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고민
지난번 통화때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것보다 더욱 친근해진 말투였다.
단지 술 취한 김에 톤이 살짝 올라간 게 아니라 그사이 관계가 더욱 친밀해졌기 때문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지금 술 한잔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분들하고 오랜만에 봬서요."
"……."
"네, 실장님. 그분들 맞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그 건은 내일 업무 보고하면서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내일 보고 건 때문에 전화했을 테지만.
그래도 촌각을 다투는 급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이 늦은 시간에 전화까지 해서 그것도 누구랑 술 마시는지 개인적인 것까지 물을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니란 얘긴데.
건환이도 우리랑 마시고 있다고 사실대로 얘기하는 거 보면 스스럼없는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통화를 끊은 건환이가 우리 룸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급한 전화가 와서요."
"그래. 여기저기 축하 전화 많이 오겠지."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이어갔다.
그런데 하나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생각에 건환이 옆자리로 가서 조용히 물었다.
"너 혹시 우리랑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냐?"
건환이는 약간은 서운한 듯하면서도 복잡한 눈길로 쳐다봤다.
"예전에 할머니 편찮으실 때 병원비도 내주신 것도. 직접 집까지 찾아오셔서 제가 한 짓인지 뻔히 아시면서도 이해해주시고 사직서 찢어버리신 것도. 다 기억합니다. 제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람지한테도 도움 많이 주셨다고 들었구요."
충분히 진정성이 묻어났다.
괜히 의심한 나만 쫄보 같아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미션을 하나 줄게."
"미션이요?"
"그래. 거기서 크게 성공해라. 그게 내 미션이야."
건환이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듯 두 손을 모았다.
하지만 언젠간 건환이한테 선택의 순간이 올 것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것도.
* * *
며칠 뒤.
맛있다고 소문난 한우고기 전문점에 들어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왔고 나도 모르게 배에서는 어서 달라며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표님 오셨어요?"
날 보더니 건환이와 람지가 반갑게 웃으며 맞이했다.
람지가 건환이의 영전을 자축하고자 마련한 자린데 자기가 예전에 재무팀 아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만 초청했다.
몇 년 사이에 많이 변했다.
예전에 건환이는 천하제일엔터에서 아무 팀에서도 필요 없다고 해서 인사팀에서 물 먹이려고 우리 팀으로 꽂아준 문제사원이었다.
람지는 또 어떤가.
막 크리에이터 생활을 시작하다가 친구 오빠인 매니저의 사기행각으로 강제 은퇴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 명은 천하제일그룹 계열사의 대표이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천하제일엔터에서 가장 잘나가는 먹방 크리에이터가 되었다.
나도 물론 대 천하태평의 대표이사가 되었고.
마음 한 켠이 뿌듯해졌다.
카운터 쪽에서 고깃집 사장님과 알바생이 람지를 알아본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 손님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아?"
"대박! 사장님 누군지 모르겠어요? 람지잖아요."
"맞다. 초밥 80접시 먹고 나서 디저트로 케잌 두 통 먹는다는?"
초밥이 8접시도 아니고 80접시에다가 케이크 두 조각이 아닌 두 통이라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람지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오늘 촬영하려나?"
"카메라 없는 거 보니깐 촬영은 아닌 거 같아요. 그리고 처음 가는 집은 촬영 잘 안 한다니 오늘 맛있으면 다음에 촬영 오겠죠. 사장님 그리고 오늘 셔터 내려도 되겠는데요? 저 한 테이블에서 하루 매상 다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 우리 고기 얼마나 있지? 주방 가서 있는 대로 다 썰어놓으라고 말해놔."
람지의 달라진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알바생이 동경의 눈빛으로 람지를 쳐다보며 메뉴판을 내게 건넸다.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오늘 역시 건환이가 쏘는 날인데.
어딜 가나 꼭 제일 연장자 같은 사람한테 메뉴판을 주는 이런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내가 메뉴판을 넘기려 하자 건환이가 만류했다.
"대표님께서 고르시죠. 오늘은 가격 같은 거 신경 쓰지 마시고 맘껏 드십시오."
"내가 언제 가격을 신경 썼다고."
말해놓고도 살짝은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함쯤이야 금방 지나간다.
오랜만에 있는 거 다 주세요라고 플렉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그럴까? 그럼 여기에서부터 저기……."
알바생에게 메뉴판에 적힌 걸 다 주문하려는데 람지가 막아 세웠다.
"잠깐만요. 그냥 등심으로 3인분 주세요."
알바생이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는지 재차 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죠?"
"등심 3인분 주세요."
"뭐야? 설마 남친이 산다고 하니깐 돈 아끼려는 거야? 많이 나올까 봐?"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럼 뭐 어제 방송이라도 한 거야?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 배 안 꺼진 거야?"
"그게 아니라 요즘 저보다 많이 먹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서요. 많이 먹는 걸로만은 경쟁력이 없어서 이것저것 다른 컨셉도 시도해야 할 거 같아서요."
"그래 무슨 컨셉?"
"조금 먹더라도 맛있게 먹기? 뭐 이런 거요."
"람지야!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지난번에 좀 그러지. 내가 살 땐 아예 기둥뿌리 뽑을 듯이 하더구만."
건환이가 중재하듯 나섰다.
"람지 신경 쓰지 말고 대표님께서 많이 드시면 되죠."
생각해보니 건환이 말이 맞았다.
람지가 많이 먹든 말든 내가 먹는 게 달라지는 건 아니니.
"그래. 3인분씩 계속 시켜서 먹자."
카운터로 간 알바생이 사장에게 주문을 전달하니 사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등심 3인분이요."
"30인분이 아니라 3인분이라고? 그 사람 아니야?"
"아무리 봐도 람지 맞는 거 같은데요. 방송 없을 땐 소식하나 보죠. 뭐."
사장님 마음속에서 이미 내린 셔터를 다시 올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람지는 정말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입에 가져갔다.
추임새 넣든 우와 라는 감탄사를 섞어가며 맛있게 먹었는데 왠지 어울리지 않은 옷을 걸쳤다고 할까.
폭풍처럼 몰아치는 게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기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해서 말해주고 싶은 걸 꾹꾹 참았다.
어느덧 배가 차오르는 거 같아 배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별말이 없던 건환이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대표님 혹시 최동욱 실장님이랑 안면이 있으십니까?"
회귀한 후에는 스치듯 본 게 전부였다.
"그냥 오며 가며. 그런데 왜?"
"실장님이 가끔 이것저것 물어보시길래요."
"물어보다니? 뭘?"
"글쎄요. 별거 아니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요."
아무래도 최동욱이 별일 아닌 척하면서 건환이한테 뭔가 떠보려고 했을 것이다.
람지가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 같았는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표님 2차 가셔야죠. 2차는 대표님이 쏘시는 거죠?"
맥주 한잔 정도야 뭐 가뿐하다.
고깃집을 나와 둘러보니 마침 길 건너편에 호프집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오픈한 뒤로부터 수리 한번 한 적 없는 듯 허름한 외관을 보아하니 절대 비싸지 않은 집 같았다.
거기다 적당히 맛없어서 많이 먹으려야 많이 먹을 수도 없는 곳처럼 생겨 먹은 게 2차로 쏘기엔 최적의 장소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그곳을 가리켰다.
"물론 2차는 내가 사야지. 저기 가자. 호프집 하나 있네."
람지가 내 말은 아예 들은 척도 안 하고 팔을 잡아끌고는 바로 옆집으로 데려갔다.
"1차는 깔끔하게 등심으로 했으니깐 2차는 기름진 걸로 가시죠."
등심이 언제부터 깔끔했을까?
아까 고기 내왔을 때 딱 보아하니 유산소 운동이란 오직 되새김질밖에 안 해본 소였는지 물렁살보다도 군데군데 기름이 더 많이 박혀있어서 고기 맛보단 기름 맛밖에 나질 않았었는데.
그걸 깔끔하다고 하다니.
자기 입술에 덕지덕지 묻어나 번들거리는 게 기름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기름칠하자며 람지가 끌고 간 곳은 곱창집이었다.
1차로 고기 먹고 2차로 곱창집 온 건 평생에 처음이었다.
모르긴 모르지만 아주 높은 가능성으로 마지막이기도 할 거다.
빠른 눈으로 벽에 붙은 메뉴판을 쭉 훑어 봤다.
소곱창 일 인분에 2만 5천 원.
분명히 컨셉 바꾼다고 했으니 3인분만 시킬 테고 소주 몇 병 더해봤자 10만 원 안쪽.
대충 사이즈 나왔다.
이왕 쏘는 거 말이라도 기분 좋게 하는 게 낫다.
"그래. 가자. 내가 쏠 테니깐 이것저것 맘껏 시켜라."
람지가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는 주문받으러 온 사장님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엄지, 검지 그리고 중지 순서대로 세 손가락을 펴 보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내 예상대로 3인분만 시켰다.
사장님이 주문을 알아들은 듯 확인했다.
"네 곱창 3인분이요.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돌아서서 카운터 쪽으로 가려는데 람지가 붙잡았다.
"잠깐만요. 사장님. 3인분 아닌데요."
"네?"
손가락 세 개면 분명 3인분인데.
대한민국 국민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가 끝난 제스처인데 아니라고 하다니.
당황한 사장님에게 람지가 답했다.
"3인분이 아니라 세 줄 주세요."
세 줄이라니.
내가 혹시 잘못 들었는지 알고 귀를 비볐으나 그럴 리가.
역시 사장님도 놀랐는지 재차 확인했다.
"세 줄이라고요?"
"네. 세 줄이요. 저희 세 명 왔잖아요. 판도 세 개 따로 주시고요."
오늘 방송이라도 찍으려나.
사장님은 순간 당황했지만 잠시 후 입이 귀에 걸린 채 부리나케 카운터 쪽으로 갔다.
혹시 취소라도 할까 봐 아예 주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일단 취소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고 주문한다고 할까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불러봐야 사장님께서 '벌써 조리 들어갔는데요' 하고 답할 게 뻔하니.
"세 줄이 뭐냐? 세 줄이?"
"곱창을 자르면 곱 다 빠져서 맛없어요. 길쭉하게 먹어야지 제맛이죠."
"그럼 한 줄만 시키던지."
"대표님이랑 건환 씨는 안 드시게요?"
"아까 분명히 컨셉 바꾼다고 하지 않았니?"
"당분간은 안 될 거 같아요. 아까 대표님 표정 보니깐 딱 나오던데요. 실패라고."
오늘 또 당했다.
한참 뒤 사장님이 들고 온 불판 위엔 곱창이 돌돌 말아서 한판을 가득 채웠다.
부추나 양파, 감자 등 곁들임 같은 건 일절 없이 말 그대도 100% 순수한 곱창 한 줄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그래 이미 늦은 거 맛있게라도 먹자는 마음에 곱창을 집게로 들어 올려 자르려고 하자 람지가 내 손등을 치더니 꾸짖었다.
"곱창은 가위질하는 거 아니라니깐요. 곱 다 빠진다니깐."
"우리가 지금 평양냉면 먹냐? 가위질을 안 하게. 가위도 없이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어떻게 먹긴요. 잘 보세요."
람지는 집게로 곱창을 들어 올리더니 후후 바람을 불었다.
어느 정도 식은 거 같은지 바로 입속으로 가져갔다.
씹으면서 동시에 쭉쭉 들어가는 게, 마치 위장 속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렇게 10만 원으로 막아보려는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앞으로 한 달간 저녁은 집에서 라면만 먹어야 할 듯.
그것도 계란 없이 한 봉지씩만.
기름기가 더해지니 술이 더욱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가 되어 건환이가 부축해주었다.
"대표님. 대리 불러서 제 차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럴까?"
잠깐 잠들었는지 얼핏 정신을 차려보니 뒷자리에 쭈그러져 있었다.
건환이와 람지가 얘기하는 거 같아 뻘쭘해서 안 깬 척했다.
"오빠 오늘 무슨 고민 있어?"
"아냐. 고민은 무슨 고민. 그런데 왜?"
"왠지 평상시랑 조금 달라 보여서. 오늘 불편했어?"
여자친구니깐 단박에 알아봤나 보다.
건환이는 말은 안 했지만, 나와의 관계 그리고 최동욱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대표님이랑 먹는데, 내가 왜 불편하겠어. 좋지."
"응. 난 또 고민 있는지 알고. 오빠. 그럼 대표님 내려다 드리고 우리 디저트나 먹으러 갈래? 나 케잌 맛있는데 아는데."
뿜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하마터면 잠 깨서 듣고 있었다는 걸 들킬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