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배 째라
원모는 고개를 숙인 채 울먹였다.
비록 이미 살림을 차렸다고는 해도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인데 신혼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으니 생각만 해도 울음을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인생의 새 출발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삐긋거리다니.
제때 수습하지 못한다면 결혼하자마자 이혼당한 나 못지않게 큰 상처를 받을 게 뻔하다.
그런데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건 한마디로 전세금보다 빨리 담보를 잡은 채권자 즉 빚쟁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천하제일에서 재무 짬밥만 십 년도 넘는 데다 지금은 천하태평에서 혼자 관리 담당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계약을 했다는 게.
"뭐야? 너 설마 계약할 때 등기부등본도 안 봤다는 거야?"
"안보긴요. 계약할 때는 물론이고 잔금 치렀을 때도 재차 확인해봤습니다. 그땐 분명히 을구에 아무것도 기재되지 않았었거든요."
등기부등본이란 부동산에 대한 권리관계와 현황이 나와 있는 공적인 장부로서 갑구와 을구로 구성되어 있다.
갑구에는 소유권이, 을구에는 저당권, 전세권 같은 소유권 이외의 권리 등이 기재되어 있다.
즉, 이 부동산이 누구 소유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등기부등본의 갑구에 기재되어 있는 소유권자를 확인하면 되는 것이고, 이 부동산에 누가 담보를 잡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을구에 기재되어 있는 저당권자를 확인하면 된다.
원모 말대로라면 갑구의 소유자는 집주인이 맞는 데다 을구에는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으니 계약 당시는 물론이고 입주할 때까진 담보로 잡힌 게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 동사무소 가서 전입신고하고 확정일자 안 받았다는 거야?"
"대표님. 제가 자취 생활 몇 년인데 설마 그런 것도 안 해놨을라구요? 잔금 치르고 이사하는 날 바로 동사무소 뛰어가서 했습니다."
등기부등본의 을구도 깨끗하고 전입신고에 확정일자까지 받았다면 세입자로서는 빠뜨린 거 없이 할 거 다 했다는 얘긴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럼 경매를 누가 신청했다는 거야? 등기도 안 한 사람이 했다는 얘기야?"
원모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등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하는 날 뽑아봤을 땐 없었다며?"
"통지서 받고 확인해보니깐 제가 잔금 치르고 전입 신고한 날에 등기된 게 있었습니다. 제가 집주인한테 전세보증금 지급하고 확정일자 받은, 바로 그날에 집주인이 다른 사람한테 그 집을 팔았더라구요. 새로운 집주인이 그날 바로 대출받고 잔금 지급해서 등기까지 넣어버린 거 같습니다."
말로만 들어봤던 전세 사기였다.
현행법상 전입신고를 한 다음 날 0시부터 세입자에게 대항력이 생긴다는 걸 이용한 명백한 사기행위다.
원모가 게을러서 마땅히 확인해야 할 걸 등한시한 게 아니라 법의 맹점을 악용한 사기범들에게 눈 뜨고도 당한 셈이었다.
"새로운 집주인하고는 얘기해봤어?"
"아니요.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당연히 연락처도 모르구요."
상황을 보아하니 만나도 별수 없을 듯 보였다.
기존 집주인과 공모했거나 아니면 이용당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할 테니.
"전세금은 얼마라고 했지?"
"2억이요."
천하태평에서 빌려준 금액 그대로다.
"야! 이놈아. 그러게 대출 확 당겨서 집 사라니깐."
"요즘 하우스푸어가 얼마나 심각한데 어떻게 집을 삽니까?"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오른다니깐. 사면 무조건 오른다니깐 도무지 믿질 않네."
대출 끼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아예 강북에 조그만 아파트 한 채라도 사라는 말을 부득불 무시하더니 이 사달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걸 하고 후회가 됐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 이미 끝났으니깐 넘어가자. 그러면 새로운 집주인이 받았다는 대출금은 얼만데?"
"네. 여기요."
원모가 전셋집의 등기부등본을 건네주었다.
원모 말대로 갑구에는 정말 원모가 이사한 날 새로운 집주인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고 같은 날 을구에는 근저당권이 설정되어 있었다.
담보를 잡은 근저당권자, 즉 채권자는 은행이 아니라 개인이었으며 설정 금액 또한 공교롭게도 2.4억 원이었다.
근저당 설정 금액이 2.4억이라는 건 원금보다 통상 20%를 이자 명목으로 올려서 설정하니 곧 대출금 원금이 2억이라는 얘기였다.
퍼즐처럼 딱딱 맞아 떨어졌다.
종전 집주인 A는 원모로부터 2억 원에 전세금을 받아 챙기고 같은 날 새로운 집주인 B에게 2억 원에 집을 팔았다.
새로운 집주인 B는 C로부터 매매대금 2억 원을 빌려서 그 돈으로 종전 집주인 A에게 그대로 지급하였을 것이다.
물론 취득세 같은 건 종전 집주인인 A가 부담했을 테니 새로운 집주인 B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한 푼도 없을 거다.
결국 종전 집주인 A는 수중에 4억 원을 쥔 것이다.
원모가 전입신고를 한 날과 같은 날에 C가 근저당권을 설정하였으나 전입신고의 효력은 다음날 0시부터 발생하므로 하루 차이로 C의 권리가 원모보다 우선한다.
결국 새로운 집주인 B가 C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를 잡은 C가 그 집을 경매로 넘길 거고 경매에서 낙찰된 금액은 원모가 아닌 C에게 모두 돌아간다는 얘기다.
딱 봐도 A와 C가 짜고 친 고스톱판에 원모가 호구 잡힌 거다.
B는 재산은커녕 파산해도 아무 상관 없는 막장에 몰린 사람이었을 테고 그저 돈 몇 푼 받고 A와 C에게 협조했을 것이다.
"원모야.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그놈들한테 작정하고 작업당한 거 같아."
"네?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전입 신고할 땐 분명히 등기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새 집주인이랑 채권자가 같은 날이지만 저보다 늦게 등기했는데도 저보다 권리가 빠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습니까?"
방법이 없을 거 뻔히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이건 범죄나 다름없지. 그런데 법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
원모는 울화통이 치밀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전 이대로는 못 넘어가겠습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심하게 자책하고 있는 원모의 모습이 안타까워 차마 입이 떼지지 않았다.
"그래.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봐. 내가 다 도와줄게."
뭐 말은 하기 쉽다.
어차피 방법도 없을 텐데 무슨 말인들 못 할까.
고개 숙인 원모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정말입니까, 대표님?"
"그래 얼마든지."
***
다음 날.
역시 아침에 원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을 때 동전 한 개 넣는 것도 벌벌 떠는 놈인데 눈앞에서 피 같은 2억 원을 날려버릴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적당히 안정을 찾으면 오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화기가 울렸다.
원모였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원모야. 너 사정 있는 거 다들 아니까 일일이 전화 안 해도 돼. 그냥 알아서 네 일 봐. 회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깐 신경 쓰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말씀은 그게……."
"괜찮다니깐. 우리는 모두 주인이니깐 쓸데없이 근태 같은 거 신경 쓰지 말자니깐."
"그게 아니라니깐요!"
말 끊지 말라며 버럭 했다.
지금 심정 대충 아니깐 그냥 넘어가 준다.
"그럼 뭔데?"
"새로운 집주인 찾아가 보려고 하는데요. 같이 가주시지 말입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뭔 개소리야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원모의 심정을 생각해서 한결 누그러뜨려 답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거길 왜 가?"
"어제 대표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러니깐요. 나와주셔야죠."
그냥 뱉은 말인데 진심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안 돼. 여기 사무실을 지켜야지. 나 없으면 천하태평이 아무것도 안 돌아가잖아."
"대표님. 요즘 할 일 없으신 거 다 압니다. 그리고 회사란 게 대표든 신입사원이든 없으면 없는 대로 알아서 잘 돌아가기 마련이라고 말씀해주신 거 기억 안 나십니까?"
"쓸데없는 건 기억도 잘하네. 그런데 찾아가도 소용없을 거야."
"아니 주소가 있는데 왜요?"
"거기에 안 살고 있을 거야. 설령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매도 넘어갔으면 돈 한 푼도 없다는 건데 괜히 헛걸음일 뿐이야."
"그래도 해볼 수 있을 만큼은 해봐야죠."
평상시 일하는 자세와는 확연히 달랐다.
끈기 있고 포기를 모르는 자세.
나쁘지 않다.
일할 때 좀 그러지.
"그래. 내가 가준다. 대신 밥 사라."
"대표님 설마 지금 저한테 밥 사라고 하신 겁니까?"
"2억이나 2억 2만 원이나 뭔 차이인데?"
"대표님!!"
수화기로 불이 뿜어져 나온 듯 뜨거울 정도였다.
"알았어. 미안. 그냥 내가 산다. 사!"
* * *
보내준 주소로 찾아가니 마침 원모도 막 도착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여기 맞아?"
"네. 등기부등본에 나온 주소 맞아요."
역시나 예상대로 노후불량 주택이 밀집한 동네에서도 가장 낡아 보이는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들고나와 힘겹게 대문을 열었다.
"어디슈?"
"여기가 김만복씨 댁이죠?"
"맞수다. 죽었습니까?"
당황한 마음에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네? 죽다뇨? 김만복씨가요? 아닌데요."
"에구 난 또."
"아니 할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만복이가 내 아들놈인데 집 나간 지 십수 년이 지나도록 연락 한번 없었는데 갑자기 댁들이 찾아와서 집이냐고 물어보길래 공무원분들인지 알고 죽었나보다 했수다."
"그럼 아드님 지금 어디 계시는지 모르신다는 말씀이세요?"
"글씨. 몇 년 전에 해남댁이 서울역에서 만복이 봤다는 말은 들었는디 그 후로도 봤다는 사람도 없고 찾아온 적도 없었수다."
"기차 타고 어디 가셨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짝 동네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거 같다고 했수다."
할머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남 얘기하듯 했다.
세상 모든 모자 관계는 각각 다 다른 법이다.
집집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그러나저러나 서울역 근처에서 먹고 자고 한다면 노숙자란 얘긴데.
역시 가진 것은 물론 더 이상 잃을 것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니 돈 몇 푼에 신분증도 빌려주고 아무 계약서에 보지도 않고 사인까지 했었나보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가자 원모야. 노숙자한테 뭔 기대를 하냐?"
"같이 가보시지 말입니다."
"가다니 어딜?"
"서울역이요."
"뭐 서울역에 노숙자가 얼만데 그걸 다 뒤지자고? 그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아? 안돼 불가능해. 자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텐데."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님이면 이 상황에 그냥 포기하시겠습니까?"
물론 난 아니다. 정말 끝을 볼 때까진 뭐라도 해볼 거다.
하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니라 원모 사정일 뿐.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다.
"상황이 그렇잖아. 이 상황이면 완전 나가리됐다고 보는 게 나아."
"포기하신다는 겁니까? 정말 회수 가능성이 없다고 보시는 거죠?"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모는 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쳐다봤다.
"그럼 대손충당금 쌓으시죠."
헐! 대손충당금이라니.
대손이란 채권(빌려준 돈)에서 향후 회수가 불가능한(못 받을) 금액을 말한다.
즉 빌려주고 떼이는걸 뜻한다.
그리고 충당금이란 미리 예상해 적립한다는 걸 뜻한다.
결국 대손충당금이란 빌려준 돈에서 못 받을 거 같은 금액만큼 미리 쌓아놓는다는 말이다.
"뭔 소리야? 대손충당금이라니?"
"종업원장기대여금이요. 제 전세금 2억이 모두 회사에서 빌린 거잖습니까. 회수 가능성 없으니깐 100% 대손충당금 쌓으시라구요."
"뭔 개소리야? 천하태평이 너한테 빌려준 거지 그게 사기꾼한테 빌려준 거냐? 네가 회삿돈 빌려서 그 돈을 전세금으로 쓰든 술 사 먹든 그게 갚을 의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야. 그냥 네가 갚으면 되는 거지?"
하도 어이가 없는지 궁한 처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강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러나 원모가 꿈쩍도 안 하고 대꾸했다.
"모든 자금에는 꼬리표가 달린다고 대표님께서 하지 않으셨나요? 자금 흐름을 볼 때 꼬리표를 따라다니면서 확인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궤변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원모가 최후통첩이라도 날리듯 결연하게 말했다.
"아무튼 대표님. 전 전세금 못 돌려받으면 안 갚을 테니깐 대손충당금 쌓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배 째라 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