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김만복
물론 원모가 대여금을 안 갚는다고 해도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원모에게 지급할 배당금에서 까버리면 그만이다.
배당이 아니라면 유상감자 즉, 적정대가를 지불하고(실제로는 대여금과 퉁 치고) 원모 지분을 소각할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내 돈을 주고 원모 지분을 사되 그 돈을 회사에서 넣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원모도 지금 그걸 모르고 하는 얘기는 아닐 테고 그저 결연한 의지 한번 내비친 것일 거다.
이쯤 되면 남 일이니, 뒷짐 지고 구경만 할 분위기는 아닌 듯.
더군다나 원모는 천하태평의 5% 주주이기도 하니 선장인 내가 같은 배를 탄 선원을 모른 척할 수만은 없지 않나.
같이 힘을 합하지 않는다면 목적지인 아틀란티스에 도달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알았어. 원모야. 내 일인 것처럼 도와줄게."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감사합니다."
"네가 충당금 쌓으라고 협박했다고 내가 물러선 게 아닌 건 알지?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거?"
"네.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큰일을 해야 하니깐 어려운 건 같이 힘을 합해서 극복하자고."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원모의 표정과 말투를 미루어봤을 때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밥을 사겠다고 하다니.
원모를 처음 본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어디 아프냐? 그렇게 속상한 거야? 평생 듣도 보도 못한 말을 하질 않나."
"아프긴요. 평상시 대표님 말씀대로 경제적 의사결정을 한 겁니다. 2억을 구할 수 있다는데 그깟 만 원짜리 한 장 아깝겠습니까?"
"그래? 그럼 좀 더 쓰자. 십만 원 한 장도 안 아깝지 않을까?"
"네? 쫌!"
"알았어. 만 원 콜. 가자, 배고프다."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저만 따라오시죠."
기분이 한결 나은지 좁은 골목 사이를 헤집으며 씩씩하게 앞장서 갔다.
그러면 그렇지.
원모가 데려간 곳은 광화문 근처 뒷골목에 자리한 김치찌개 집이었다.
그래도 나름 유명하다는 집에는 데려왔다.
물론 이 집의 시그니처인 계란말이 없이 김치찌개만 먹는 건 처음이었지만.
나의 도움이 이 녀석한텐 계란말이 한 접시의 가치도 안 된다는 자괴감은 들지 않았다.
원모는 본래부터 이런 스타일이었으니깐.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할 겸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오 분도 안 돼서 후회가 밀려왔다.
점심 먹으러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과 빼곡한 건물 냉방장치, 그리고 도로 위 가득한 자동차가 내뿜는 열기로 숨 한 번 들이마시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원모야. 더워죽겠다. 택시 타고 가자."
"거의 다 왔습니다."
"그럼 버스라도 타면 안 될까?"
"다 왔다니깐요. 겨우 한 정거장 남았는데 버스비가 아깝지도 않으십니까?"
물론 아깝긴 하다만, 더위 먹고 매연까지 들이마시는 것보단 차라리 한 정거장이라도 버스 타는 게 훨씬 낫다.
"버스비 내가 낼게. 됐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모가 손을 뻗어 소리쳤다.
"저 버스 타시지 말입니다. 서울역 갑니다."
그 순간 내가 이놈과의 치킨게임에서 진 것임을 깨달았다.
이놈은 서울역 가는 버스가 오는 걸 보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먼저 타자고 하면 자기 교통카드로 찍을까 봐 내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있다.
교통카드를 대거나 돈통에 현금을 집어넣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내가 먼저 버스에 올라 지갑을 열어보고는 원모 쪽으로 돌아봤다.
"오우 이런! 카드가 없네. 만 원짜리만 있고. 어떡하지 원모야?"
내가 생각해도 연기가 나름대로 괜찮았다.
약간의 주춤거림도 없이 자연스럽게 멘트를 날렸다.
원모는 '그러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하듯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버스 기사님께 말했다.
"두 명이요."
기사님이 다인승 버튼을 누르자 2인 요금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는 원모가 씨익 웃었다.
갑자기 내 지갑을 낚아채더니 바로 카드단말기에 갖다 댔다.
'삐릭'하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
"어? 대표님 지갑에 카드 있었나 본데요?"
내가 졌다.
지독한 놈.
난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지갑 안쪽에 있었나 보네. 다행이다."
정류장에 내려 지하철 역사로 내려갔다.
여기저기 신문지를 깔고 많은 노숙자들이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낮에는 밖에서 활동하는지 지하철역 지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봤지만 도통 눈에 띄질 않았다.
지나칠 때마다 고개 돌려 외면하기 바빴기 때문에 주로 어디에 모여있는지 기억을 못 한 건가?
원모도 이상했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대표님 도저히 못 찾겠는데요?"
"그러게. 서울역 오면 많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우리나라 경제가 좋아지기라도 했나? 도통 보이질 않네."
"여름이라서 그러지 않을까요?"
그래.
겨울처럼 추위를 피해 지하로 들어올 필요가 없이 여름엔 그저 따뜻한 아스팔트 바닥을 침대 삼고 살랑바람을 이불 삼아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원모야. 그럼 겨울에 다시 올까?"
"대표님. 그땐 아마 제가 여기서 신문지 덮고 누워있을 겁니다. 그때쯤이면 경매도 끝날 테고 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겠죠."
"에이. 네가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보고만 있겠냐?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해. 라꾸라꾸 침대 정도는 내가 하나 사줄게."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눈에 흰자를 띄우고는 흘겨봤다.
"그럼 어떻게 하냐? 노숙자 코빼기라도 보여야 김만복이라는 사람을 아는지 물어볼 수라도 있을 거 아냐."
"근처 한 바퀴라도 돌아다녀 보시죠. 지하철역엔 없더라도 어쨌든 이 동네에 흩어져있지 않겠습니까?"
뙤약볕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땀으로 빨래라도 한 듯 셔츠가 완전히 젖어 몸에 쩍쩍 들러붙었다.
그만 포기할까 했을 때 마침 골목 어디선가 한눈에 봐도 노숙자처럼 보이는 무리들이 삼삼오오 내려오는 게 보였다.
배를 앞으로 쭉 내밀고 팔을 휘젓는 걸 보니 방금 밥이라도 먹은 모양이다.
내려온 쪽으로 올라가 보니 언덕 위에서 노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봉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저기다. 무료급식소 있나 본데?"
"네. 저기 가서 물어보는 게 좋겠네요."
원모가 급한 마음에 앞장서서 걸어 올라갔다.
수녀님들이 질서정연하게 식사 줄을 세우고 있다가 원모를 발견하고는 손짓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줄 서시면 됩니다."
당황한 원모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다가 잠시 후 자기가 노숙자 취급당했다는 걸 깨닫고는 삿대질을 하며 쏘아붙였다.
"아니 뭐라구요? 제가 노숙자처럼 보여요?"
저놈 몰골을 보아하니 솔직히 그렇게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은데.
그러나 수녀님은 기분 나쁜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내보였다.
"네. 여기는 노숙인분들뿐만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자 분들께서도 많이 찾으십니다. 식사 안 하셨으면 하시고 가시죠."
버럭 화부터 낸 게 미안했는지 원모도 한층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저희 방금 식사 많이 했습니다."
"그럼 무슨 일로?"
"혹시 저희가 이 동네 노숙하고 계신 분 중 누굴 좀 찾을 수 있을까요?"
"저희는 식사만 제공드리지 개인신상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으니, 원모는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
"대표님. 여기 사람들 많이 있으니깐 흩어져서 물어보시죠."
물어보려면 최소한 얼굴은 마주 봐야 하는데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멀찌감치 돌아가곤 했었는데, 차마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눌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원모 눈앞에서만 사라지면 된다.
"그럴까? 그럼 넌 여기서 시작해. 난 다른 급식소나 쉼터 같은데 찾아보고 거기서 시작할 테니깐."
그러나 원모는 내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됐고요. 대표님이 저쪽부터 하십시오."
원모가 가리킨 사람은 노숙자 레벨이 있다면 최상위 레벨인 듯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한여름인데도 겨울옷을 걸친 것마냥 꽁꽁 싸매고 있었다.
지하철 역사에 누워있었다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 머리맡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저분은 네가 하면 안 될까?"
원모 쪽으로 돌아봤으나 이미 사라졌고 다른 쪽에서 노숙자를 붙잡고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최상위 레벨 남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내 쪽으로 돌아봤으나 대답 없이 눈은 그저 하늘을 향해 있었다.
"혹시, 김만복씨라고 아십니까? 여기 근처에서 꽤나 오래 계셨다고 들었는데요."
역시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손을 내밀었다.
"오백 원."
알려주는 대가로 오백 원을 요구한 건지 아니면 그냥 오백 원을 달라고 한 건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갔다.
"김만복씨라고 아시는 거죠?"
조용히 턱짓했다.
긍정의 표시다.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자 헤헤 입을 벌리고 웃으며 낚아챘다.
추노에서의 성동일 이빨보다 누렇고 시커먼 걸 보니 이분은 수십 년 동안 매일 썩은 바나나 우유로 가글을 해온 모양이다.
오백 원을 거슬러 받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버렸다.
물론 돈도 없을 테지만 설령 거슬러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건네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복이 알지. 우리 집에 있었는데."
첫 번째 시도에 낚다니.
쌔뻑 죽인다.
"그래요? 그럼 지금도 같이 사십니까?"
"지금은 아냐. 엄니가 몸보신한다고 잡으려 할 때 도망갔어. 실은 내가 풀어줬지."
똥개를 말한 거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키우던 개를 탕으로 끓이는 그런 야만의 시대를 보냈었다.
그나저나 나가리다.
괜히 천 원만 날렸다.
먼저 들어나 보고 건네줄걸.
한편 원모는 무슨 좋은 정보라도 캤는지 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알아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었지만 따질 분위기는 아니었다.
"저 사람 중에 있단 말야?"
"그건 아니구요. 만복이란 사람 요즘 어디서 돈 좀 벌었는지 매일 같이 술 사다 먹는다고 하더라구요. 그 사람이 맞는 거 같은데요?"
"종전 집주인이 돈 좀 챙겨줬을 테니 맞겠지? 그런데 그 사람을 어디 가서 찾지?"
"염천교 근처에서 매일 술 마신다고 합니다."
나올 때는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수준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진행됐다.
그 사람 나름 이 바닥에서는 셀럽 같은 존재인 듯.
"그래. 염천교 쪽으로 가보자."
원모가 말한 곳에는 정말 노숙자들이 꽤 많이 모여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배를 까고 더위를 식히며 낮잠을 자고 있었고 어떤 무리는 동그랗게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먹는 장소와 안주만 달랐지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왠지 저 일행 중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원모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지만, 다행히 우리에게 경계심을 갖는 것 같진 않았다.
남들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오로지 자기들 얘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병을 들고 있는 게 오늘의 호스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이라니깐. 신분증만 있으면 된다고."
"에이 그럴 리가."
"속고만 살았나? 신분증 빌려주고 사인 한 번만 해주면 된다니깐."
"그거면 되는 거야?"
"그래. 그거면 나처럼 이렇게 매일 술 사다 먹을 수 있어.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으니깐 내가 얘기 잘해 놓을게."
정황상 우리가 찾는 김만복씨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이름을 물어볼 수도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원모가 내 쪽으로 돌아보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만복이던가요? 아까 그 형씨가 만복이라고 했죠?"
원모는 주위에 다 들리도록 특히나 만복이란 이름을 크게 강조해서 말했다.
"만복이라니?"
"아까 그 아저씨가 키우던 강아지요."
그러자 자랑삼아 떠들고 있던 그 남자가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경계하듯 째려봤다.
분명 그 남자가 김만복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