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위기
몇 달이 흘렀다.
어설픈 회귀 전 기억 때문에 김범룡 회사에 투자해서 23억을 날렸다는 생각에 스스로 움츠러들었는지 신규 투자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몇 달 동안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한편 회사에서 주임종장기대여금으로 2억을 빌려 간 원모는 전셋집까지 마련해놓는 등 결혼 준비를 끝내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원모가 종일 똥 마련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모야! 막상 결혼해서 같이 살라니깐 불안하지? 막 물리고 싶어 죽겠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결혼식만 안 했지 벌써 같이 살고 있는데요."
"뭐라고 결혼도 안 했는데 같이 살아?"
"어차피 결혼 날짜도 잡았겠다 전셋집도 구했는데 뭐하러 따로 삽니까?"
나름 합리적이다.
"그런데 내 눈엔 왜 종일 끙끙대는 거 같지?"
"그게. 대표님. 실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봐. 힘들거나 돈 드는 게 아니면 웬만하면 들어줄게."
"사실은 결혼 준비는 다 끝났는데 주례 선생님 때문에요."
"왜 주례 선생님 구해달라고? 그 말이 뭐가 어렵다고 끙끙대냐? 그냥 얘기하지. 가만 보자 누가 좋을까?"
원모가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실은요. 대표님께서 주례 좀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침 입 안에 한 모금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뭐야 이 미친놈아. 내가 몇 살인데 주례야?"
"주례 보시는 데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대표님이 제 인생의 버팀목이자 닮고 싶은 롤모델이자 본받아 나가야 할 지향점이신데요."
이 자식 한동안 성환이한테만 딸랑거리더니 나한텐 오랜만이었다.
거짓말인 거 뻔히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회귀 전도 아니고 지금은 내 나이에 주례를 서라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성환이는 생각만으로도 웃겼는지 배꼽을 잡고 키득거렸다.
"푸하하! 주례 선생님이래. 원모님 인생의 버팀목이신데 한번 해주시지 그래요? 나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나이 안 중요하면 네가 하지 그러냐?"
좋은 생각이었는지 성환이가 물개박수를 쳐댔다.
"그럴까요? 원모님 제가 봐 드릴까요?"
"그래라. 원모야 이번 결혼식 주례는 성환이한테 봐달라고 하고 두 번째 결혼할 땐 내가 꼭 봐줄게."
원모가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컥. 아닙니다.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아무래도 나이가 가장 중요할 거 같습니다."
원모가 전화기를 들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할 것도 없고 괜히 궁금한 마음에 회의실 안으로 귀를 쫑긋 기울였다.
여자친구인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통화했다.
"자기야. 우리 대표님이 안 하시겠대."
"……."
"어쩔 수 없지 뭐. 돈이 좀 들더라도 자기 학교 교수님한테 부탁할 수밖에."
"……."
"그렇지. 인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좀 비싸더라도 좋은 거 하나 사다 드려야지. 봉투도 준비해놓고.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다른 거에서 절약하자고."
그러면 그렇지.
버팀목? 롤모델? 개뿔.
주례 선생님 모시는 비용이라도 좀 아껴볼까 하고 그냥 던져본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좋아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열불이 났다.
지독한 자식.
잠시 후 원모가 태연한 척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조용히 손짓하며 불렀다.
"원모야!"
"네. 대표님."
"그냥 내가 주례 봐줄까? 너 돈 들어갈 데도 많을 텐데 그런 거라도 좀 아껴야 하지 않겠어? 괜히 예전 교수님들 찾아가서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좀 그럴 텐데."
원모가 적잖이 당황한 듯 얼굴은 물론 귀까지 새빨개졌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통화해서 내가 들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고향에서 어르신들도 많이 올라오셔서요. 나이도 무시 못 할 거 같습니다."
"에이 나 잘할 수 있는데……. 주례할 때 절대 이혼하지 않는 좋은 방법도 하나 알려줄 수 있고."
성환이 궁금했는지 끼어들었다.
"그런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지?"
"응. 그건 바로 결혼을 하지 않는 거야. 혼인 서약을 안 하면 돼. 그러면 절대 이혼을 할 수가 없지."
성환이 혀를 찼다.
"쳇. 그럴 줄 알았어."
"원모야! 알았다. 이번엔 그냥 예전 교수님 찾아서 부탁드려라. 대신 다음 결혼할 땐 그때쯤이면 나도 나이 좀 먹었을 테니 내가 꼭 봐줄게."
원모는 어이가 없었는지 대꾸도 안 했다.
잠시 후.
성환이 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휴대폰 쳐다보다가 노트북 화면 보다가 내 쪽을 한 번씩 흘끔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몰래 전화라도 하려는지 핸드폰을 얼굴에 갖다 대고 회의실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직감이 들자 나도 모르게 회의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역시 성환이는 누가 들을세라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 영찬아. 알아봤어?"
"……."
"영웅실업? 작전 들어간다는 거 확실해?"
"……."
"뭐? 목표수익률이 1,000%라고? 대박. 정말이야?"
주가조작 공모라도 하는 듯 말이 새 나가지 않도록 극히 조심스러운 말투를 유지했다.
"알았어. 절대 비밀 꼭 지킬게. 알려줘서 고마워."
통화를 끊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회의실을 걸어 나왔다.
자기 자리로 가서 앉더니 바로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초집중 모드에 돌입했다.
세력의 작전 정보를 얻은 거다.
재벌 2세가 입수한 정보라면 저잣거리에서 나뒹구는 쓰레기 정보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이건 보나 마나 확실한 정보다.
마침 얼마 전에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해놓기 잘했다.
은행사이트에 접속해서 계좌이체 화면을 열었다.
현재 잔액은 0원이었지만 즉시 출금 가능한 금액은 이천만 원이었다.
혹시 모르니 몇 달치 이자분 30만 원을 제외하고 모두 증권계좌로 이체했다.
증권사이트에 접속해 매수주문 화면을 띄우고는 생전 처음 들어본 주식인 영웅실업 주식을 검색했다.
한 주당 490원.
500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동전주였다.
동전 주면 어떠냐.
1,000% 수익이 난다고 하니 조금만 있으면 한 주에 오천 원짜리 한 장이 된다는 얘긴데.
푸하하.
떨리는 마음으로 주문 수량과 금액을 기입하고 매수 버튼을 클릭하려는 순간 뒤통수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창문이라도 열어놓았는지 살랑거리는 바람이 뒷머리를 스쳤다.
뒤를 돌아보니 성환이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놔서 바람이 분 게 아니라 성환이 콧바람이 내 뒤통수를 때린 것이었다.
"뭐야? 진짜였잖아."
성환이 뭔가 크게 깨달은 듯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 자식아."
"헐, 진짜였어. 설마설마했는데."
자기가 회의실에서 속삭이듯 말한 주식이 떡하니 내 노트북 화면에 뜬 걸 확인한 거다.
성환이가 알아차렸다.
이건 성환이가 쳐놓은 덫이었다.
예전부터 매번 긴가민가했었지만, 에이 설마 하고 있다가 아까 원모와 나눈 얘기를 듣고는 혹시나 해서 확인해볼 겸 쳐놓은 덫에 내가 걸려든 것이다.
난 재빨리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해."
성환은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속삭이듯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이거 들리죠?"
당근이다.
입을 귀에다 갖다 대고 얘기하듯이 생생하게 들렸다.
그러나 일단은 발뺌이다.
"아니. 하나도 안 들리는데."
"뭐래? 들리니깐 대답한 거 아냐?"
이 자식. 또 덫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이미 걸린 마당에 핑계를 대봤자 더 피곤해지기만 할 거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회의실에서 전화하는 척하면서 속삭였는데도 다 들었단 말이에요?"
"뭐라고? 전화하는 척이라니? 그럼 아까 작전주라는 거도 뻥친 거였어?"
"당연하죠. 그냥 전화하는 척해 본 소린데. 그리고 설마 내가 그런 짓거리를 하겠습니까? 행여나 걸리기라도 하면 어쩔라고. 회장님이 가만 냅 두시겠어요?"
맞다.
아무래 수익률이 높다고 해도 성환이는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 놈이 아니다.
잘못하다간 얻는 것보단 잃을 게 훨씬 클 테니.
그런 짓거리는 잃을 게 없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여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자식.
매수주문을 안 눌렀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게 알았다면 하마터면 듣도 보도 못한 그런 개잡주의 주주가 될 뻔했다.
한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성환이 표정이 왠지 모르게 이상했다.
"헐! 대표님 정말 그 주식 산 거예요?"
"아니. 하마터면 살 뻔했잖아."
"그런데 이게 왜?"
성환이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띄어놓은 매수 창 위로 번쩍거리며 알림이 계속해서 떴다.
자세히 보니 매수 체결되었다는 알림창이었다.
이런 X발.
클릭하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서 누르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성환이 얼굴을 맞닥뜨려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는지 손가락으로 눌러버린 모양이다.
주가가 낮으니 주문 수량이 많아서 여러 번에 걸쳐 체결된 것이었다.
모든 걸 깨닫고 급하게 매수 취소 버튼을 눌러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주문한 수량이 모두 체결되어 미체결물량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개……. 너 땜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성환이는 그저 놀란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뭐야? 내 말을 믿는 거야? 내가 몰래 통화했다고 그 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 실적은 어떤지 뭐 그런 건 일절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산 거라고?"
성환이 말대로 평상시 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속아서라기보단 순간 뭐에 혹한 듯 이성적으로 따져보지도 않고 급하게 뛰어들었다는 게 더 쪽팔렸다.
나름 이성적 사고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왜 보이스피싱을 당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몰라. 내가 잠깐 미쳤었다. 됐고 그냥 팔지 뭐."
매도주문 창을 열었는데 그새 10원이 빠져서 48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불과 십 분 사이에 수수료 포함해서 2%를 넘게 손해 봤다.
하지만 나의 불완전한 이성을 깨닫게 된 수업료로 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들을 수 있는 거지?"
"몰라. 집중하면 그렇게 돼."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그저 회귀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능력이었지 이유는 나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만한 것도 아니고.
"나도 몰라.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귀가 밝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럼 예전에 매형 룸살롱에서 엿들은 거, 중식당에서 회장님 말씀 엿들은 거, 그리고 얼마 전에 회사 복도에서 빌라 계약서 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엿들은 거 그거 다 그냥 집중해서 들은 거라고? 몰래 가까이 가서 들은 게 아니라?"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진작 좀 말해주지."
"뭐라고? 내가 왜?"
"아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 그 능력을 왜 썩힙니까?"
쓸데라니 엄청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 * *
며칠이 지나고.
아침마다 일등으로 출근하는 원모가 오늘은 웬일인지 열 시가 넘도록 사무실에 나타나질 않았다.
"성환아! 원모 오늘 무슨 일 있다고 들은 거 있어?"
"원모님 집까지는 안 들리는 거예요?"
이 자식이 이제 놀리기까지 한다.
"뭐라고?"
"아니. 그렇다고요. 그리고 원모님 결혼 준비한다고 바쁘겠지 뭔 일 있겠어요?"
"준비는 무슨? 벌써 같이 산 지가 얼만데."
"그럼 더더욱 말 되네. 신혼이나 마찬가진데 아침이고 밤이고 무슨 일 있지 않을까요?"
그래.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나섰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많이 보던 그림 아니던가.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원모가 나타났다.
누구한테 쥐어 뜯겼는지 삐죽삐죽 헝클어진 머리에 입고 뒹굴기라도 했는지 와이셔츠는 온통 구겨져 있었다.
게다가 온몸의 기가 다 빨린 듯 핼쑥해져서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늦게 출근한 게 미안했는지 나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뭐가 죄송해. 신혼이나 마찬가진데 다 이해한다. 밤낮으로 할 일이 오죽이나 많겠니."
"그게 아닙니다."
농담 한번 던졌을 뿐인데 오만상을 하고 답했다.
"뭐야? 힘들어서 그래? 혹시 살고 싶어서 회사로 도망 온 거야?"
"아니라니깐요."
버럭 화를 냈다.
"야 농담도 못 하냐? 괜히 행패야."
원모는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 일이 좀 생겨서요."
한 손으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펼쳐보니 경매 통지서라고 적혀있었다.
"경매? 이게 뭐야?"
"지금 살고 있는 저희 신혼집이요. 경매로 넘어간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