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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24화 (124/191)

124화 암호

핑거 스냅.

'딱'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뭐야? 벌써 스톤 6개 다 모은 거야?"

"뭔 소리래?"

성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영화가 개봉하기 전으로 회귀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니다. 근데 뭔데 그래? 설마 원모가 헛소리하는 거 알아들은 거야?"

성환은 으쓱대듯 어깨를 한껏 치켜올렸다.

"내가 누굽니까?"

몰라서 묻는 걸까?

"누구긴 누구야. 천하제일그룹 조회장님의 둘째 아들이자 천하태평의 2대 주주지. 그러고 보니 어딜 가나 넘버투구만."

그러나 성환은 예상과는 다르게 들이받거나 하지 않고 그저 조소하듯 웃어넘겼다.

"아. 네네……."

뭐 그 정도 조롱은 그저 웃어넘긴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원모가 무슨 소릴 한 건데?"

"좌표요."

"좌표라니?"

"원모님이 한 말을 떠올려봐요. 북위에 놓인 얼마 얼마, 동경 갔을 때 얼마 얼마."

북위, 동경.

헉! 정말 원모가 GPS 좌표로 자기가 있는 곳을 말해준 거다.

노숙자들이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합숙을 오래 하다 보니 그래도 만에 하나 혹시 연락이 안 되거나 하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까 봐 전화 한 통씩의 기회를 준 것일 거다.

물론 신고 같은 건 하지 못하도록 옆에서 지켜봤을 테고.

대충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원모 차례가 되어서 대포폰을 건네받자마자 전화번호 누르는 척하면서 빠르게 GPS를 켜서 위치를 확인할 다음 그 긴 좌표를 외우고 전화 걸어서 다른 말 하는 척하면서 불러줬다.

이놈은 정말 어리바리한 척하는 천재였단 말인가.

아무튼 원모를 다시 보게 됐다.

잠시 후 성환이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장소를 찾았는지 소리를 질렀다.

"찾았어. 여깁니다."

성환이 가리킨 곳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니 딱 적절한 곳이었다. 나름 머리 쓴 것이다.

인적이 드문 지방의 한적한 숲속에 숨어들었다면 여러 명이 들락날락하다가 누군가 수상하게 여겨 신고를 할 수도 있을 테니 오히려 사람 많고 왕래가 잦은 곳으로 잡은 것이다.

모두 지원자 중에서 선별한 사람들이니 도망갈 확률도 낮을뿐더러 주위 은행에서 대출상담받기도 편할 테고.

"그래. 가자."

"네? 가다니 왜?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우리가 뭐하러 가요?"

"조그만 건물이던데 몇 층인지는 알아서 제대로 신고하는 게 좋잖아."

"네. 그럼 대표님 혼자 가시죠."

"나보고 걸어가라고?"

운전해달라는 말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한 대 뽑아준다니까 그러네. 귀찮게 정말."

털털거리면서도 원모가 걱정은 되는지 차 키를 들고는 앞장섰다.

이십 분 정도 후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멀리서 차를 세우고 좌표로 찍어준 지점을 찾아보니 5층짜리 제법 큰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기분이 그래서인지 음습한 기운이 전달되는 듯했다.

누가 수상하게 볼까 봐 옆 건물에서 지켜봤다.

"자, 이쯤이면 들립니까?"

집중하면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대강 웅얼거림이라도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놈한테 내 능력치를 다 알려주면 안 된다.

앞으로 부탁하는 척하면서 이것저것 시켜 먹을 놈이기 때문이다.

"아니 멀어. 조금 더 가까이 가야겠는데?"

"에이, 이 정도도 안 들린단 말이야?"

급격히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공이다.

"저 앞까지만 가자."

"가다가 괜히 발각되기라도 하면 어떡할라고요? 그냥 신고하죠. 저 건물 어딘가에는 있겠죠."

"다시 옮겼을 수도 있고 혹시 모르는 일이니깐 그래도 확인은 한번 해봐야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오른쪽 골목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환이를 막아 세웠다.

"잠깐만. 누가 온다. 여기서 기다리자."

잠시 후 골목 코너를 돌더니 두 사람이 우리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주에 뒤를 밟았던 사기꾼 한 놈이 원모를 데리고 합숙소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처진 어깨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원모의 지친 기색을 보니 안쓰러워졌다.

갑자기 합숙 장소도 바뀐데다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하염없이 누군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게 꽤 고통스러웠는지 얼굴에 전부 드러나 있었다.

기지를 발휘해 위치를 알려주긴 했지만 내가 알아들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을 테니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을 거다.

성환도 원모를 발견했는지 놀라며 말했다.

"저기 저 사람 원모님 맞죠? 완전 깔끔해졌네."

정말 옷차림을 보니 부랑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장인처럼 보였다.

"맞아. 지금 은행 가서 대출상담받고 오는 길일 거야."

마침 원모가 우리 쪽으로 돌아봤다.

나는 발각되지 않으려 괜히 딴짓하는 척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 찰나의 순간에 원모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TV프로에서 전쟁 통에 헤어져 생사조차 모르고 살다가 수십 년 만에 가족과 상봉한 이산가족이 짓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다행히 사기꾼 놈이 눈치를 채지는 못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원모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원모가 단전으로부터 온몸의 기를 모으듯 끄윽하고 가래침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새끼야. 어디다 침을 뱉어?"

사기꾼 놈이 발끈하자 원모가 실실거리며 웃어넘겼다.

"헤헤. 죄송합니다. 습관 돼서 저도 모르게……."

"하여간 더러운 새끼. 개 버릇은 어디 못 준다니깐."

원모가 몇 주 동안 거리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젠 정말 노숙자 다 됐나 보다.

몇 층으로 가는지 따라붙어서 듣고 싶었지만 눈치챌까 봐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귀를 쫑긋 기울이니 3층까지 올라간 듯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들었어요? 몇 층 가는지?"

"3층이다."

건물 위 3층을 올려보자 태권도, 교습소, 학원 등 여러 간판이 보였다.

"저 중에 어디요?"

복도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르겠는데. 일단 가보자."

1층으로 들어서자 우편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노랗고 거무튀튀한 더러운 가래침이었다.

303호 우편함의 한 가운데에 끈적끈적 눌러 붙어있는 게 점성이 꽤 있어 보여 이틀 정도는 끄떡없이 안 떨어질 것 같았다.

"바로 저기다. 303호."

손을 뻗어 원모의 가래침을 가리키자 성환이 질색했다.

"뭐야? 드럽게 이게 뭐야?"

"이거 원모가 뱉은 거야. 들어가면서 우리한테 알려준 거지.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이라고 해야 하나?"

성환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손사래를 쳤다.

"뭐야? 빵 먹고 뱉은 거라고요? 에이 드럽게."

"너 설마 헨젤과 그레텔도 모르는 거야?"

"알아야 하나?"

성환이 말이 맞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건 없다.

필독 도서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선택의 권리를 빼앗은 것처럼 잔인한 말이니.

"아니다. 마녀, 빵조각 흘린 거, 하여간 뭐 그런 거 있어."

3층 복도에 올라가서 집중하니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원모를 데려간 사기꾼 한 명이 사장이란 자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사기꾼 두 명과 합숙 동원된 여러 노숙자들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됐다. 두 놈들 다 있는데 지금 바로 신고하자."

* * *

신고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연락을 기다렸다.

몇 시간이 흐르고 밤이 깊었지만 아무도 퇴근할 수가 없었다.

도리상 저녁 식사까지 걸러 가며 원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나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사무실 유리문 밖에서 누군가 퉷 하고는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삐리릭'하고 사무실 유리문이 열렸다.

원모다.

저 자식 하지 말라니깐 그새 또 손에 침 바르고 지문인식기에 갖다 댄 거다.

원모가 들어서서 사무실 쪽으로 몸을 틀자 시야에 들어왔다.

"야 이 자식아!"

"네? 아니 대표님, 왜 갑자기 욕을……."

반겨주지는 못할망정 첫마디로 욕을 내뱉다니 서운했는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야 이놈아 내가 지난번에 분명히 지문인식기에 침 바르지 말라고 했지?"

성환이 옆에서 기겁해서는 팔짝 뛰었다.

"뭐라고요? 아니 그럼 지금까지 매번 침 발라서 손가락 댔단 말야?"

원모는 머쓱했는지 입을 한차례 다셨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마르면 잘 안식이 안 되더라구요."

"알았어. 내일부터 난 출근하면 벨 누를 테니까 네가 나와서 문 열어."

성환이도 한마디 했다.

"저도요."

원모는 서운했는지 오리처럼 입을 삐죽 내뺐다.

"삐졌냐?"

"그럼 대표님 같으면 안 삐지십니까? 반갑게 맞아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끼리 이러실 수 있습니까?"

"알았어. 그럼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봐. 침 묻히지 말고 제대로 한번 들어와 봐. 반겨줄 테니깐."

역시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원모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후'하고 입김 부는 소리가 들렸다.

차마 침을 뱉을 순 없고 마른 손가락으로는 인식이 안 되니 촉촉하게는 할까 하고 입김을 불어댄 거다.

뭔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침 뱉은 건 아니니 또다시 욕을 할 순 없었다.

내일부턴 정말 벨 누르고 들어와야겠다.

잠시 후 원모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득의양양하게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스스로 해내고 말았다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김이사와 성환도 마지못한 듯 일어나 가세했다.

엄밀히 말하면 회사 일도 아니고 자기가 싼 똥을 자기가 치운 거지만 어쨌든 고생한 건 고생한 거고 결과까지 좋으니 박수 한 번 쳐주는 건 어렵지 않다.

돈 드는 것도 아닌 데다 손만 조금 아프지, 힘들다고 까진 할 수 없으니 그 정돈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원모야 저녁 먹으러 가자. 우리 다 저녁 안 먹고 너 기다렸어. 회식해야지."

"네 정말요? 역시 의리 하나는 알아준다니깐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뜨거운 거요."

"뭐? 뜨겁다니?"

"따뜻한 안주요. 매번 길바닥에서 소주에 참치, 깡통 같은 것만 먹어서 질렸습니다. 뜨거운 안주에 맥주 한잔하고 싶습니다."

"그럴까? 내가 근처에 해동 잘하는 참치 집 아는데 거기로 갈까? 넌 뜨거운 탕 시켜줄게."

"대표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알았어. 싸고 뜨거운 거 파는 덴 많으니깐 일단 나가자."

회사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고생한 원모한테 차마 가위 들고 고기 자르라고 시킬 순 없어서 서빙해 주시는 분이 모든 걸 해주는 집으로 향했다.

맥주 한잔 두잔 비우면서 몇 주간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노숙자들이 그냥 길바닥 아무 데나 자리 깔고 먹고 자는 줄로만 알았는데, 원모 말을 통해서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부대껴가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김만복씨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공범으로 몰리지 않겠어?"

"자기도 잘못한 거 알더라구요.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하고요. 어떻게 보면 피해자이기도 하니깐 큰 문제는 안 될 거 같습니다."

몇 주간 부대끼며 인간적인 교류를 하다 보니 많이 가까워진 듯 보였다.

"그럼 경매 나온 신혼집은 어떻게 되는 거냐?"

"네. 일단 그 둘이 공모해서 사기 친 거 입증할 수 있으니까 해결될 거 같습니다. 경매 취소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다행이네. 그럼 전세금 돌려받을 수 있는 거야?"

"돌려받으려면 소송이나 합의 같은 걸 해야 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어차피 저당권 자체가 무효가 되면 제가 일 순위가 되니깐 대항력 갖추는 데 문제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렇지.

어차피 대항력만 갖추게 된다면 그 집이 다른 사람한테 팔리더라도 새 집주인한테 전세금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설령 경매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앞의 저당권이 없어졌으니 전입신고하고 확정일자 받은 전세금이 일 순위가 되어서 낙찰대금에서 먼저 받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전세금보다 낮은 금액으로 낙찰받을 거 같으면 아예 입찰 들어가서 전세금만큼 써서 직접 받아버리면 그만이다.

"축하한다. 이제 진짜 신혼집 되네."

"네 감사합니다.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원모의 말에 진심이 느껴지면서 가슴 한 켠이 따뜻해졌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한마디는 절대 사소한 게 아니라 실로 엄청난 거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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