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주주
누군가 천하제일지주 주식 5% 이상을 보유했다고 공시한 것이다.
지난번 미국계 헷지펀드 스탁스와 엘리스가 6% 매입했다고 공시한 이후로 몇 년 만에 나온 지분공시였다.
밑으로 내려보니 보유자로 신고한 이름은 바로.
정영태.
천하제일의 사외이사였다가 한때 주총꾼으로 활약하다가 나와의 인연을 맺어 우호적인 소액주주가 된 전직 K대 법대 교수 그분이다.
성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지? 이름이 상당히 익은데?"
"그분이잖아. 소액주주 주총 때 왔었던 분……. 그리고 YK 정영균대표 작은아버지이기도 하고. 천하제일에서 세무조사 받을 때도 도움받았었잖아."
"크헉! 그분이라고요?"
성환이는 설마 그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만 해도 단지 몇 주 가지고 있으면서 소일거리 삼아 주주총회나 쫓아다니던 은퇴한 노교수로만 알고 있었을 테니.
갑자기 천하제일지주 주식의 5% 이상을 매입했다고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야 회귀 전부터 정교수 그분이 평창동의 현인이라 불리며 천하제일지주의 3대 주주가 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니 조금 덜했지만 그래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별다른 소식을 접해보질 못해서 막연히 아직 부동산이 터지지 않았나 보구나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전면에 드러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은퇴한 직장인이 어떻게 5%를 살 수가 있지? 그것도 딸랑 몇 주 가지고 총회꾼 노릇이나 하던 사람이."
성환이 말에 김철수이사 옆에서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예전 부인 병원비 때문에 총회꾼 행세했던 게 떠올라 부끄러웠나 보다.
"돈이야 사업이 아니고도 충분히 벌 수 있지.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서울 근교에 집안에서 물려받은 땅이 많다고 들었던 거 같아."
"에이 그까짓 땅 조금 팔았다고 천억이 넘는 주식을 살 수 있다고요?"
"당연하지. 지금 서울과 붙어있는 경기도 일대가 전부 다 아파트단지로 바뀌는 거 안 보여? 지난번 수호개발이 아파트 개발하겠다는 현장도 같이 가봤잖아. 그런 신도시급 토지 몇 군데를 뭉텅이로 들고 있다고 생각해봐. 천억이 문제야? 조 단위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예전부터 주식 부자들은 땅 부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업하다가 자금이 안 돌아서 위기가 왔을 때 여기저기 땅 부자들 찾아다니면서 급전 당기는 등 도움을 받았지만.
나중에 위기를 벗어났을 땐 그때 도움받은 건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그 사람들이 국가 경제에 전혀 기여하는 바 없다고 멸시하기 일쑤였다.
성환이도 집안에서 그렇게 교육받아왔는지 자연스럽게 나온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럼 5%뿐만이 아니라 더 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보니깐 그분 특성상 경영에 참여한다기보단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여러 회사 나눠서 들고 가실 분이야."
성환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회귀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고 답을 할 수도 없고.
"글쎄 인생 경험이랄까. 대충 겪어 보면 사이즈 나오잖아."
"4.99%면 공시 안 해도 될 텐데 6%도 아니고 딱 5% 매입한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다른 세력이랑 연합해서 간섭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성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가지면 가질수록 더 남의 것이 탐나고 더 갖고 싶어질 텐데."
정교수의 앞날도 모르는 데다 지난번 헷지펀드에게 데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런 말이 나온 것이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알았어. 만나서 얘기해보자고."
바로 휴대폰을 열어 정교수에게 전화를 걸자 반갑게 받아주었다.
"네 천대표. 오랜만입니다."
* * *
며칠 뒤 늦은 오후.
정영태 교수와의 약속장소인 L호텔 로비 커피숍에 들어섰다.
성환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아니, 왜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하지? 빵 트인 로비에서?"
"예전 사람들은 이런 곳을 최고로 쳤어. 나름 격식도 있고."
"커피 한잔하는데 격식은 무슨. 그런데 손님들은 예전 사람들보단 젊은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요? 뭐야? 하나같이 남자 여자가 쫙 빼입고 점잔빼고 있잖아?"
정말 손님들 대부분은 젊은 남녀로서 서로 마주 본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딱 봐도 커플이 아니다.
"저건 맞선 보는 거야."
"네? 평일 4시에 맞선이라고요? 저녁 먹을라면 꽤 남았는데?"
"저녁은 부담스럽잖아. 하루에도 몇 탕 뛸 수도 있는데 차를 마셔야지. 그리고 평일 오후에 시간을 뺀다는 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방법 중 하나야. 설령 직장인이라고 해도 나름 시간 컨트롤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보여주는 거잖아."
대강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살짝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이런 데서 맞선을 보지?"
"응. 이 호텔이 맞선 명소로 옛날부터 유명했어."
"아니, 왜요?"
"풍수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조명 때문이라는 설도 있어."
"조명 때문이라니?"
역시 성환은 어려서부터 보고자라서인지 풍수라는 말엔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응. 조명이 좋아서 얼굴이 예뻐 보인다는 거지. 이 커피값이 거의 조명 값이라는 얘기가 있어."
성환이에게 커피 한잔에 2만 원이라고 적힌 메뉴판을 보여줬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명 값이 어디 붙어있다는 거지?"
이 자식.
커피값이 원래 2만 원쯤 하지 도대체 조명 값이 붙긴 한 거냐고 비꼰 거다.
"됐다. 말을 말자."
그때 마침 입구 쪽에서 정교수가 걸어들어왔다.
몇 년 만이었지만 흰머리가 살짝 늘어났을 뿐 외모상으로는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풍채는 조금 좋아진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자세가 좋아진 거다.
어깨를 쫙 펴고 걷는 게 자신감인지 아우라인지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반갑다는 인사 몇 마디 나누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시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아 그거요? 허허."
"실례가 안 되신다면 어떤 목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기 지금 저랑 같이 근무하는 이 친구가 천하제일 조회장님 아들인 조성환이라고 하는데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직접 인사한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언론에 안 좋은 일로 몇 번 나와서 알고 있나 보다.
정교수는 성환과 악수를 나눈 후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했다.
"목적은 무슨 목적이요. 공시한 그대롭니다. 제가 천하제일그룹에 관심이 많아서죠. 나름대로 성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투자했었고, 장기적으로 배당 수익을 얻으면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정말 순수한 얼굴로 답했다.
성환이도 표정을 보아하니 약간은 안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교수는 집안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토지가 개발되면서 단시간에 큰 부를 얻었다고 했다.
현금으로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름 안정적인 자산에 투자했다는 거다.
즉 물가상승률은 높은데 은행이자율이 낮을 경우, 현금으로 들고 있으면 손해이므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헷지 전략을 썼다고 한 거다.
물론 안전자산인 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안정성 있는 천하제일 주식이라면 나름대로 훌륭한 헷지 수단이 될 수 있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건 기부를 말씀하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토지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우리 사회에 대한 부채 의식이 생긴 것 같아서요. 일정부분은 꼭 환원하고 싶습니다."
표정을 봤을 때 선거철 때마다 아무렇게나 질러버리는 공약마냥 공수표를 던진 건 아닌 듯했다.
진정성이 묻어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훗날 평창동의 현인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을 갖춘 분이다.
간단한 대화를 통해 진심을 전달받고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교수님. 저녁 시간도 된 거 같은데 식사 같이하시겠습니까? 여기 중식당 괜찮습니다."
내가 살 것도 아니라 맘껏 청했다.
자기보고 사라고 한 걸 알아들었는데도 기분이 좋은지 성환이 한마디 보탰다.
"네, 같이 가시죠. 여기 짜장면 정말 맛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에 같이 하시죠."
"네. 할 수 없죠. 교수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작별 인사를 하고 로비를 나서는데 성환이 안도의 한숨이라도 쉬듯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휴. 정말 다행이네요."
"하여간 쪼잔해 가지고. 밥값 그거 얼마나 된다고……. 굳으니까 좋냐? 좋아?"
성환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뭐야. 내가 자기랑 같은 줄 아나. 짜장 그거 얼마나 한다고 진짜. 사람을 어떻게 보고. 정교수 말이에요. 대표님 말처럼 최소한 이래라저래라할 타입은 아닌 거 같다고요."
확실히 나랑은 다르다.
"내가 뭘. 네가 그렇다는 거였지. 아무튼 우리가 그분 조카 회사에 투자한 것도 있고 보통 인연이 아닌데 우리한테 도움이 되면 됐지, 피해를 줄 분은 아니야."
기분 좋게 호텔 문을 나서 발레파킹한 성환이 차가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기사 석에서 운전기사가 빠르게 내리더니 오른쪽 뒷자리로 달려가 문을 열어줬다.
누군가 차에서 내렸다.
최동욱이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조인철 회장 차의 운전대를 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천하제일 그룹 내 조회장 제외하고 No.2가 되더니 뒷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지나갔으니 분명히 우리를 봤을 법도 하지만 못 본 척 쓰윽 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조성환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낙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미처 결정하기도 전에 훅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뭐지? 누군가 지나간 거 같은데? 제대로 본 거죠?"
"그래. 네가 제대로 봤어. 너네 형이 맞아. 수십 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너의 형 말야."
"장난 사양입니다. 왜 못 본 척한 거지?"
"급이 안 맞다고 생각했나 보지. 같은 아들이지만 누구는 말 한마디 없이 밥상머리에서만 보고 누구는 매일 얼굴 맞대고 경영 현안까지 보고받는 사이인데."
심하게 눈을 부라렸는지 시뻘건 게 실핏줄이 터진 것만 같았다.
"알았다. 장난 안 할게. 너도 못 본 척했잖아. 똑같겠지 뭐. 워낙 순식간이어서."
"뭐하러 왔을까요? 회장님이랑 저녁까지 하실라나?"
"선보러 왔나 보지 뭐."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대표님이 들어보시죠."
이제 대놓고 시키려나 보다.
"남의 애정사에 끼고 싶은 생각 없다."
"선이 아니라 누구 만나러 온 거일 수도 있잖아요."
"누구?"
"누구긴 누구예요. 정교수지. 아까 저녁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에이 설마. 친분도 없을 건데? 그리고 최동욱 만날 거였으면 아까 교수님이 얘기했겠지. 천하제일 사람이랑 약속 있다고. 최소한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우리한테 물어봤을 거 아냐."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수긍했다.
"그건 그러네."
* * *
추위가 한풀 꺾일 3월 중순.
천하제일 지주사의 주주총회에 다녀온 김철수 이사가 오후 한 시가 넘어서야 사무실로 복귀했다.
김이사는 예전 부인 수술비 때문에 주총꾼으로 활약하려 할 때 사놓은 주식 세 주를 아직도 팔지 않고 있어서 소액주주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안 팔았다기보단 못 팔았다는 게 옳았다.
성환이가 매년 주총 때마다 옵저버로 참석하고 오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매년 아무 이슈 없이 30분도 안 돼서 끝나 이른 점심을 같이 했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디 들렀다 오신 거예요?"
다소 지친 기색이 역력한 김이사는 힘겨운 듯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니, 천하제일에서 온 거야. 끝나자마자 왔어."
"네? 지금까지 했다고요? 몇 시간을?"
김이사는 힘에 부친 듯 고개만 끄덕였다.
"총회꾼이라도 온 거예요?"
"총회꾼은 아니고 대주주가 한따까리했어."
"대주주라뇨? 조인철회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최대 주주 말고. 지난달에 공시한 그분 있잖아. 정영태 교수."
"네? 정교수님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와 성환이 동시에 탄식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