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잠적
며칠 뒤.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리셉션입니다. 잠깐 로비로 내려오셔야 할 거 같습니다."
"네? 로비는 왜요?"
"음……. 그냥 빨리 좀 내려와 보시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상대측은 말하기 곤란했는지 그저 내려오라는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걸음에 달려가니 웬 부랑자 한 명이 로비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고 보안요원 두 명이 가까스로 막아 세우고 있었다.
"23층 천하태평에서 왔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리셉션 직원이 손을 뻗어 행패 부리는 부랑자를 가리켰다.
"저기 저분이요. 계속해서 23층 그쪽 회사 직원이라고 우겨서요."
"네? 저 사람이요?"
가리킨 쪽을 자세히 보니 바로 원모였다.
며칠 전 멀리에서 봤던 모습과도 꽤 많이 변한 듯했다.
완벽한 거리의 부랑자 모습이라 그때 그 메이커 옷 상표가 아니었다면 절대 못 알아볼 뻔했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요. 저희 직원이 맞습니다."
상대방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직원분이 맞다고요?"
"네 맞아요. 출장 중이라 꼴이 조금…… 제가 조용히 데려가겠습니다."
흥분한 원모 팔을 붙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
"원모야 여기서 왜 이래? 사람 쪽팔리게."
"아니. 제가 우리 회사 사무실 가겠다는데 저 사람들이 말리잖습니까."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은데? 아니 나 같았으면 그냥 소금 한 바가지 뿌리고 경찰에 신고라도 했을 거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내리는데 원모를 발견하고는 홍해 갈라지듯 피해서 두 갈래로 걸어 나왔다.
원모 팔을 붙잡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역시 아무도 같이 탑승하는 사람이 없었다.
23층까지 올라가는 도중 세 번이나 멈추었으나 마찬가지로 원모를 보고는 아무도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잠시 후 시궁창 냄새가 풀풀 풍기더니 어느새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 가득 찼다.
"뭐야 이 냄새는? 한 번도 안 씻었어?"
"씻을 수가 있어야죠. 길거리에서 먹고 자는데."
23층까지 올라가는 그 일 분 남짓한 시간이 마치 영겁의 세월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드디어 도착한 천하태평 사무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지문인식기에 갖다 대려는 걸 가까스로 막아 세웠다.
이 자식 폼을 보아하니 평상시에 하던 짓 같았다.
"뭐 하는 짓이야? 찍지 마. 내가 할게."
"죄송합니다. 습관 돼서요."
지문인식기에 침 발라서 찍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원모가 바로 소파 쪽으로 직행했다.
"야! 앉지 마. 거기가 어디라고. 내 침대니깐 절대 앉지 마."
"대표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전 어디 갑니까?"
"네 자리로 가. 아니다 그냥 거기 서서 얘기해. 뭐하러 왔어?"
잠시 후 헤드폰 끼고 있던 성환이 갑자기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뭐야? 이게 무슨 냄새야? 화장실 넘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시궁창 냄새를 맡고는 뭔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린 거였다.
"원모 왔다. 너도 알잖아. 원모 며칠간 거기서 생활한 거."
성환은 오만가지 인상을 다 찌푸리고는 두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아니 옷만 지저분하면 됐지. 스멜은 뭐야 이거? 어디 똥 밭에 구르기라도 한 거예요?"
원모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똥 아니고 오줌입니다."
"뭐야? 화장실도 안 가고 오줌을 그냥 바지에 쌌다구요?"
"아니요. 제께 아니라 강아지 오줌이요."
"강아지라니?"
"네. 길에 누워서 잠 청하고 있는데 강아지가 한 마리 쓰윽 오더니 한 발을 들더라구요. 뭔지 몰랐는데 갑자기 따땃해지는 게 오줌을 싸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모야 그럼 강아지가 오줌싸는데도 가만히 있었단 말야?"
"처음엔 오줌싸는 건지 몰랐죠. 미쳐 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씻을 수도 없고. 그런데 조금 지나니깐 적응됐는지 냄새가 안 나는 거 같아서 그냥 될 대로 되라고 내비 뒀습니다."
"그건 적응이 아니라 마비 아닐까?"
"대표님 그런데 이거 아십니까? 엄청 편하다는 거요? 그게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깐 세상에 근심 걱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원모 말이 살짝 이해가 갔다.
속박, 굴레 같은 걸 벗어버린 것 같은 느낌.
어찌 보면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억압 같은 것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었을 거다.
그나저나 생각과는 다르게 전혀 홀쭉해지지 않고 오히려 볼살이 올라온 듯 보였다.
"뭐야 설마 밥 제때제때 다 챙겨 먹은 거야? 왜 하나도 살이 안 빠진 거 같지?"
"네. 시설이나 종교단체들이 무료 나눔을 많이 해줘요. 어떤 데는 후식으로 빵도 주고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그렇다.
노숙자도 고정적으로 거처할 곳이 없어서 그렇지 모두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니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은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김만복과 함께 밤마다 술까지 마셔댔을 테니 오히려 살이 더 쪘을 수도 있다.
"김만복하고 얘기 많이 해 봤어? 어떤 사람이야?"
"네. 생각보다 순진하더라구요. 심지어 똑똑해 보이기도 합니다. 술 마시면서 자기 자라온 얘기 많이 해줬는데 나름 구구절절 사연이 많더라구요."
"가정불화 뭐 그런 거?"
"네. 비슷합니다. 차츰 엇나가다가 교도소도 몇 번 들락날락하고 나서 아예 집에서도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지난번에 봤던 김만복 어머니의 회한에 잠긴 표정이 떠올랐다.
"게다가 지금은 건강 때문에 막노동도 못 나가고 있다고 하구요."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네. 그렇게 된 게 모두 본인의 노력 부족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많이 안타깝고 불공정한 것 같습니다."
옆에서 한동안 김만복을 지켜보더니 사기꾼 공범보다는 오히려 같은 피해자로서 여기게 된 것 같았다.
원모가 캠코더로 찍어놓은 영상을 틀었다.
화면 안에서는 역시나 며칠 전 사기꾼 일당에게 제안받은 대로 김만복이 많은 노숙자를 꾀고 있었다.
자랑삼아 늘어놓는 말에 주위에서 어디서 돈이 나서 그렇게 자주 술 사다 먹냐 물었고 김만복은 이제 곧 다시 돈 벌 기회가 있으니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상대방들의 표정에선 범죄에 쓰일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단 돈 좀 쥐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있는 것 같았다.
한편 다른 영상에선 교육과정까지 담겨 있었다.
대출심사 받을 때 은행직원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서류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사기꾼들이 가르치는 장면도 나왔다.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이 필요한 사람들로 추려야 한다는 사기꾼들 말이 이해가 갔다.
"벌써 합숙 시작한 거야?"
"아직이요. 간단한 교육 먼저 받은 거고, 며칠 뒤부터 일주일 동안 합숙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하는지는 알고?"
"네. 그놈들 사무실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성환과 따라붙은 적이 있으니 합숙 장소를 알고 있고 이제 증거자료까지 모아놨으니 경찰에 신고해서 현장을 덮치기만 하면 된다.
"원모야 수고했다. 이만하면 괜찮은 거 같은데?"
"네. 대표님 그리고 합숙 들어가면 저 못 나오니깐 꼭 와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지난번에 성환이랑 가봤으니까 어딘지 알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서 급습하면 되니깐 그건 걱정하지 말고 넌 계속해서 확실한 증거들 더 찍어놓고 있어."
원모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쪽팔린 마음에 로비까지 배웅해주지는 못했다.
성환은 원모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을 열고는 페브리즈를 뿌렸다.
아니, 한 통을 다 부어버렸다.
하지만 시궁창 냄새를 모두 가릴 수는 없었는지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다.
* * *
오후에 바로 증거자료를 가지고 바로 경찰서를 찾아 신고했다.
주소와 함께 증거자료를 건네주고는 담당 형사로부터 조만간 합숙 현장을 급습하겠다는 다짐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신고한 후로도 며칠이 흘렀지만, 경찰서는 물론이고 원모에게서조차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사님. 지난번 저희 신고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형사님도 그렇고 거기 들어가 있는 우리 직원한테도 아직 연락이 없어서요."
"아 그 전세대출 사기 건이요? 그렇지 않아도 알려주신 주소로 며칠 전에 탐문 가봤는데 아무도 없던데요?"
"네? 아무도 없다니요?"
"말 그대로 벌써 잠적했는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철저히 수사하고 있으니깐 너무 걱정 마시고 연락 기다려주십시오."
벌써 내뺐다니.
원모가 합숙 장소를 잘못 알았거나 갑자기 장소를 바꾸기라도 했나 보다.
걱정스런 맘에 성환이를 앞세우고 바로 그 현장을 찾았다.
역시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건물 밑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성환이도 슬슬 걱정되는지 물었다.
"2층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까?"
"어. 아무도 없나 본데? 직접 가서 확인해보자."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자 아무 간판도 없이 철제문 하나가 있었다.
철제문의 손잡이를 돌리자 덜컥 소리가 나더니 문이 그냥 열렸다.
불안한 기분이 맞아떨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인적은커녕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야반도주를 했는지 가져가지 않은 물품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형사 얘기가 맞나보네요. 이놈들 벌써 떴는데?"
"그러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무슨 단서 같은 거라도 있는지 찾아보자."
"에이. 단서가 있으면 이미 형사들이 찾았겠죠."
"무슨 CSI인 줄 아냐?"
성환은 드라마로만 봐서였는지 실상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권력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언론의 힘을 빌려 사회적으로 큰 이슈화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찾아서 형사들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많은 사건들이 그저 미제사건 캐비넷에서 잠자게 될 것이라는 걸.
"그러지 말고 너도 직접 찾아봐. 혹시라도 주소 같은 거 적힌 게 있는지."
한참을 뒤적이며 다 들추어봤지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사기꾼들 검거는 둘째치고 오히려 이제는 원모의 안위마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괜히 사지로 몰은 게 아니냐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내 마음 알기라도 하듯 성환이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모님은 별일 없을 겁니다. 몇 주간 샤워는커녕 옷 한번 갈아입지도 않고 노숙까지 한 사람인데요."
그러고 보니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일까지 하는 걸 보면 엄청나게 강인한 멘탈이라는 얘기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 무사하기만 하면 되지. 그까짓 전세금이야 뭐 돈 벌어서 메우면 그만이니깐.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겠지."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고도 연락이 없자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형사한테 전화를 걸어도 역시나 기다리라는 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거기다 성환이와 김철수 이사의 인맥을 통해 청탁 비슷하게 시도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도 며칠 후.
전화는커녕 광고 문자 한 번도 오지 않은 내 전화기가 울렸다.
성환이는 물론이고 김이사까지 모두의 관심이 나의 전화기로 집중됐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원모라는걸 직감할 수 있었다.
스피커폰을 켜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원모냐?"
"어! 엄마. 나야."
목소리는 원모가 확실한데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무슨 소리야 엄마라니?"
"엄마 잘 지내시죠? 십 년만이네. 다음 주에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돈 많이 벌어서 갈게."
또 묻는 말이 아닌 딴말을 했다.
이제야 위장 전화란 걸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누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거야?"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맞다고 대답한 거다.
이어서 원모는 또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놨다.
"나 어렸을 때 엄마 지갑에서 몰래 돈 훔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금액까지 똑똑히 기억해. 엄마가 아끼던 북이었지. 그 위에 37만 5,360원 있었을 거야. 그거 내가 훔쳤어."
십 원 단위까지 말하고 기억하고 있었다니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원모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맞아. 그때 엄마 동경 갔을 때 장롱에 있던 돈도 내가 훔쳤어. 127만 7,580원이었을 거야. 미안해 엄마. 내가 다음 주에 다 갚을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끊을게. 엄마. 다음 주에 봐요."
뚜뚜뚜뚜.
정말 끊었다.
무슨 개소리일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나 성환은 뭔가 깨달았는지 손가락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