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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17화 (117/191)

117화 출세

내가 기사를 보고 크게 놀라자 팀원들이 자리로 몰려들었다.

원모가 기사에 실린 건환이 사진을 발견하고는.

"헉 이게 누구야? 혹시 건환이 아니에요? 무슨 사고라도 쳤습니까?"

사회면이라도 읽고 있었는 줄 알았나 보다.

"경제면이다. 하긴 사고라면 사고일 수도 있지."

기사 내용까지 읽은 원모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천하제일패션 대표라고요? 건환이가?"

자기보다 한참 아래라고만 생각했던 건환이가,

도통 어디를 보는지 모를 정도로 초점 없는 눈동자만 끔벅대던 그 건환이가,

대표이사가 되다니 믿기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제 겨우 과장급밖에 안 되었는데 아무리 작은 계열사, 그것도 천하제일지주의 손자회사 뻘이라고는 해도 한 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었다니.

물론 축하할 일이긴 했지만서도 부럽고 씁쓸한 감정 같은 것도 일어났을 것이다.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지위가 자기보다 높아졌을 때, 마치 자기를 밟고 올라선 것처럼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와 직접적인 연관 없는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점점 사회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분위기로 바뀌어나갈 것이다.

그나저나 설마 건환이가 배신한 건가?

최동욱한테 나한테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더니 아예 그쪽으로 넘어가기라도 했다는 건가?

어떻게 한마디 얘기도 안 할 수가 있을까?

잠깐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사님께서도 모르셨습니까? 건환이한테 얘기 들은 거 없으세요?"

"전혀. 지난번에 다 같이 회식했을 때도 아무 얘기 없었잖아. 설마 천대표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네. 저도 지금 막 뉴스 보고 알았어요."

"그럼 건환이 본인도 몰랐겠지. 설마 건환이가 알고도 얘기 안 했을라고?"

그러나 직장 생활 경험을 돌이켜봤을 때 대표로 발령이 나는데도 미리 언질을 못 받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도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지 모르니 섣불리 재단할 필요까지는 없다.

정말 그런 건지 확인도 해볼 겸 물어나 봐야겠다.

"원모야. 지금 당장 건환이한테 전화해서 들어오라고 해."

"네."

원모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누르는데 도통 연결이 안 되는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통화 중이야?"

"아니요. 아예 안 받는데요."

"안 받는다고? 그럴 리가."

몇 번을 더 전화하는 거 같더니 포기했다.

"계속 안 받습니다. 여기저기 축하 인사 다니느라 바빠서 그러겠죠. 사무실로 들르라고 문자 남겨놓겠습니다."

그래 막 설립한 회사인데다 오늘 취임까지 했으니.

정말 통화할 짬이 없을 수도 있다.

부러움 반 시샘 반의 원모와는 달리 성환이는 그저 좋기만 한지 헤죽거리고 있었다.

"너 설마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럴 리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라고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벌려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꼴 보기 싫다.

"넌 천하제일엔터 최대 주주라면서 그런 것도 몰랐냐? 패싱당한 거야? 대놓고 따당하는 거 맞는 거지?"

화풀이 겸 성깔이라도 돋구게 하려고 한마디 쏘아붙였으나, 성환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최대 주주지 등기이사는 아니잖아요. 주주총회면 몰라도 이사회 참석할 일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막말로 알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최대 주주가 그런 거까지 하나하나 다 간섭하고 그러면 일하는 사람들 기운 빠져서 안 돼요."

진정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

직원들이 알아서 자기 돈 열심히 벌어다 주고 있는데 뭐하러 참견이냐?

잘하고 있는데 그냥 냅 두는 게 낫지. 뭐 이 정도의 말을 한 거다.

주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틀린 말 하나 없다.

"아무래도 건환이가 왠지 최동욱이랑 깐부라도 됐나 했서 말이지."

"건환이는 자기 자리에서 충분히 역할을 한 거예요. 천하제일에서 잘 나가면 우리한테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될 게 있나? 빌빌거려서 최동욱하고 같이 일하기는커녕 마주칠 일조차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최동욱하고 너무 가까워지는 게 조금……."

"오히려 최동욱의 최측근이 되길 바라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나중에 판 엎었을 때 손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요? 설마 건환이를 못 믿는 거예요?"

"아니 믿지. 그런데"

성환이는 오호 알았다라는 듯 눈짓하며 내 말을 끊었다.

"부러움, 시샘 뭐 그런 건가?"

내가 원모를 봤을 때 느낀 생각을 이놈은 나를 보고 느꼈나 보다.

물론 말도 안 되지만 단 1%도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도 같다.

회귀 전엔 물론 계열사 사장급 이상의 파워를 가진 지주사 CFO였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CFO였을 뿐이다.

작은 계열사라도 CEO 자리에 앉아본 것은 아니었으니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 뭐 이런 건 부지불식간에 내비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일이지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천하태평의 최대 주주이자 대표이사이다.

"그렇게 보였나? 어쨌든 네 말대로 건환이가 잘 돼야 우리 천하태평도 잘된다는 건 맞는 말이네. 불러서 축하나 해주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늦은 오후.

팀원들 모두 언제 퇴근할까 고민하면서 책상만 지키고 있던 와중 회사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문을 찍고 회사 출입구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천하태평의 주주들뿐이고 나머진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저건 건환이다.

역시나 밝은 표정의 건환이가 선물을 가져왔는지 두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분명히 똑같은 사람인데 지난번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지난번에 봤을 땐 주야장천 입어서 팔꿈치 부분이 헤져있는 데다 군살을 가리려고 넉넉한 품의 옷을 걸친 후줄근한 스타일이었다.

오늘은 어깨선이 잘 맞고 허리라인까지 들어가 보이는 수트를 걸친 게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김철수이사가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모두 일어나서 같이 박수 쳐 주면서 호응해줬다.

표정을 보니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축하를 보내고 있는 게 확실했다.

"건환아.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한테 미리 얘기도 안 해주고?"

건환이는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요. 오늘 아침에 언질을 듣자마자 바로 인사발표가 나서요. 그리고 바로 여기저기 인사 다니느라고 전화 한 통 못 받았습니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원모가 건환이 손에서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에이. 무겁게 뭐 이런 거까지 사 오고 그래. 그냥 빈손으로 오지."

"산 거 아닌데요? 오다가 집어왔어요."

건환이 놈.

이제는 제법 겸손할 줄도 알고 얼굴엔 한껏 여유로움까지 묻어나 있었다.

원모가 농담하지 말라는 듯 웃으면서 쇼핑백을 뒤집었다.

"이게 뭐야!"

실망스런 말투와 표정.

쇼핑백 안에서 쏟아진 것은 다름 아닌 커피, 각종 차와 과자 등 탕비실 물품들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마침 떨어져 가는 걸 확인하고는 리필할 겸 챙겨온 모양이다.

겸손은 개뿔.

이놈은 그냥 솔직한 놈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앞으로도 제가 탕비실 물품은 꼬박꼬박 제때 챙겨 넣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변함없는 막내의 자세는 훌륭하다.

선물이 아니라 실망했던 원모의 표정은 금세 밝아졌다.

대표이사 체면에 회사에서 몰래 커피 같은 거 빼돌릴 순 없을 테니.

이제부턴 꼼짝없이 자기 차례로구나 생각했었을 텐데.

원모한테는 그 무엇보다 좋은 선물이었을 거다.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간단히 저녁 같이 드시러 가시죠."

"야. 한턱 쏠라면 미리 사람들 시간 되는지 물어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대표님께 배워 가지고요. 쏴야 할 일이 있다면 금요일 저녁 번개로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출석률이 낮아서 가장 싸게 먹힌다고요."

건환이 말에 성환이 빈정대듯 대꾸했다.

"좋은 거 가르쳤네요. 아주 청춘어람이구만."

"청출어람……. 아니다 됐다. 네 말대로 의미만 통하면 되지."

"춘이든 출이든 거의 똑같구만. 하여간 우리 중 주말이라고 따로 약속 있는 사람은 없지 않나? 지금 나가죠."

"안 돼."

"뭐가 안되죠?"

"간단히 저녁이나 먹자니. 그건 안돼. 이게 보통 일이야? 대표이사 취임 턱인데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해야지."

건환이가 활짝 핀 얼굴로 지갑을 들어 보였다.

"뭐든 드시죠. 빵빵한 법카 들고 왔습니다."

건환이의 말에 성환이 제지했다.

"뭐야? 그 법카가 결국 누구 돈인지 모르는 거야?"

성환이 천하제일엔터 주식의 30%를 가지고 있고 천하제일패션은 천하제일엔터의 100% 자회사이니.

결국 천하제일패션도 30%는 자기 몫이라는 얘기였다.

건환이도 바로 깨달은 듯 조용히 지갑을 주머니 속에 도로 넣었다.

하여간 갑자기 분위기 초치는 덴 도가 튼 놈이다.

"성환아. 알았으니깐 가서 고기든 술이든 30%를 네가 먹으면 될 거 아냐. 거참 되게 빡빡하게 구네."

"에이, 농담도 못 해요? 그냥 그렇다구요."

대답하면서 건환이 쪽으로 슬쩍 눈짓했다.

회사의 주인은 자기란 걸 잊지 말라는 듯 상기 한번 시켜준 거다.

"원모야! 뭐 해?"

"네. 예약했습니다. 대표님 어제 고기 드셨다고 하신 거 같아서 회로 예약했습니다."

이제 척하면 척이다.

그나저나 조금 이상했다.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난 어제 고기 먹지도 않았을뿐더러 비슷한 얘기도 한 적 없었는데.

지가 오늘 회가 당겨서 그냥 핑계 삼아 둘러댄 거다.

꼭 고기가 당기지 않더라도 고깃집 가면 뻔히 자기가 집계랑 가위 집어들 분위기니깐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되는 횟집으로 선수 친 거다.

원모가 예약한 곳은 자기 돈으로 가긴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회삿돈을 쓰기엔 부담스럽지 않을만한 딱 적당한 곳이었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술병이 한 병 두 병 비워져 갔다.

술도 들어간 겸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냈다.

"갑자기 대표이사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물론 너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급이 과장이니만큼 너무 파격이어서 말이지."

"네. 제가 이번에 지주사 사업개발팀에서 기획한 게 온라인 패션스토어였거든요."

이럴 수가.

우리가 김범룡대표 회사에 투자한 23억 원을 날려버리게 한 장본인이 바로 건환이었다니.

꽤 큰 충격에 머리가 띵해졌다.

"뭐라고? 김범룡 회사랑 겹치는 거 뻔히 알면서 네가 기획했다는 거야?"

성환이 건환이를 변호하듯 나섰다.

"천하제일에서 그 시장에 진출 안 했어도 어차피 거긴 끝난 거 몰라요? 김범룡대표 그렇게 되고 회복할 수 있겠어요? 호흡기 달고 연명만 했겠죠. 그리고 어차피 커지는 시장 누가 선점하느냐 문젠데 천하제일이 잘 한 거지."

물론 자기 소유 회사를 성장시킨 거니 좋기도 했겠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도 맞는 말한 거다.

"그럼 최동욱이 널 대표로 보낸 거야?"

"네. 이번에 실장님이 사업 기획한 사람이 운영까지 하라는 지침 같은 걸 새로 내려주셔서 그렇게 됐습니다."

'우린 사업기획만 할 테니 운영은 너네들이 알아서 해라'

'성공하면 기획한 자기들 덕이고 실패하면 잘못 운영한 너희들 탓이다''

대기업 같은 큰 조직에서는 이런 부서 간 가르마 타기와 책임 떠넘기기가 항상 문제였었는데 최둥욱이 그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게다가 건환이가 우리 쪽에서 보낸 사람인 걸 뻔히 알면서도 기획안을 내도록 하고 사업화한 뒤 대표로 임명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지까지 해줬다니.

최동욱이 보통 그릇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건다는데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건환이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통화를 위해 자리를 피하려 룸을 나가는데 내 귀는 자연스럽게 건환이를 쫓아갔다.

건환이가 옆방이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는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네! 형님. 아니 실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호칭을 들어보니 최동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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