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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30화 (130/191)

130화 선한 행동

이런 미친놈!

지가 미국대장이야? 히어로 나셨네, 나셨어.

욕이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걸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목숨을 걸겠다니.

미국에서는 남의 일에 절대 신경 쓰지 말라던데.

별거 아닌 일에도 총알이 날아다니고 하니 인적 드문 곳은 아예 갈 생각도 말라고 숱하게 들었었다.

영화나 드라마로만 접한 나도 이런데 정승균 이자는 여기서 유학까지 했다면서 저럴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못 들은 척 쌩까고 그저 핫도그만 씹고 있었다.

그러나 성환이 동조하듯 나섰다.

"가보시죠. 누가 당하고 있나 본데요?"

"네. 인디언 한 명이 괴롭힘 당하는 거 같습니다."

성환이 내 쪽을 바라보고 눈짓했다.

난 그저 조용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화장실이 어딘지 아냐?"

성환은 혀를 차며 빈정댔다.

"대표님. 불의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겠다는 거예요?"

"저게 불의인지 어떻게 알아? 뭔가 자기들끼리 사정이 있겠지. 저러다 말겠지 뭐."

말해놓고도 민망했다.

정승균이 대신 답했다.

"저건 분명한 불의입니다. 인종차별이에요. 저라도 가서 돕겠습니다."

꽁무니를 빼자니 쪽팔리고 같이 나서자니 무섭고, 진퇴양난이다.

정승균이 길을 건너자 성환이도 따라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저도 같이 가죠."

따라가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여의치 않으면 바로 튀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백인들이 인디언을 괴롭히다니.

이 대륙에서는 몇백 년에 걸친 정복 전쟁이 아직도 안 끝났다는 말인가.

가까이 다가가자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가운데 괴롭힘당하는 사람은 화려한 깃털 장식이 가득한 모자와 망토를 걸친 인디언이 아니라 그냥 동양계 남자였다.

성환이 팔을 콕 찌르며 물었다.

"뭐야? 인디언이라며? 아니잖아."

"인디언 맞는데?"

"딱 봐도 저게 무슨 원주민이야. 영화에서 보던 거랑 완전 다르구만."

성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아하! 아메리칸인디언 생각한 거예요? 그거 말고 진짜 인디언. 인도계라구요."

인디언이 인도계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하긴 아메리칸 인디언이 예전에 탐험가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인도로 착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른데 유래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정승균을 붙잡고자 한마디 했다.

"위험한 거 같은데 경찰한테 신고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런 덴 경찰 잘 안 옵니다. 보아하니 무기도 없는 거 같은데 도와줘야지 않겠습니까?"

실패다.

정승균이 백인 학생들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학생 쪽으로 가더니 욕설을 섞어가며 소리 질렀다.

성환이도 막상 그 현장을 보더니, 가세해서 소리쳤다.

아시아계 학생이 당하고 있는 게 남 일 같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재벌 2세까지 이럴 정도면 이 나라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몇 마디 험한 말을 주고받으니 폭행을 멈추고는 상대방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기분적으로 백인들 덩치가 있어서 체급 자체가 다르다.

특히 가운데 놈은 프로레슬러인 헐크호건처럼 알록달록 근육이 튀어나온 게 제대로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거 같았다.

사람 많은 곳으로 튀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맨 앞 헐크호건 같이 생긴 떡대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정승균의 발이 전광석화와 같이 날라서 그놈 관자놀이에 꽂힌 것이었다.

이를 본 나머지 한 명이 달려들었는데 마찬가지로 턱에 돌려차기 한 방 맞더니 그대로 떡실신했다.

나머지 한 명은 부들부들 떨며 아무 짓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정승균, 이자는 히어로가 맞았다.

한국대장!

잠시 후.

삐뽀삐뽀~!

경찰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동네 경찰 잘 안 온다면서요?"

정승균에게 타박하자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요.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네요."

"저기 구경하던 백인 놈들이 신고했나 본데요? 경찰 출동 시간은 피해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요."

아무래도 LA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 보니 성환이 말이 일리가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뭔가 씨불이면서 총을 겨눴다.

성환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두 손 높이 드세요. 행여나 주머니라도 넣으면 큰일 납니다. 몸에 빵구나요."

"권총 한 발 맞는다고 빵구난다고?"

"일단 총 한번 쏘기 시작하면 탄창 안에 있는 거 다 쏘는 게 매뉴얼입니다."

어쩐지 뉴스에서 어떤 범인이 경찰한테 총을 열 발을 맞고 죽었다더니.

겁을 집어먹고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하마터면 오줌 쌀 뻔.

영화에서나 보던 걸 겪게 될 줄이야.

미국 진출 첫날에 기껏 줄까지 서서 길바닥에서 음식을 먹질 않나 경찰한테 총까지 겨눔질 당하질 않나.

이게 다 정승균 때문이라는 생각이 나니 울화통이 터졌다.

경찰서 안.

미드를 많이 봐서 영어를 대충 알아들을 순 있었지만, 입 밖으로는 뱉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성환아. 통역 좀 해줘."

"네. 말씀하세요."

성환이는 이런 일을 자주 겪어봐서였는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정승균이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고 핫도그 먹으러 온 손님일 뿐 여기 시비붙은 놈들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특히 저 태권도 아저씨랑."

성환이 경찰한테 내 얘기를 통역해줬다.

그러나 대충 들어도 전혀 엉뚱한 말만 했다.

"딴말 한 거 다 안다."

성환이 놀란 듯 눈동자가 커졌다.

"알아들었으면 직접 얘기하시던가요."

"듣는 건 해도 말은 좀 그래."

"뭐야? 들을 수 있어도 말할 순 없다고요?"

"영어를 문법 위주로 배워서……."

주입식 교육의 폐단이 적나라하게 증명된 순간이었다.

경찰서 내에서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인도계 학생이 백인들에게 다구리 당하고 있는 걸 우리가 도와준 건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백인 놈들이 오히려 피해자 행세를 했다.

태권도 유단자가 자기들 돈 뺏으러 덤빈 거라고 했다.

당한 인도 학생의 항변에도 경찰들이 백인 놈들 말만 듣고 우리를 가해자로 몰아가려 하자 비로소 성환이 나섰다.

휴대폰으로 찍어놓은 동영상을 내보였다.

동영상에는 인도계 학생이 다구리 당하는 모습과 정승균이 나서서 제지하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쩐지, 한참 여유롭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다.

하마터면 죄를 뒤집어쓸 뻔한 걸 성환이 덕에 살았다.

역시 오랜 유학 생활 덕에 언제나 불리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철저히 준비한 것이다.

인도계 학생의 부모님도 소식을 듣고는 경찰서로 바로 달려왔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우리를 향해 거듭 고맙다고 했다.

특히 정승균의 손을 붙잡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우리 아들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딕션도 좋고 간단한 문장이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니 신기할 뿐이었다.

미국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흘렀다.

시차 적응 때문에 잠 한숨 제대로 못 잤는데 해가 밝았다.

한 발짝 내딛는 게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무겁고 힘겨웠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특허업체의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회사의 사무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렬로 쭉 늘어진 책상에 마주 보게끔 파티션으로 구분해놓고 팀장이 가운데에서 전 팀원들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창고형 건물처럼 천장이 높아 지붕의 구조를 그대로 노출 시켜 답답함이 전혀 없었다. 자리 사이에 칸막이 같은 건 아예 없었고 상석, 즉 팀장의 자리를 특정하기가 어렵게 모든 자리가 대등하게 보였다.

게다가 방처럼 문이 있는 회의실이 아니라 카페처럼 탁 트여서 특정 자리가 없이 아무 데나 앉아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 같은 회의실에서 앉아 커피 한잔하며 기다리는데 상대측 담당자들 두 명이 들어왔다.

쓸데없는 날씨 얘기나 이것저것 농담 삼아 던져보는 건 한국이랑 비슷했다.

이제 본론.

담당자는 안면을 바꾸고는 정승균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특허권을 침해하여 제품화까지 하였습니다."

"저희는 인정할 수 없으며 충분히 다툼의 여지가 있고 얼마든지 소송에서 저희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상대측은 정승균 대표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준비된 자료를 꺼냈다.

"여기 특허침해 분석자료와 기술특징 대비표입니다. 저희 쪽은 침해가 명확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자료를 살펴보던 정승균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쉽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한 듯했다.

정승균은 다짐한 듯 굳건하게 말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도대체 얼마를 요구하는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저희는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저희가 보유한 특허를 침해해서 만든 제품의 생산과 판매를 중지할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돈 필요 없고 그냥 너네 회사 제품 생산 못 하고 영업 못 하게 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정대표는 생각보다 심각한 반응에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성환이 우리끼리만 알아듣게끔 한국말로 얘기했다.

"어차피 돈이 전부 아닙니까? 돈 좀 더 뜯어내려고 이러는 거 같은데요? 정대표님 혹시 최악의 경우 얼마까지 생각 중입니까?"

정대표도 고민되는지 제대로 답을 못했다.

"성환아. 이건 그냥 미끼일 수 있어. 뒷다리 잡는 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거야."

돈을 마다하다니.

어차피 돈은 최동욱으로부터 챙길 수 있으니 지금 이자들은 최동욱의 지시대로 질질 시간 끌면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거다.

결국 나중에 최동욱이 이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정영태 교수의 5% 지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함정임이 확실해졌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달성했다.

일단 돌아가서 작전을 다시 짤 수밖에.

그러나 정대표는 미련이 남는 듯 포기할 줄을 몰랐다.

"여기 대표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직접 협상하고 싶습니다."

상대방은 대답 없이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정대표 역시 포기하지 않고는 한마디 더 했다.

"저희가 이렇게 만나자는 요청에 한국에서부터 어렵게 왔는데 안 나와보시겠다는 겁니까?"

소리가 제법 컸는지 뻥 뚫린 천장을 통해 저 멀리 사무실까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무슨 일 생겼는지 궁금한 직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우리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2층 계단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측 담당자가 급하게 소개했다.

"저희 회사 CEO이신 이샨입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대표가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일 거다.

인사를 건네고 얼굴을 마주 보자 깜짝 놀랐다.

놀란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그 학생 아버님……."

"어제 그 히어로……. 우리 아들 생명의 은인……."

CEO는 어제 위험에서 구출해준 그 인도계 학생의 아버지였다.

우리는 서로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위해 나서면 언젠가 반드시 그 덕을 볼 수 있다.

불과 하루 만에라도.

잠시 후 이샨대표는 직원들로부터 파일을 건네받고 상황을 전해 들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기도 했다.

대강 돌아가는 걸 보니 게임 끝났다.

이샨대표는 정승균대표를 향해 말을 건넸다.

"사실은 꽤 큰 성공보수를 약속받아 누군가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정대표도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쪽 회사에서 기술정보를 빼내서 특허소송 걸만한 걸 찾았고 해당 특허를 가진 업체로부터 그 특허를 사들였습니다."

얻어걸린 게 아니라 기획했다고 실토한 거다.

"그리고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누가 부탁했다는 말인가요?"

누구 짓이냐는 물음에 이샨대표는 곤란한 듯 답했다.

"죄송합니다. 업계 사정상 저희가 직접 누구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특허침해 소송은 취하해드리고 다시는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대표는 이샨대표의 두 손을 맞잡고 격하게 흔들어댔다.

수렁에서 건져줬다는 생각에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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