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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22화 (122/191)

122화 사기단

잠시 후.

그 남자는 자기 얘기가 아니란 걸 알고 경계심을 거두고는 이야기로 돌아갔다.

원모가 기지를 발휘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확인한 거다.

역시 자기 돈과 관련되어 있으니 본인의 전투력 이상을 발휘하나 보다.

그러나 원모가 그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한 팔로 막아 세우고는,

"지금 뭐 하는 거야?"

"김만복이 맞으니깐 물어봐야지 않습니까?"

"너 같으면 협조하겠냐? 설령 협조한다고 해도 진짜 범인들 혐의를 입증할 수 있겠냐고? 저 사람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일 수도 있잖아. 괜히 접근했다가 진짜 사기꾼들 다 놓칠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어떻게 하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만 한다.

"예전에 성환이 쫓아다니던 놈한테 뺏은 볼펜 캠코더 있지?"

"네. 회사에 있습니다."

"됐다. 그럼 내일부터 그거 차고 김만복한테 접근해. 그 사기꾼 놈들이랑 다음 주에 만난다고 하는 거 들었지? 김만복한테 그놈들을 소개받으라고."

"절 뭐하러 데려가겠습니까? 잔뜩 경계할 텐데요?"

"언더커버 몰라?"

"네?"

"네가 노숙자행세를 하면 되잖아."

"제가 어떻게요?"

원모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는 한마디 했다.

"아무리 봐도 별로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예전에 영화배우들도 배역 때문에 서울역에서 같이 노숙했다고들 했었잖아. 너라고 못 할 게 어디 있냐고?"

"그런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설마 자기도 영화배우처럼 생겼다고 오해라도 한 것 같았다.

"전세금 건지고 싶으면 무슨 방법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범죄혐의를 찾아서 사기죄로 고소해야지 찾아올 가능성이라도 있지. 게다가 겨울도 아니고 여름이니깐 얼어 죽을 염려도 없고."

"그치만, 냄새는 더 심할 텐데요?"

원모 말이 맞다.

여름엔 하루만 샤워를 건너뛰어도 땀내 때문에 숨 한번 들이쉬기도 곤란한데.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을 씻지도 않은 사람들과 부대낄 걸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냄새야 내가 맡을 건 아니니.

"원모야. 전세금 몽땅 날리는 거에 비하면 그게 고통이겠냐? 땀 냄새 좀 못 참았다고 눈앞에서 2억을 몽땅 날려버리면 평생 후회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얘기가 맞는지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조용히 지갑에서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서 건넸다.

"참치랑 햄, 소주 몇 병 사 들고 가서 접근해 봐."

원모가 지폐를 받아들더니 쫙 펴서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대표님 요즘 참치가 얼만지 모르십니까? 이걸로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자기는 돈 쪼금 아껴보겠다고 계란말이도 안 시켜준 놈이 남의 돈은 아낄 줄 모른다.

그래도 고생하러 간다는 생각에 만 원짜리 두 장을 더 꺼내주었다.

"알았어. 만두도 사 먹어라."

꺼내기가 무섭게 확 낚아채 갔다.

이놈 스타일을 아는데 아까 3만 원은 자기 주머니에 넣을 거고 이 2만 원으로 바로 옆 편의점 말고 옆 동네 마트까지 가서 사갈 놈이다.

"원모야.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제일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거 잊지 마."

설마 지금 걸친 것보다 더 허름한 옷이 있을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마디 던져봤다.

원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남방 주머니에 새겨진 상표를 집어서 보여줬다.

"메이커긴 한데 그래도 오래 입었으니깐 갈아입는 것보단 나을 거 같은데요."

언제부터 그 브랜드가 메이커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메이커라는 게 상표라도 있는 옷을 뜻하는 것이라면, 원모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괜히 그 옷 아낀다고 집에 가서 갈아입고 나오면 버스비가 더 들 것도 같아 그냥 그러라고 고갯짓해 주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원모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혹시나 발각될까 봐 전화도 걸지 못하겠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대표님. 접니다."

"원모냐? 괜찮아? 며칠 동안 연락 한번 없어서 걱정했잖아. 핸드폰도 안 들고 간 거야?"

"네. 괜히 들고 가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요. 지금 틈 봐서 공중전화로 한 겁니다."

나름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다.

매일 휴대폰만 붙잡고 살던 놈이 휴대폰 없이 하루도 답답해서 못 견뎠을 텐데 절박한 마음은 정말 많은 것을 가능케 해준다.

"김만복한테 접근했어?"

"당근이죠. 제가 누굽니까?"

역시 노숙자와 잘 어울리는 놈 아니면 노숙자가 될 준비를 모두 끝마친 놈?

뭐라고 답해줄까 잠시 고민했다.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오늘 오후에 누가 김만복을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사기꾼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래? 알았어. 그 사람 지금 어딘데?"

"네. 며칠 전에 술 마시고 있었던 그 자립니다."

기동성이 필요하여 성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같이 길을 나섰다.

"원모님 며칠 동안 안 보이던 게 노숙자 무리에 낀 거라구요?"

"그렇지.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성환은 감탄한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를 몰고 근처에 도착하자 역시 지난번 그 자리에선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 세워! 저기다."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는 그쪽을 주시했다.

"저기라고요? 이상하네. 원모님이 안 보이는데?"

원모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동화된 듯 노숙자 무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서 성환이가 알아채지 못한 거다.

나도 며칠 전 원모가 자랑한 옷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저기 메이커 옷 입은 사람이 원모잖아."

"메이커라뇨? 원모님이요?"

두 사람이 생각하는 메이커의 간격은 매우 컸다.

"저기 왼쪽에서 세 번째, 안 보여?"

손을 뻗어 알려주자 성환이도 이제야 알아챈 듯.

"아! 저 옷 맞네. 원모님 여름옷."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여름옷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남이 무슨 옷을 입든지 전혀 신경을 안 쓰긴 했지만 성환이 말을 들으니 왠지 원모가 여름 내내 저 옷만 입고 있었던 거 같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 며칠 사이에 저렇게 변합니까?"

멀리서 봐도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게 보일 정도로 원모는 거적때기를 걸친 넝마꾼이 다 되었다.

때마침 무리 중 한 명이 뭔가를 발견한 듯 갑자기 일어났다.

김만복이다.

차 한 대가 근처에 서고 정장 입은 남자 한 명이 내리자 그쪽으로 마중 나가는 것이었다.

귀를 쫑긋 기울이자 성환이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헉! 뭐야? 여기서도 들린단 말야?"

"너만 닥치면."

"그게 가능해?"

"닥치라니깐!"

성환은 그냥 놀란 것 가지고 욕먹은 게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괜히 신경질이야. 신기해서 그랬구만."

남자와 맞닥뜨린 김만복이 다짜고짜 물었다.

"저기 실장님. 저 일 한 번만 더 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들인 노력에 비하면 제법 쏠쏠하긴 했었나 보다.

말투에서 남에게 피해를 줬다는 죄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측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넌 안돼. 이미 한 번 써먹어서."

"그럼 다른 일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해줘야 할 일이 있긴 한데……. 주변 사람들을 모아 봐 봐. 잘 설득해서 우릴 도와주게 만들면 섭섭지 않게 챙겨줄게."

"네. 알겠습니다."

김만복은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개별적으로 여러 사람을 설득하는 건 번거롭기만 할 테니 손 안 대고 코 풀라고 하는 거다.

"다음 주까지 여기 사람들 있는 데로 한번 모아봐."

재미 한번 보더니, 간덩이가 커졌는지 이젠 크게 한 건 제대로 잡으려는 모양이다.

김만복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더니 남자가 차에 올랐다.

성환이에게 손짓했다.

"저 차 따라가."

그러나 성환이 출발할 생각을 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차 좀 사시죠. 왜 매번 나한테."

"나 운전 싫어한다."

"누군 운전 좋아하는지 아나? 그렇게 운전이 싫으면 기사를 두던지."

"너 있는데 뭐하러?"

"그러지 말고 내가 차 한 대 뽑아드릴게요. 굴러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자기 운전시킬 바엔 그냥 차 한 대 사주고 말겠다는 거다.

"이왕 쓰는 거 그냥 기사까지 붙여주지 그러냐?"

성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불이라도 뿜을 듯 노려봤다.

남자가 차를 세운 곳은 서울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허름한 주택가에 간판도 없는 사무실이라니 왠지 불법적인 냄새가 폴폴 풍겨오는 듯했다.

건물 안 사무실로 들어서더니 잠시 후 2층에서 문이 열리고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인데도 에어컨을 안 켜놓았는지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서 건물 밖이지만 2층 사무실 안에서의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성환이 감탄한 듯 한마디 했다.

"여기서도 들려요?"

"닥치라니깐."

귀를 쫑긋 집중하니 사무실 안에 누군가 한 명이 더 있었는지 둘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놈한테 얘기했어?"

"네. 자기가 먼저 한 건 더 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잘됐네. 되도록 사람 많이 모아놓으라고 했지?"

"네.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얼마나 판을 키우려고 사람을 그렇게 많이 모읍니까?"

"전세대출 신청하면 은행 심사도 받아야 하니깐 아무한테나 시킬 순 없잖아. 그놈들 중에서도 직장 경험 있고 배운 놈들 위주로 추려야 하니깐 일단 많이 모아놔야지."

"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나저나 경매는 어떻게 하죠? 행여 낙찰가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손해지 않습니까?"

원모 전셋집을 얘기하는 것일 거다.

역시 이 두 놈 중에 한 명은 기존 집주인이고 다른 한 명은 새로운 집주인인 김만복한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고 경매신청한 놈이다.

두 놈이 짜고 친 사기다.

"괜찮아. 아는 경매 학원 통해서 작업 중이니깐 눈먼 놈들이 알아서 높은 금액 쓸 거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김만복에게 빌려줬다고 한 2억은 저당권자에게 우선권이 있지만, 낙찰가가 2억 아래로 떨어지면 그만큼 손해 아니냐고 물은 거다.

사장은 경매 학원을 통해 다른 호구를 붙여서 2억 넘게 쓰게만 한다면 그 돈 모두 자기들이 챙길 수 있다고 답한 거다.

세상은 이렇듯 온통 호구 하나 잡아서 벗겨 먹으려는 사람들투성이다.

사실 모르면 당하는 거다.

모르면 욕심이라도 없던가.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돈을 벌려는 욕심이 있다면 그에 상응한 최소한의 상식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탐욕만 있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탐욕이 있는데 공부까지 많이 한 다른 사람한테 털리는 게 이 정글 같은 세상의 법칙이다.

대화를 듣자 하니 그놈들은 노숙자들을 섭외하여 전세자금대출 사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허위로 사업장을 내고 위장취업 시켜서 4대 보험까지 가입하게 한다는 등 시나리오가 매우 치밀하고 현실감 있는 게 충분히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한참을 듣고 있자 답답한 듯 성환이 물었다.

"대체 저놈들이 뭐라고 합니까?"

세상 귀찮아졌다.

잠깐 기사 노릇 시키려고 불렀더니 오히려 내가 통역해주게 생겼다.

"전세자금대출 사기 치려는 거 같은데?"

"전세자금대출이요?"

"응. 지난번 원모 건과는 완전 사이즈가 달라. 독립영화 하나 성공시키더니 바로 블록버스터 찍으려는 거지."

"뭔 소리예요?"

"노숙자들 섭외해서 그 사람들 명의로 주택전세자금 대출받게 한 다음에 그 돈 빼돌리는 거야. 소득이 낮은 무주택자들에게 낮은 금리로 전세보증금을 대출해주는 정책 금융을 털겠다는 거니 결국 나랏돈을 챙기겠다는 거랑 마찬가지지."

"노숙자들이 그런 몰골로 어떻게 대출을 받는다고?"

"다음 주에 몇몇 추려서 합숙 훈련 시킨다고 하니까 목욕도 시키고 깨끗한 옷도 챙겨주겠지. 은행 가서 대출 상담하고 승인까지 받으려면."

"노숙자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하지. 그들 중에서도 교육 수준 높고 꽤나 똑똑한 사람도 많을 거야. 단지 사업에 실패하거나 질병에 노출되거나 가족과의 관계 때문에 바닥까지 떨어졌을 뿐 애초에 저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을 테니깐."

성환은 어느 정도는 이해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회귀 전 기억으로는 조성환 저놈은 사람이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냐 하는 것까지도 본인의 노력이고 경제적 격차는 순전히 본인이 어떤 노력을 하였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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