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29화 (129/191)

129화 LA

정승균은 만나자마자 같이 해외 출장 가자는 성환이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저주저했다.

"아직 변호사도 선임하기 전이라서요."

"혹시 아버님께서 소개받으신 분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지금 논의 중입니다."

아무래도 정교수가 최동욱이 돕겠다는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결정하기 전에 선수 쳐야 한다.

"먼저 상대측 요구 조건을 들어보고 나서 선임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합의를 할 건지 소송으로 갈지 정해서 그에 맞는 전문가를 찾아보시는 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만."

내 말이 일리가 있는지 정승균이 동의했다.

"네.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겠네요."

"마침 성환이 이 친구가 LA 유학파 출신이라서 같이 가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아! LA에 계셨었나요? 저도 거기서 유학했는데."

정승균과 성환은 먼 타지에서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 * *

며칠 후.

성환이와 함께 LA로 향하는 색동옷 입은 비행기에 올라탔다.

정교수님이 잡아준 비즈니스석.

물론 회귀 전에는 임원이었으니 규정상 비즈니스석을 끊을 순 있었지만, 정작 그땐 해외로 출장 갈 일이 없었다.

장거리 출장이 잦은 과, 차장일 때는 물론이고 휴가차 여행을 떠날 때도 주머니 사정상 이코노미석만 탔었다.

이번에 비즈니스석에는 처음 올라탄 것이었다.

역시 돈값을 한다.

줄도 따로서는 바람에 빠른 시간에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게다가 등받이를 조절하니 180도까지 완전히 누울 수도 있었다.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잠시 후 이노코미 좌석 승객들이 들어왔다.

티켓팅부터 출국심사는 물론 비행기 안에 들어올 때까지 내내 줄을 서서였는지 대부분은 진이 모두 빠진 듯 힘겹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놓고 쳐다보진 않았지만, 곁눈질로 부러움 반, 질투심 반의 심정으로 흘겨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물론 나 역시 이전에는 마찬가지였다.

한번 비즈니스석에 앉아보니 해외를 안 나가면 안 나갔지, 다시는 이코노미석에 앉지 않겠다던 예전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이륙 후 얼마 안 있어 승무원이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 사의에 놓인 커튼을 쳐버렸다.

얇은 커튼 한 장이 두 세계를 완벽히 분리시킨 거다.

사실 비행기만큼 자본주의적 논리가 완벽히 지배하는 공간은 없다.

장유유서 같은 유교문화?

고질적인 인종차별?

최소한 비행기 안에서만큼은 이런 건 일체 찾아볼 수 없다.

인종이나 직업, 인품은 물론이고 외모나 사회적 지위 고하 등 그 어떠한 것도 고려되지 않는다.

승객들은 오로지 자신의 좌석 그레이드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을 받을 뿐이다.

피도 안 통하게 열 몇 시간을 쪼그려 앉아서 팔꿈치로 옆 사람 얼굴을 쳐가면서 냄새나고 식어 빠진 비프 or 피쉬를 씹느냐?

아니면 편안하게 누워서 애피타이저부터 후식까지 순서대로, 메인디쉬의 굽기까지 결정하며 천천히 맛을 즐기느냐는 좌석에 따라 결정된다.

내가 시킨 안심스테이크.

웰던으로 주문했는데도 어떻게 조리한 건지 전혀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다.

"와 장난 아니다. 이거 완전 뼈다귀 해장국인데? 웰던인데도 쭉쭉 찢어져."

성환이 짜증 난다는 듯 쳐다봤다.

"그럼 웰던이 찢어지지 안 찢어지면 그게 고기닙까? 고무지."

이제껏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시켜 먹던 스테이크가 고기가 아니라 고무였다니.

처음 알았다.

메인 디쉬를 비우자 승무원이 치즈를 종류별로 다 갖다줬다.

내 인생에서 원래 양재동 마트의 체다치즈가 일등이었는데 오늘부터 4등으로 밀렸다.

고다, 문스터, 에멘탈 이름도 처음 들어본 낯선 치즈를 입에 넣으니 적당히 고릿한 게 풍미가 올라왔다.

이제 끝났나 싶을 때 과일은 물론 아이스크림과 초콜릿까지.

나오는 데로 집어먹으니 성환이 자기 초콜릿을 건네며 물었다.

"비즈니스 좌석 처음입니까?"

"중국 왔다 갔다 했을 때 업그레이드해 줘서 타보긴 했었는데 이렇게 큰 비행기는 처음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살짝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 넌 비즈니스 매번 타서 좋겠다. 이 자식아."

"비즈니스는 나도 처음인데요. 이게 뭐야? 이불도 안 주고 그냥 담요 하나 딸랑 던져주고. 심지어 갈아입을 옷도 안 줘."

이 자식 처음이라는 게 이제껏 일등석만 타봤다는 얘기였다.

지난번 홍콩은 내가 같이 간데다 천하태평 예산으로 갔으니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에 앉았을 테고.

"일등석은 이불에 갈아입을 옷까지 준다고?"

"당근이죠. 정교수가 좋은 자리 잡아놨다고 해서 그냥 왔구만. 비즈니스석인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챙겨올걸."

성환은 툴툴거리며 앞자리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원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저기라고 말하는 듯.

비즈니스석과 퍼스트클래스를 구분하는 저 얇은 커튼.

난 이제껏 저런 게 있는 줄도 몰랐었다.

비행기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해도 컵라면이다.

내가 라면을 주문하자 성환이도 출출한지 옆에서 따라 주문했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승무원이 들고 온 접시에는 라면이 놓아져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컵라면이 아니라 그릇에 예쁘게 담아온 끊일 라면이었다.

한 젓가락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자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역시 라면은 끓여야 제맛이라니까!"

그러나 성환은 뭔가 몹시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쳇. 이게 뭐야? 컵라면을 그릇에 담은 거잖아?"

"뭐라고? 컵라면?"

성환이 한 젓가락을 집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봐도 모릅니까? 완전 설익어 가지고 탱탱한 걸 뭔 맛으로 먹으라고. 면은 자고로 푹 삶아야 제맛이지. 싼 좌석이라고 컵라면 대충 부어줬나 보네."

비즈니스가 싸다는 뜻인 건 오늘 알았다.

성환이 말대로 양이나 면발의 굵기를 볼 때 컵라면이 맞았다.

그릇에 담겨있다고 그저 봉지라면이겠거니 생각했다니 이제껏 나의 라면에 대한 진심은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퍼스트클래스는 봉지라면을 끓여주고 비즈니스는 컵라면을 그릇에 담아주고 이코노미는 그냥 컵에 물 부어서 던져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도 역시 비행기 안에서는 컵라면이 진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열 시간도 넘는 비행 끝에 비행기가 LA 공항에 무사하게 착륙했다.

착륙 도중 기체가 꽤 흔들린 바람에 나도 모르게 손바닥은 땀이 흥건히 배었었다.

땅에 안전하게 닿자 안도감에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뭐가 무서워요?"

회귀까지 해서 두 번째 사는 인생인데 남 좋은 일이나 하다가 마감할까 봐 솔직히 두려웠다.

"당연하지.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넌 안 무섭겠냐?"

"비행기 첨 타보나. 어차피 안 떨어지거든요? 그리고 떨어지면 그냥 죽으면 되지 뭐가 무섭다고."

그래.

내가 걱정하나 안 하나 떨어질 비행기는 떨어지고 무사히 착륙할 비행기는 착륙하겠지.

괜히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 성환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정승균과 함께 셋이서 공항을 함께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마치 국내선 김포공항에라도 도착한 듯 한 번의 두리번거림도 없이 자연스럽게 출구를 찾아 나왔다.

그러나 입국 게이트 밖에는 아무도 우리를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조윤경 같았으면 벌써 몇 명이 나와 있어서 짐도 받아주고 준비된 차량으로 안내하는 등 알아서 다 세팅해 놨을 텐데.

이놈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뭐야? 비서실에서 안 나왔어? 의전이 왜 이래? 쫓겨난 게 맞구만."

"괜히 LA 간다고 했다가 최동욱 귀에 들어갈 텐데. 그자가 무슨 수라도 쓰면 어떡할라고요. 게다가 천하제일 일도 아닌데."

맞는 말이지만 핑계 댔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쪽팔려 하는 거 같았다.

정승균이 렌트카 회사로 안내했다.

"제가 예약했으니까 같이 움직이시죠."

그러나 출고 대기 칸에 주차되어있는 차가 모두 마음에 안 드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렌트카 직원을 찾아 살짝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잠시 후 그 직원이 삐까뻔쩍한 차를 몰고 와서는 키를 건넸다.

딱 봐도 예약한 카테고리 내 동급 최강의 차인 것 같았다.

"미국식 팁 문화에요. 20달러면 차가 바뀝니다."

역시 자본주의의 나라다.

성환이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올라탔다.

"뭐냐? 너네 동네니깐 앞에 타서 안내해야지."

"아이쿠, 습관돼서."

마지못해 나오려는데 정승균이 제지했다.

"저도 이 동네 빠삭하니깐 괜찮습니다. 그냥 뒤에 계십시오."

정승균의 말에 성환이 다시 뒷자리로 들어가려는 걸 내가 목덜미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어딜! 넌 앞에서 동네 구경이나 해라."

성환은 마지못한 듯 툴툴거리며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는 바로 로비로 나왔다.

"오늘 이미 날도 저물었는데 저녁 식사나 함께하시겠습니까?"

저녁 초대에 딱 까놓고 파인다이닝으로 데려가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럴까요? 그럼 맛있는 곳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승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라탔다.

"맛있는 거면 제가 자주 다니던 식당이 하나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얼마나 맛있는 데를 가려나 궁금하긴 했지만 미리 알면 재미없을까 봐 물어보진 않았다.

성환이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차는 휘황찬란한 다운타운을 벗어나 불빛도 듬성듬성한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은 잠시였을 뿐 예전에 누구한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다운타운은 지저분하고 위험하기만 할 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은 다 근교에 있다고.

한참을 달린 후 차를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차에 내려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엔 파인다이닝은커녕 변변한 레스토랑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노점상 같은 허름한 식당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분홍빛 간판에 가게 이름마저도 분홍 핫도그.

게다가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줄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겨우 핫도그 하나 먹겠다고 줄 서 있는 게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여기 레스토랑은 없는 거 같은데요?"

그러나 정승균은 환한 얼굴로 손을 뻗어 핫도그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저기가 맛있는 곳입니다."

뭐야.

열 몇 시간의 비행 후 한 시간가량을 운전해서 힘들게 와서는 기껏 먹는다는 게 겨우 핫도그라고?

장난하나 싶어 잔뜩 인상을 구겼으나 성환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우! 그렇지 않아도 나도 저기 가고 싶었는데."

오지만 돌면서 배낭 여행하다가 몇 달 만에 한국식당을 발견했어도 이 정도로 기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온 세상 음식점이 모두 몰려있는 미식 천국의 나라에서 첫 끼가 겨우 핫도그라니.

이 둘은 싸이코가 분명하다.

자세히 보니 노점은 아니었다.

길거리에 줄 서서 주문하고 받아 가는 시스템.

그래도 아무리 공짜라도 핫도그 따위를 먹겠다고 줄을 설 수는 없다.

"줄도 긴데 다른 거 드시죠. LA에 맛있는 거 많잖습니까."

"에이 대표님. 저 정도면 줄 거의 없는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드시죠. 엄청 맛있는데."

눈치도 없는 성환이 놈 도움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줄을 섰다.

40분의 인고 끝에 받아든 핫도그.

아무리 봐도 크기만 크지 양재동 대형마트 푸드 코너에서 파는 것과 무슨 차이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식당 안이 미어터져서 핫도그를 들고 길거리로 나왔다.

"핫도그는 밖에서 먹어야 제맛이죠."

"네. 이렇게 들고 한입에 넣어야죠."

두 사람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만 주고받았다.

미국 진출 첫 끼니를 이런 정크 푸드를 먹다니.

그것도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것도 아니고 거지마냥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먹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한 입 베어 무니 뭔가 다르긴 달랐다.

고향의 맛 조미료 대신 미국 맛 조미료를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청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

지나가는 길에 식당 나오면 들를만하다 정도는 되었다.

반이나 먹었을까 벌써부터 배가 불러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맞은 편 어두운 곳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기울이니 영어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여러 명이 한 명을 둘러싸고 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승균과 성환이 역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쪽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잠시 후 정승균이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도와야겠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