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27화 (127/191)

127화 치밀한 전략

"정영태 교수요? 한따까리라는 게 무슨 말씀이죠?"

"뭔가 많이 준비했는지 질문을 쏟아내더라고."

"그분 법대 교수 출신에 학구적이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스타일인데 그게 무슨 문젠데요?"

"보통은 그냥 원론적인 문제만 넘겨짚잖아. 그런데 그분은 완전히 다르더라니까."

"다르다뇨?"

"올해 사업부 실적 가지고 막 따지고 계시더라니깐. 그렇지 않아도 IR파트에 후배들한테 들어보니깐 전조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주총 열리기 전에 회계장부열람권을 신청해서 천하제일에서 한마디로 난리가 났나 봐. 잔뜩 준비했는데도 털린 거지."

회계장부열람권이라면 3%를 넘게 가지고 있는 주주가 회사에게 요청해서 회계장부 및 관련 서류를 열람하고 복사까지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상법 제466조에 기재되어 있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 사실상 실무에서 접해보기는 어려운 개념이다.

역시 상법학 전공 교수답다.

그나저나 지난달 성환이와 만났을 때와는 180도 달라진 스탠스라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역시 기자 출신답게 김철수 이사는 직접 취재라도 한 듯 주주총회 현장을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재현해서 들려줬다.

* * *

<주주총회장>

대표이사인 의장의 개회 인사가 끝나고 첫 번째 안건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매년 그러하듯 대본대로 주주인 척 앉아있던 회사 직원이 손을 들었다.

"의장!"

진행요원이 다가가서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먼저 글로벌 대내외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 해 동안 회사를 성장시켜 주신 의장 및 임직원 분들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리 보내주신 자료로 내용은 모두 확인하였으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안건은 박수로써 의결할 수 있기를 요청드립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

매년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날리는 멘트에 의장이 해당 안건에 대해 사전동의한 의결권 수를 발표하려는 순간.

백발의 노신사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의장! 질문 있습니다."

정영태 교수다.

몇 년 만에 총회꾼이 출현했다는 생각에 순간 모든 임직원들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마이크를 들고 있던 진행요원은 마이크를 줘도 되는지 눈치만 살폈다.

사전에 누군가 회계장부열람권을 신청했었다고 보고받은 재무팀장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궜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대표이사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바지사장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천하제일에 대한 자세한 사업내용을 몰랐을 테니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다시 손을 들고는 호통치는 정교수.

"의장! 지금 주주의 정당한 발언권을 묵살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린 대표이사가 진행요원에게 눈짓으로 마이크를 넘기라고 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정교수는 차근차근 준비된 자료를 읽어갔다.

"실적이 양호하다는 의장의 발표는 사실과 매우 다릅니다. 제가 사업부별 실적 자료를 분석한 결과 신규사업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도 합니다만 전통적으로 캐시카우 역할을 맡은 기존 사업에서는 오히려 크게 역신장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투자자로서 통탄한 마음에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룹의 향후 실적개선 방안에 대해 알려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꿀 먹은 벙어리인양 아무 말도 못 하는 대표이사.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자 재무팀장이 나서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재무팀장입니다. 사업부별 실적개선 방안에 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주주님께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활한 의사진행을 위해 동 건은 바로 의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동원된 우호 주주와 직원들이 그럽시다라며 박수를 치는데도 정교수는 이에 질세라 삿대질을 섞어가며 발언을 이어갔다.

뜻을 같이한 여러 소액주주를 미리 섭외했는지 여기저기서 정교수를 옹호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안건마다 건건히 질문과 태클을 이어가며 주총시간이 늘어져만 갔고 받아적고 있던 김철수이사도 기진맥진해졌다.

세 시간도 넘는 공방 끝에 마무리되면서 천하제일 주총이 파행으로 치달았다는 속보 기사도 발견할 수 있었다.

* * *

김철수 이사로부터 모든 얘기를 듣고 있던 성환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지난달에 정교수님 뵀을 때는 전혀 그런 기색을 못 느꼈었는데 이상하네요. 그 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성환이 뭔가라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난번 호텔에서 최동욱과 정교수가 만났네."

"어느 대목에서 그렇다는 거지?"

"지금 지주사 대표는 경쟁사에서 영입해서 허수아비로 앉혀 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의도와는 다르게 야욕을 부린다는 말이 있었어요."

"자기가 뭘 해보겠다는 거야?"

"네. 회장님께 잘 보여서 그 자리 오래 차지하고 싶었겠죠."

감투를 차지하면 그게 걸맞은 권한을 갖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회장을 제외하고 전체 그룹사에서 No.1의 자리인데 그 자리가 얼마나 달콤했었을까.

사무실 내 비서는 물론 어디든 따라다니는 수행비서까지 따라다닌다.

전속 운전기사에 해외 출장 시에는 매번 일등석에만 앉는 달콤한 자리다.

이 자리를 오랫동안 꿰차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다.

"그래서 어떻게 한 건데?"

"사업부를 직접 맡아보겠다고 했나 봐요."

"회장님께선 기존 사업 위주의 운영업무를 맡으라고 하셨고요. 넘버투 최동욱한테는 신규사업 개발 등 기획업무에 치중하라고 업무분장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듣고 보니 상황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최동욱이 멀리 내다보고 정교수에게 접근해서 손을 쓴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허수아비 대표를 깎아내려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생각을 했을 거다. 장기적으로는 결국 나중에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텐데 3대 주주인 정교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미리 작업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납득 안 되는 건 있다.

회귀 전의 생에서도 그렇고 회귀한 이후의 지금까지의 행적도 그렇고 정교수가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거다.

"네 말이 맞다. 그때 최동욱이랑 정교수랑 만난 거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교수님이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대표님.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 마음이 다 똑같다니깐요. 가지면 가질수록 나의 것을 더 탐한다니깐."

인생 2회차인데다 살아온 기간이 훨씬 많은데도 이놈한테 가르침을 받다니.

분하지만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바로 휴대폰을 들어 정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고객을 전화를 받을 수 없어…….'

"꺼놓은 모양인데?"

"기사도 나고 하니깐 여기저기 취재요청이 많이 올 테니 그랬겠죠. 그런데 조카가 있잖아요. 우리가 투자한 YK대표 그 친구한테 한번 걸어보시죠."

스피커폰을 켜고 오랜만에 정영균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업 잘되고 있냐는 인사말 몇 마디를 나눈 후 정교수에 대해 물었다.

"정영태 교수님 지금 연락이 안 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네. 아마 숙부님 아들 때문일 겁니다. 제 사촌동생이요. 그 친구가 법적 분쟁에 휘말려서 그것 때문에 정신없으신 거 같더라고요."

"아. 그 사업하신다는 분 말씀이신가요? 그런데 갑자기 분쟁이라뇨?"

"네. 의사 출신인데 미국 유학 갔다가 돌아와서 바이오사업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서 특허 분쟁이 생긴 거 같습니다."

"특허 침해했다고 소송이라도 당한 겁니까?"

"네. 이제 몇 년을 고생해서 해외 수주도 많이 받고 이제 막 사업이 궤도에 올랐는데 악재를 만난 거죠. 워낙 센 특허괴물(NPE) 업체를 만나서 대응이 만만치 않은가 보더라고요."

특허괴물(NPE).

생산공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오로지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특허를 사들이는 놈들이다.

그리고는 그 특허권을 침해한 기업을 고소하여 높은 가격으로 되팔거나 로열티를 받는다. 이런 방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말 그대로 괴물 같은 기업이다.

주로 지적 재산권 의식이 철저하지 않은 나라의 대기업들을 상대로 미국 등 선진국에서 침해소송을 통해 활개 치고 있다.

한국의 IT 대기업 중에서는 연구소 출신 임원이 퇴직한 후 특허괴물로 변해 해당 기업에게 특허침해 소송을 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지불능력이 거의 없을 법한 조그만 회사를 타겟으로 삼다니 꽤 의아했다.

"보통 그런 곳들은 이제 막 크기 시작한 신생 업체보단 막대한 자금이 있는 대규모 상대로 소송을 건다고 들은 거 같은데요."

"네 저희도 그게 의문입니다. 작은 기업이라 배상할 자금도 충분치 않을 텐데요."

"정교수님 꽤 큰 부를 이루셨다고 들었는데 그분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막말로 설사 침해했다고 하더라도 특허를 되사거나 로열티 좀 지급하면 될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상대측에서 합의 의사가 전혀 없다고 하나 봅니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니라 이 기업을 죽이려고 경쟁업체에서 작정하고 나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주총회에서 보여준 정영태교수의 입장 변화와 그 아들의 특허권 침해소송.

도무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최동욱의 존재가 찝찝했다.

주총 며칠 후 드디어 정교수로부터 콜백이 왔다.

역시나 L호텔 로비.

조명 값 포함한 2만 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정교수는 지난번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매우 낙담해 있는 것 같아 도저히 주주총회에서의 일을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정교수 아들 얘기를 들었는데 정영균 대표로부터 들은 내용과 거의 대동소이했다.

"상대측에서 합의 요구하지는 않는다고요?"

"요구하긴 하는데 워낙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실효성이 없는 거죠. 그거 지불하려면 내가 가진 천하제일 주식 몽땅 팔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나 많이요? 그럼 안 팔겠다는 말이겠네요."

정교수는 침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명색이 법률학잔데 아들 녀석이 이렇게 인식 수준이 낮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그게 왜 교수님 탓입니까? 나쁜 놈들 탓이죠."

옆에서 듣고만 있던 성환이 볼펜으로 내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넋두리는 들을 만큼 들었고 이제 우리가 물어볼 차례라고 한 거다.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이 살짝 물었다.

"혹시 교수님. 예전에 혹시 천하제일에 최동욱실장이라고 만난 적 있습니까?"

"만났죠.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도움을 준다고 했어요."

"네? 만나서 무슨 얘길 하던가요?"

"자기가 지주사 실장이니깐 전자공시 보고 연락드렸다고 만나자고 하더라고. 맞다. 저번 달에 여기에서 우리 차 마시고 그날 저녁을 그 사람하고 같이 한 거예요."

성환이 말이 맞았다.

그날 호텔 앞에서 마주친 게 최동욱이 정교수를 만나러 온 거였다.

"그래서요?"

"뭐긴. 그냥 인사차 식사하고 헤어졌지."

"그게 끝인가요?"

"그런데 그 뒤로 아들 녀석 회사가 소송당하고 난 다음에 다시 연락이 오더라고. 소송 얘기하니깐 자기가 유학파 출신에다가 그 바닥 사람들 많이 안다고 도움 준다고 해서 고맙다고 했지."

"그게 끝이던가요?"

"그게. 조건이 있다고 하더라고."

"조건이라뇨?"

정교수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며 답했다.

"주주총회에 참석해서 몇 가지 문제 제기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구요. 난 그 사람이 그룹 고위층인데다 회사에 건전한 충고를 하는 거니깐 흔쾌히 답했지."

"저희도 주총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조용히 문제 제기만 하려고 했는데 최실장이 얘기한 대로 대표이사가 아무것도 모르고 완전 함량 미달이더라고. 그래서 쪼금 흥분했지 뭐야."

결과적으로 정교수는 최동욱의 시나리오에 따라 충실히 연기한 셈이 되었다.

내막도 모른 채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표이사를 깎아내렸고 상대적으로 최동욱을 올린 거다.

최동욱은 우선 대표이사를 밀쳐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다음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조회장의 지분까지 물려받겠다고 나름 승부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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