까 소송 취하하겠다는 말도 사실은 그냥 쓰게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적정한 가격으로 로열티를 받겠다는 말이었을 거다.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네고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저희 주주들을 설득해야 해서요."
이샨대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쳐다봤다.
250만 불.
물론 30억에 육박하는 거금이라 지금 회사 형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정승균 대표 뒤에는 평창동의 현인 정영태교수가 있다.
부자 아빠를 두고 무슨 걱정인가.
사전증여 조금 받으면 그만인데.
어차피 물려받을 거 조금 일찍 당겨 받는 거에 불과할 뿐이다.
"아버님께 말씀드려보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정승균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의사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했을 때 내걸었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혼자 힘으로 하겠다고요. 절대 집안에 손 벌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한 번 숙이시죠. 자존심 한 번 구기고 맘 편히 사업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안 됩니다. 이제껏 제 인생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도움받고 시키는 대로만 해왔었는데 지금 처음으로 제 뜻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정대표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이샨대표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로 속닥속닥하니 기분이 언짢아졌나 보다.
어제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벌써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저 머쓱한 웃음으로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성환이 묘안이라도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해결이라니? 네 돈이라도 꿔주게?"
성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말고 천하태평이요. 우리가 그 특허 사자고요. 어차피 회사에 지금 여유자금도 있잖아요."
주식, 부동산도 모자라 이제는 특허까지 투자하자니.
물론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문제는 수익률과 회전율이다.
과연 로열티를 받으면서 적정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느냐?
아니면 재빨리 뽑아먹고 손 털고 나올 수 있느냐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정교수와의 관계를 고려하긴 해야 하나 그러자고 도처에 널린 투자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
정승균 면전에서 대놓고 얘기할 수도 없어 넌지시 거부 의사를 건넸다.
"우리가 특허를 사서 로열티를 받자고? 그러면 이 특허법인하고 다를 게 뭐가 있지?"
"로열티 받자는 게 아니고 특허권으로 투자하자고요."
"투자라니?"
"출자요."
이놈이 현물출자를 말한 거다.
매입한 특허권을 출자하여 주식을 받자는 건데.
이는 곧 정승균의 회사에 투자하자는 말과 같은 말이다.
정승균 회사의 비전이 좋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회사의 성장추세나 정대표의 마인드를 볼 때 물론 비전은 있었다.
바로 정승균대표에게 제안했다.
"지금 저희에게 여유자금이 있으니 특허를 사들여서 대표님 회사에 이 특허권으로 출자하겠습니다."
"네? 30억을요?"
"네. 저희가 3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우리가 정대표의 회사에 현금 30억 원을 출자하여 그 돈으로 특허를 사들이거나 우리가 특허권을 30억에 매입하여 현물로 출자하거나 사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자는 출자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에, 지분가치평가와 지분양수도계약 등 시간이 오래 지체될 수 있다.
지금은 재빨리 특허를 사들이는 게 시급한 일이니, 현금출자보다는 현물출자가 더 현명한 방법이다.
정승균대표도 결심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손을 내밀었다.
"Deal done."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샨대표와 바로 특허권 매입계약을 체결했다.
현황 파악 정도 해오자던 당초의 목표와는 달리 현황 파악뿐만이 아니라 문제해결까지 했고 천하태평 입장에서는 새로운 투자까지 하게 되었다.
역시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이 맞다.
시차 적응도 못 하고 잠 한숨 제대로 못 잤는데.
굉장히 긴 하루를 보냈다.
그마저도 당장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
아쉬운 마음에 성환이를 꼬드겼다.
"성환아. 우리 한 이틀만 더 있다가 들어가지 않을래? 너도 오랜만에 LA왔으니깐 만날 사람 많을 거 아냐."
정승균도 아쉬운 듯 붙잡았다.
"그러시죠. 저도 다른 일정 있어서 모레 들어갈 건데 그때 같이 들어가시죠."
하지만 성환이는 요지부동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원모님 결혼식엔 꼭 가야죠."
원모 자식 꼭 날을 잡아도 하필이면 이런 때에 잡아서는 훼방만 놓는다.
그놈 결혼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빡빡한 일정으로 잡은 거였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자식.
"꼭 가야 하나? 밥만 축낼 텐데."
"매일 얼굴 보는데 결혼식을 안 가겠다고요? 이까짓 미국 일정 하루 때문에?"
이까짓이라니.
괌, 사이판 같은 미국령 섬 빼고 내 인생의 첫 미국 방문인데.
"아까워서 그렇지. 힘들게 왔는데. 맛있는 거 한 번 제대로 안 먹어봤잖아."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요."
이놈 자식은 미국을 어디 부산쯤 출장 가는 걸로 아나.
하긴 뭐.
매번 일등석만 타고 다닌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지 말고 나 잠깐 말라리아 걸렸다고 하고 며칠 있다 가면 안 될까? 병원 가서 누워있는 사진 하나만 찍어놓으면 되잖아."
성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쳇! 양아칩니까?"
"양아치라니. 누굴 보고. 그래 간다 가. 결혼식."
"네. 대신 제가 저녁 맛있는 거 살게요."
"뭔데?"
"인앤아……."
"잠깐! 너 설마 핫도그나 샌드위치, 햄버거 뭐 이딴 거 사겠다는 건 아니겠지?"
성환은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했다.
"크흠! 그래도 캘리포니아 왔으니깐 인앤아웃은 한번 먹고 가야지 않을까요?"
"스테이크 파는 집이야?"
"아니요. 햄버거집인데 엄청 맛있는 데다 미국 서부에만 있어서 먹기 어려워요. 아는 사람 중에는 이거 하나 먹겠다고 비행기 탄 사람도 있어요."
햄버거 쪼가리 하나 먹겠다고 왕복 스무 시간도 넘게 비행기를 타다니.
아무리 일등석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이해 불가다.
"싫어. 어디서 감히 햄버거 따위를 입에 담아?"
성환은 체념한 듯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성환이 데려가 준 레스토랑.
미슐랭 스타까지 받아 LA에서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메뉴도 펼쳐보지 않고 포터하우스 스테이크를 시켰다.
역시 천조국.
붙어있는 안심 양이 상당해서 제법 묵직해보이는 게 일 인분에 1kg은 족히 넘어 보였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는다.
한편, 성환이는 가벼운 샐러드 하나만 시켜서 깨작깨작하고 있었다.
"야. 설마 돈 아낄라고 싸구려 풀때기만 먹냐?"
"돈 아끼다니 이게 그 고기보다 비싸거든요? 그리고 이건 애피타이저고 저녁은 따로 먹을 거거든요."
"뭐라고? 정말?"
"네. 저녁은 인앤아웃으로."
"아니 그거 말고. 풀때기가 고기보다 비싸다고?"
"당근이죠.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걸 비싸서 못 먹기 때문에 비만이 많은 거예요."
하긴 야채를 먹어봐야 햄버거 속 마요네즈에 파묻혀 맛도 모양도 알 수 없는 풀때기 쪼금이 전부일 테니 일리가 있다.
무한 리필도 아니고.
고깃덩어리를 더 이상 욱여넣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이어서 2차로 방문한 햄버거집.
배가 불러 성환이 먹는 것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입 벌린 패티 사이로 양파, 양상추, 토마토가 도드라져 보이는 게 보기만 해도 신선함이 느껴졌다.
가난하다는 느낌 일도 없었다.
성환이 한 입 베어 물자 아삭아삭, 바삭바삭 채소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1차에서 성환이 메인 없이 애피타이저만 먹었는지 이해가 갔다.
"야! 진작에 얘기해주지."
"얘기했잖아요. 맛있다고.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시켜서 한 입 드시죠."
궁금한 마음에 맛만 보려고 버거 하나를 시켰다.
한 입 베어 물자 짝 달라붙는 느낌.
비행기 탈 정도는 아니지만 한두 시간은 운전해서 올 법도 했다.
역시 햄버거의 나라.
다음 날.
2박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두 번째 비즈니스석이라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채널을 돌려보고 잡지도 넘겨봤지만, 시간은 더디게만 갔다.
성환이 역시 무료함을 못 견디겠는지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이제 화장실에서 밑 닦고 나온 거 같아요?"
정승균 회사에 투자한 건을 말한 거다.
"물론 개운하지. 그런데 넌 웬일로 먼저 투자하겠다고 말을 꺼냈냐?"
내가 먼저 말을 꺼내도 반대하거나 초 치려 들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보다 먼저 나서서 투자하겠다고 나선 게 이해가 안 갔다.
"정대표 말이 그렇잖아요."
"무슨 말?"
"집에다 손 안 벌리고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겠다고 한 말이요."
금수저 입장이 돼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성환이는 자기의 처지에 빗대어 응원도 했을 거고 그렇지 못한 자기에게 스스로 채찍질도 했을 것이다.
"대표님은 왜 반대 안 했어요? 그 회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아니었나? 뭐 만드는 곳인지, 어떤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이런 거."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장 보러 마트에 갔는데 원래 살 생각도 없었던 비싼 와인 한 병을 들고나온 느낌이랄까.
집에 와서 영수증 들춰보고 후회하는 각이다.
"글쎄, 뭐랄까. 직감이라고 할까? 정승균대표가 크게 성공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느낌."
대답해놓고도 살짝 민망했다.
성환 역시 알아차렸는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는 넌 왜 먼저 투자하자고 했냐? 그것도 30억씩이나.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30억씩이라뇨. 겨우 30억인데."
"겨우?"
"네. 겨우 30억으로 5%의 우호지분을 얻는 거잖아요. 5%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 30억이면 싸도 너무 싼 거 아닌가?"
이 자식.
말 그대로 겨우 30억으로 정영태교수 지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거다.
비즈니스맨 다됐다.
누가 잘했냐 소리높여 티격태격하는 사이.
퍼스트클래스 쪽 커튼이 살짝 열리고는 누군가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다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성환이 한눈에 알아챘다.
"최동욱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