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은밀한 작업
"최동욱 실장이 준다는 도움이 어떤 겁니까?"
"아들놈 회사 소송 건 그거 최소한의 피해로 취하시켜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네? 어떻게요?"
"국내에서 꽤 능력 있는 변호사랑 미국 현지에서 특허법으로 유명한 법무법인까지 섭외해서 도움 주겠다고 하네."
"네? 아무 반대급부 없이요? 겨우 주총에서 몇 마디 해주는 거 말고요?"
내 말을 듣고 보니 정교수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 어떤 청구서가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세상에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마냥 주기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동욱 실장한테 도움받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확답은 안 했죠. 나도 명색이 법대 교순데 여러 사람들 소개받고 있어요. 하는 데까진 해보고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때 말하려고."
듣고만 있던 성환이가 한마디 꺼냈다.
"그렇군요. 교수님. 그런데 혹시 최동욱 실장하고 다음에 만나기로 하면 저희한테 미리 연락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자식 내 능력을 써먹으려고 한 거다.
이놈 말을 번복할 수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정교수와 헤어지고 호텔 로비를 나오자마자 성환이를 째려봤다.
"뭔 소릴 한 거야? 나보고 약속장소라도 가서 들으라는 거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세상에 불변의 진리가 뭔지 아냐?"
"뭔데요?"
"공짜란 없다는 거야."
성환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 쳤다.
"아이 됐구요. 그냥 원하는 걸 말씀하시죠?"
"언젠간 날아갈지 모를 청구서를 기대하라고. 꽤나 버거울 수 있을 거야. 물론 거절할 수도 없을 테고."
"네네. 언제든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건은 정교수님 아들이 걸려있어서 쉽지 않겠는데?"
"그러게요. 최동욱한테 코 꿰어서 질질 끌려가게 생겼는데. 시작도 안 했는데 5%를 뒤지다니."
본격적인 지분경쟁도 하기 전에 정교수가 최동욱한테 포섭당했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치밀은 모양이다.
"아직 실망하지 마. 그 5% 네가 받아올 수도 있으니깐."
"아니 어떻게요?"
"최동욱을 만나고 나서 정교수 아들 회사가 소송당했다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최동욱이 그랬다는 건가요? 에이 설마."
"지난번 미국계 헷지펀드 끌어들인 것도 봐봐. 최동욱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 직접 하진 않았더라도 모종의 역할을 한 게 틀림없을 테니깐."
"병 주고 약 주고라……. 그럴지도 모르겠네."
성환은 절망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이라도 발견한 것인지 얼굴에 환한 생기가 돌았다.
* * *
며칠 후 오전.
정영태 교수로부터 전화가 와서 스피커폰을 켜고 받았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천대표. 지난번에 최실장하고 연락되면 알려달라고 하셨죠? 오늘 L호텔 중식당에서 점심 먹기로 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옆에서 엿들으려고 말한 건데 이 사실을 모르니 충분히 오해할 법했다.
"아닙니다. 교수님 저희가 낄 자리가 아닌 거 같네요. 그런데 혹시 저희가 아드님께 도움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아드님을 한번 뵐까 하는데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저야 고맙죠. 연락처 문자로 남겨놓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끊자마자 성환이 외투를 주워 들었다.
"우리도 가시죠. 오랜만에 짜장이나 한번 드시죠."
원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성환이가 원모에게 얘기한 건가 싶었다.
"마침 잘됐습니다. 오늘따라 왠지 군만두가 땡기더라구요. 이럴 줄 알고 제가 단무지 사다 놓은 것도 있으니깐 챙겨가겠습니다."
그 호텔 중식당에 단무지가 안 나온다는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게다가 언제 다시 갈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데 미리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니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녀석에게까지 내 능력이 발각될 수는 없다.
치사하게 짜장이랑 군만두 땜에 떼놓고 갈 수도 없고 커다란 당근 하나를 제시할 수밖에.
뒤돌아보자 어느새 원모는 냉장고에서 단무지를 꺼내 가방에 챙기고 있었다.
"우리 할 일 있어서 가는 거니깐 미안한데 이번엔 빠져라."
급 시무룩해져 단무지를 다시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원모야! 잠깐."
탈락했는데 슈퍼패스를 받아 간신히 살아남은 경연참가자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건 이리 줘."
"네?"
"단무지 그냥 달라고. 내가 가져가게."
원모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는지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벌리고 있었다.
"대신 내가 탕수육이랑 군만두 포장해올게. 그 정도면 됐지?"
급 방긋거리며 큰 소리로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행여 최동욱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점심시간 한참 전인 11시에 도착해서 룸을 안내받았다.
최동욱이 몇 번 룸을 예약했는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저 가운데 방으로 요청했다.
전담 서버처럼 항상 같은 분이 안내를 해주셔서 단골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은 어떤 음식 준비해드릴까요?"
메뉴판을 천천히 넘기며 고민하고 있는데 성환이 그새를 못 참고 바로 답했다.
"전 짜장이요."
"뭐야? 두 글자로만 된 거 시키는 거야? 설마 여기 룸 잡으면 메인디쉬 하나는 시켜야 하는 거 몰라?"
"에이 그건 어중이떠중이 손님들한테나 그런거고 전 상관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서버 분은 온화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맞습니다. 드시고 싶으신 거 아무거나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난 단골이 아니라 이놈이 말한 바로 그 어중이떠중이였다.
짜증이 나서 메뉴판을 덮었다.
"그럼 짜파게티도 됩니까?"
당황한 듯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인 서버분은 성환이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답했다.
"제가 주방에 한 번 문의해……."
"아닙니다. 농담이에요. 그냥 탕슉하고 만두 주세요. 구운 걸로요. 그리고 짬뽕도 하나요."
물론 내 돈 쓸건 아니지만, 짜파게티를 2만 원 주고 먹는 건 너무 아까웠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도 나오기 전.
아직 점심시간이라기엔 조금은 이른 시각이었지만 옆방에서 손님이 한 명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기울이니 성환이 알아챘다.
"뭐야? 벌써 왔어요?"
"쉿!"
조용히 하라고 다그치자 숨죽이며 옆으로 찌그러졌다.
옆방에서는 다른 손님 한 명이 더 들어오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이변호사님."
최동욱의 목소리다.
"네. 지난번 엘리스 건 이후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전 미국계 헷지펀드인 엘리스의 자문 변호사를 맡아 기자회견까지 했었던 이호창 변호사다.
"이번 특허 건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 제가 뭘요. 오히려 실장님께서 더 신경 써주셨죠."
두둑이 챙겨줬다는 얘긴데.
특허 건이라니 정교수의 아들 회사 얘기를 한 게 분명하다.
어쩐지 헷지펀드의 이익을 대변해주던 앞잡이를 하더니 국익에 해가 되든 말든 자기 돈만 벌면 장땡이다라고 생각하는 놈이다.
"소송 먼저 제기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최대한 길게 끌고 가려면 다음 단계는 어떤 게 있죠?"
"만나서 압박도 하면서 타결 가능성을 살짝 비춰주는 게 중요합니다. 희망 고문하는 거죠. 그런데 실장님. 이런 얘긴 전화로 해도 되는데 부르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잠시 후에 그 특허 피소법인 대표의 아버님 오시기로 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천하제일 대주주이시기도 해서 그분께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변호사님께서 전문가이시니 그분께 소개해 드리려구요."
"네? 제가 원고 측이랑 작전 중인데 피고 측에도 도움을 드리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말입니다. 변호사님께서 피고 쪽을 맡아주셔야 우리가 유리하게 질질 끌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수료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
실제로는 원고 측에 서되 겉으로는 피고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컨트롤 하겠다는 뜻이다.
최동욱의 교활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약속 시간이 됐는지 정영태 교수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최동욱이 약속 시간 한참 전에 미리 이호창변호사를 불러내서 작전을 짜놓고 기다린 것이었다.
사전에 얘기한 대로 최동욱은 정교수에게 이호창 변호사를 이 방면의 전문가라고 소개하면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미국 유명 법무법인까지 어레인지 해주겠다고 선심까지 써가며.
하지만 역시 신중한 성격의 정교수는 그 자리에서 확답은 하지 않되 그저 감사하다며 긍정적인 답변만 건넸다.
옆방의 식사가 끝나고 자리를 뜬 후 성환에게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정말 최동욱이 한 거라고요? 도와주는 척하면서 뒤통수치겠다는 건데, 정교수한테 바로 알려야 하지 않나?"
"그 말을 믿겠냐? 우리가 녹음한 것도 아니고 아무 증거도 없는데."
"그건 그렇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자고요?"
"그건 아니지. 정교수 아들을 만나보자고. 뭔가 방법이 있을 수 있잖아."
"그러죠 뭐. 저기요."
계산하려 서버 분을 부르는 걸 막아 세웠다.
"잠깐. 포장 주문해야지. 아까 원모한테 탕수육하고 군만두 포장해간다고 했잖아."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으쓱했다.
"내가요? 난 그런 적 없는데?"
발 빼기 신공이다.
"전 이거까지만 계산할게요. 원모님 약속은 대표님이 알아서 하시든가."
"치사한 놈. 정말이야?"
"I'm serious."
"뭐? 이거 가지고 심각하다고?"
"심각이라니. 하여간 영어를 책으로 배운 티를 꼭 낸다니깐. 농담 아니다 뭐 그 정도 말이거든요?"
중학교 때 배운 어쩌구 기본영어가 잘못된 것임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 수 없다.
8만 원짜리 탕수육에 5만 원짜리 군만두…….
이 비싼 음식을 더 주문할 수는 없다.
"저기요. 여기 탕수육이랑 군만두 남은 거 포장 부탁드립니다."
성환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대표님. 설마 먹다 남은 거 줄라고?"
"네놈 도와주느라고 제대로 못 먹어서 반도 넘게 남았잖아. 짬뽕 싸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탕수육이랑 만두가 어때서? 그냥 소짜 시킨 걸로 하면 되잖아."
"에이 그래도요. 그냥 내가 살게요."
서버분에게 포장 주문을 했다.
어차피 살 거면 진작에 그럴 것이지 이 자식 꼭 사람 모양 빠지게 뒷북치는 스타일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역시 원모가 반갑게 맞이했다.
버선발로 뛰어나온 듯했지만, 시선은 내가 아닌 내가 들고 있는 포장 용기에 꽂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맞이한 건 내가 아니라 탕수육과 군만두였다.
"옛다. 처먹어라."
"대표님. 감사합니다."
자기가 산 건데 나한테 고맙단 말 들은 게 못마땅했는지 성환이 끼어들었다.
"그거 제가 산 겁니다. 거기다가 새 거구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원모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새 거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헌 거도 있습니까?"
"누가 그냥 남은 거 싸가자고 하는 걸 제가 말렸다는 말이죠."
원모가 내 얼굴을 보며 눈을 흘겼다.
"아니야. 원모야. 그냥 농담한 거야. 설마 내가 너한테 먹던 걸 주겠냐?"
그러나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이 녀석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 * *
성환과 함께 정교수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
아버지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촌 형인 정영균의 회사에도 투자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는지 어려운 와중에도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본래 직업이 의사라서 그런지 첫인상은 굉장히 섬세하고 샤프해 보였다.
명함 속 이름은 정승균.
회귀 전에 어디선가 들어보거나 만난 적이 있는듯한 이름이었다.
이 집안 뭔가가 있다.
정교수도 그렇고 조카인 정영균에다 아들까지.
정교수의 미래를 알기에 아들인 정승균 또한 이번 어려움을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말 이후 대화는 자연스럽게 특허 문제로 넘어갔다.
"특허를 침해했다는 건 사실입니까?"
"그게 조금 아리송합니다. 맞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어서요."
"법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런데 비용도 그렇다 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서 막 크게 커가는 사업에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입니다."
질질 끌어달라는 최동욱의 말이 이해가 갔다.
정교수를 장기적으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절대 빨리 끝내도록 냅두지 않을 것이다.
"혹시 상대측에서 협상안을 제안받으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은 만나서 얘기해보자고 연락은 왔었습니다."
"미국에서요?"
"네. LA에서 보자고요."
LA라는 말에 성환이 눈동자가 밤만큼 커졌다.
"그럼 저희랑 같이 가시죠. 그쪽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