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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25화 (125/191)

125화 공시

다음 주.

몇 주간의 장기출장에서 복귀한 원모가 오랜만에 정식으로 출근을 했다.

오랜만의 출근에 다들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반갑다. 그런데 일찍 일찍 좀 다니자. 지금이 몇 시냐?"

"네 대표님. 경찰서 다녀오느라고 조금 늦었습니다. 아! 별거 아니니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몇 가지 진술할 게 있어서요."

걱정 일도 안 했는데.

"그런데 너 설마 또 침 발라놓은 거 아니지?"

원모가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에이 대표님! 설마요. 여기 좀 보세요. 빠짝빠짝 마른 거 안 보이십니까?"

면전에서 정통으로 뽀큐 한 방 먹었다.

저 자식 천재임이 틀림없다.

"아이 자식아! 어디서 그걸 들어 보여? 너 설마 이제껏 그 손가락으로 지문인식 했었냐?"

"네. 그런데요? 혹시 무슨 손가락 하라고 정해진 게 있었습니까?"

우문에 현답이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깨끗한 몰골로 사무실로 돌아온 원모는 뭔가가 달라진 듯 보였다.

눈치 빠른 성환이 바로 알아차렸는지 원모에게 물었다.

"원모님. 여름옷이 두 벌이었어요? 지난번 그 옷은 어떡하구요?"

"운명했습니다. 심폐소생이 안 되더라구요. 빨아도 보고 삶아도 봤지만, 그 강아지 오줌이라는 게 한두 마리 것도 아니고 도저히 안 빠져서 그냥 버렸습니다."

합숙 들어가면서 바로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걸 집에까지 들고 와서 어떻게든 입어보겠다고 별짓을 다 했다니.

존경심마저 일었다.

"원모야. 그래 넌 정말 천하태평의 관리 담당답다. 회사 살림도 그렇게 악착같이 쥐어짜듯이 한번 해봐."

역시 원모 문자 그대로 칭찬으로만 알아들었는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역시 천재는 아닌 듯.

잠깐 오해했었나 보다.

점심시간은 한참 남았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며 밥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래도 예약 시간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남았다.

원모가 출근하기 전에 오랜만에 모두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해서 좋은 식당으로 예약까지 해 놓았었는데 그걸 모르는지 원모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것이었다.

"뭐야? 오늘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으니깐 점심같이 하기로 했는데, 못 들었어?"

"네? 점심이요? 전 오늘 가볼 데가 있는데요."

"약속 있는 거야? 어디 가는데?"

"네 근처에 노숙인들 나눔터가 있어서요. 일주일에 한 번 점심 배식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도무지 원모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단어라 귀를 파 보았다.

"뭐야? 내가 잘못 들은 거야?"

당연히 귀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게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무슨 말이야? 봉사라니……. 네가?"

"네. 제가요. 노숙자나 기초생활수급자들 대상으로 무료식사 제공하면서 식판에 밥이나 반찬 담아주는 거 있잖습니까?"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이유가 궁금하다고"

"봉사활동에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아니. 그러지 말고 대표님도 같이 가시죠. 봉사하면 당연히 식사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공짜 밥이라는 말에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 무더운 여름에 식당 안에서 진동할 땀 냄새, 강아지 오줌 냄새를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내가 봉사는 무슨? 너나 해라."

"오늘 오랜만에 다 같이 점심 같이한다고 안 하셨습니까? 그러지 말고 가시죠."

원모가 내 팔을 붙잡자 도와달라는 의미로 성환이와 김철수이사를 쳐다봤다.

금세 눈치챘는지 성환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하듯 말했다.

"아. 참 오늘 점심 거르고 운동하기로 했지? 어이쿠 늦었네. 빨리 가야지."

어색한 말 한마디 던지며 총알같이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성환아!"

불러봤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엘리베이터도 아닌 복도 문이 열리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23층에서 뛰어 내려갈 생각까지 하다니.

포기다.

이제 김철수이사 쪽을 돌아보자 마침 노트북을 끄고는 뚜껑을 덮고 있었다.

"천대표. 내가 오늘 후배들이랑 점심 약속한 거 깜빡 잊고 있었네. 미안한데 오늘 난 빠져야 할 듯해. 둘이서 맛있게 먹어."

"이사님!"

불러봤지만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대표님. 우리 둘 남았네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직접 배식 안 해도 다른 걸로 도와주셔도 되니깐요."

차라리 배식이 낫지.

설거지는 정말 최악이었다.

아무리 '좋은 일 하는 거야' '이건 봉사활동이야' '난 공동체에 기여하는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지만 정신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숙자들이 설마 밥이나 반찬을 남기겠어?'

'깨끗이 핥아먹어서 설거지할 게 아예 없겠지'라고 짐작했던 건 고정관념이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입맛, 취향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건 잔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생 끝에 한 식사는 변변치 않은 반찬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뭔가 대접을 받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봉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원모가 한마디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예의상이라도 '아니다 고생은 네가 했지'라는 말이 도저히 안 나왔다.

"물론 고생했지. 밥만 푸는 너랑은 비교가 안 되게. 내 인생에 설거지한 횟수보다 오늘이 더 많고 힘들었을걸."

"네 잘하셨습니다. 그럼 다음 주도?"

눈을 크게 뜨고 돌아봤다.

"죽는다. 한 번만 더 오자고 하면."

물론 뿌듯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 번 더 할 자신까진 생기지 않았다.

그럴줄 알았다는 듯 원모가 끄덕였다.

"네. 그럼 다음에 생각 있으시면 말씀 주십시오. 그때 같이 가시죠."

"알았어.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대신 올겨울에 구세군 냄비에 두둑이 챙겨 넣을게. 그냥 난 물질적으로 도울란다."

"네,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데 왜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아. 그거요. 지내다 보니깐 안타까워서요. 사회에 참여하고 싶지만 아무도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복귀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되더라구요. 봉사 활동하면서 그 사람들한테 관심 가져주고 하면 사회로 복귀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나름 정신적으로 성장한 듯 보였다.

"김만복씨는 어떻게 지낼 거래?"

"그분도 이제라도 마음잡고 살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도 찾아뵙고 새 출발 해 보겠다구요."

원모가 뿌듯한 마음인지 즐겁게 웃어 보였다.

"그럼 집에 돌아갔겠네?"

"네. 그러겠죠."

"그럼 가보자. 우리 가봐서 알잖아."

"그럴까요?"

바로 김만복의 어머니 집을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인기척이 났다.

역시 김만복의 어머니가 지팡이를 들고나와 힘겹게 대문을 열었다.

그러나 지난번 찾아왔을 때보다는 한층 밝아진 얼굴이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김만복씨 계십니까?"

"아 지난번에 왔던 공뭔 아닌 분들이구만."

우리 둘을 한 번에 알아보더니 아는 척했다.

"네. 맞아요. 김만복씨 집에 들어오셨죠?"

"일 나갔어."

"네? 일이라뇨?"

"글쎄 며칠 전에 누가 와서 일자리 주겠다고 했나 봐. 천하 어쩌고 건설이라던데. 현장 근무라는데 잘 기억은 안 나네."

"혹시 천하제일 건설이었나요?"

할머니가 지팡이를 쥔 채 손뼉을 쳤다.

"맞아. 거기."

"누가 왔는지도 기억하세요?"

할머니는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젊은 사람이 와서 누구한테 지시받았다면서 명함 주고 갔더라고. 만복이가 연락하니깐 일자리 알아봐 줘서 아침에 출근했어."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나오는 길에 원모가 말을 꺼냈다.

"조성환님이겠죠?"

"그러겠지."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까?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지난번에 네가 노숙 시작했을 때 자초지종 얘기하긴 했어. 그리고 주소는 등기부등본 봤으니깐 알았겠지."

원모의 표정을 보니 충성심이 한층 더 고취된 듯했다.

"아무튼 조성환님 다시 봐야겠네요."

그래.

나름대로 성환이도 봉사활동 하는 거다.

사람마다 각자 방법이 다를 뿐이지 마음까지 다른 건 아닐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역시 찝찝한 마음에 도저히 지문인식기에 손가락을 갖다 댈 수가 없었다.

벨을 누르자 원모가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털레털레 걸어 나왔다.

유리창 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자마자 기분이 상한 듯 내뱉었다.

"대표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미안. 도저히 손가락을 댈 수가 없어서 말이지."

"내일부터 안 열어드릴 겁니다."

보안 때문에 일부러 지문인식기 단 거니 카드로 교체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알았어. 내일부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시던지요. 화장실 안 가면 되니깐요."

유리문이 닫히고 사무실로 들어서려는데 바깥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스톱! 멈춰 멈추라고."

성환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뛰어오고 있었다.

이놈도 지문인식기에 손가락 갖다 대기 싫은지 문 열어달라고 하는 거다.

뒤돌아 조용히 웃어주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허 정말 이러시깁니까?"

유리창 너머에 서서 씩씩거리며 댓거리를 하자 원모가 차마 모른 척 들어갈 수 없었는지 문을 열어주었다.

어제 일로 한층 두터워진 충성심의 발로였을 거다.

아침부터 각자 컴퓨터를 켜놓고 김철수 이사는 인터넷 뉴스부터 뒤지고 성환이는 헤드폰 끼고 음악 듣는 등 나름대로의 루틴을 하고 있었는데 원모가 갑자기 발끈했다.

"모두 나가시죠."

"뭔 소리야? 출근하자마자 나가자니?"

"여기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만 있는다고 뭐가 나옵니까? 좋은 투자처가 알아서 찾아오겠냐고요?"

예전에 내가 쪼면서 하던 멘트인데 내가 들을 줄은 몰랐었다.

그것도 이놈한테서.

"뭐야 이 자식아. 이제 나를 쪼는 거야?"

내가 쫄 땐 따르는 척만 하고 빈둥대더니 완전히 달라졌다.

장기출장 덕으로 전세금을 지키게 된 것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장했나 보다.

회귀하고 나서의 나처럼 원모 역시 지금 주어진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기라도 한 모양이다.

"나간다고 방법이 있냐? 어디 나가서 누굴 만날지부터 계획해야지."

"네 그럼 우리가 투자해놓은 곳부터 전화 한 번씩 돌리시죠. 어떻게 지내는지 이슈는 없는지 선제적으로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 끝나기 무섭게 원모가 전화기를 들었다.

"정영균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조만간 대박으로 돌아올 YK의 정영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한 이슈는 있는지요? 실적도 궁금하고 분석도 해야 하는데 최근 재무제표 보내주실 수 있으실지요?"

"……."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몇 년 전 7천만 원을 투자해서 10%의 지분율을 가져갔는데, 회귀 전의 기억으로는 대박이 정해져 있으니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 이후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 더더욱 그랬었는데 원모 말을 들어보니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모가 두 번째 통화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태성대표님. 천하태평입니다."

"……."

"네. 요즘 하고 계신 사업은 있으십니까?"

인터넷라디오 사업을 시작했다가 예전 조윤경 남편인 안치홍 상무의 작업으로 천하제일에서 동일한 서비스 출시하면서 말아먹은 비욘드라디오 이태성대표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천하태평 최초의 실패작이었다.

5천만 원 투자한 거 그냥 시원하게 말아먹었다고 생각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는데 원모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심정으로 연락해 본 것이었다.

통화를 끊자마자 원모를 불렀다.

"비라 이대표가 뭐라고 하디?"

고개를 가로젓는 게 무슨 대답을 할지 예상케 했다.

"왜? 완전히 꺼진 불이야?"

"네, 일단은요. 그냥 단순 용역 수주받아서 연명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도 신규사업 추진하면 사업계획서 들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기다려보자고."

사업이란 게 언제 어떻게 해서 터질 줄 모르니 꺼진 불이라고 밟을 필요는 없다.

불씨가 살아나는지 가끔씩 지켜보기는 해야 한다.

원모가 전화를 끝마치고는 컴퓨터를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뭔가를 발견하고 놀란 듯 소리쳤다.

"와 대박! 뭐야 이게?"

"왜 그래? 뭐가 있어?"

"대표님. 전자공시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천하제일지주요."

천하제일이라는 말에 성환이 매우 놀란 듯 원모 자리로 뛰어갔다.

나도 따라가 원모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니 공시 건이 눈에 들어왔다.

공시 제목은 대량보유 상황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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