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좋은 일
성환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설마 누나일까요? 아님 최동욱?"
"사실 조윤경은 지금 조용히 찌그러져서 기회만 노리고 있을 테니 널 공격할 이유는 딱히 없다고 볼 수 있지. 물론 같은 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최동욱을 보내버릴 때까진 잠시 휴전하고 손잡은 거라고 봐야 하니깐."
"그래도 설마 최둥욱이 회장님 아래로 그룹 넘버투까지 된 마당에 회사 일에 신경 쓸 것도 많은데 이런 짓거리까지 할 여유가 있을까요?"
"여유보다는 그럴 필요가 있냐를 먼저 생각해봐야지."
"필요가 있다뇨?"
"네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니깐 언제라도 기회만 된다면 날려버릴 생각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을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너라도 그러지 않겠어?"
성환이도 이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쩌죠?"
"글쎄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내가 고민할 문젠가? 그건 피를 나눈 형제들끼리 알아서 하는 게 맞을 듯한데."
성환은 못마땅한 얼굴로 하얗게 눈을 흘겼다.
"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장난 아니다."
"아하! 아니셨구나. 그럼 뭐 천하태평 이제 막 나가도 괜찮다는 건가? 내 지분율이 얼마였더라?"
자기 혼자만으로도 35%, 나머지 3명까지 포섭하면 50%가 되니 어떠한 의사결정에도 비토권을 놓을 수 있다고 주지시켜준 거였다.
애초에 적은 금액이라도 이 자식한테는 한 푼도 투자 안 받고 그냥 우리끼리 할 걸 하고 후회됐다.
하지만 성환이가 출자한 19억 원이 없었다면 지금 천하태평 자산규모의 1/10도 어림없었을 것이므로 결과론적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약점이 될 수 있을지는 그땐 미처 몰랐었지만.
"아아. 알았어, 대주주님아. 우린 한배를 탔으니깐 같이 노력하자고. 하지만 도움을 받는 데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걸 명심해라.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깐."
세상만사는 주고받는 관계이지 일방통행은 없다.
성환이도 내 말뜻을 대충은 이해했는지 조용히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환이를 돕는 거에 비해 받을 게 단지 조윤경에 대한 복수를 돕는 것뿐이라면 아무래도 불공평한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윤경에 대한 복수를 돕는 것 말고도 뭔가 청구서 날릴만한 걸 생각해 놓아야겠다.
미행하는 놈들로부터 입수한 동영상은 바로 효과를 나타냈다.
원본을 공개하자마자 김철수 이사가 평상시 약 쳐 놓은 언론사들을 통해서 재벌 2세의 소박한 유흥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댓글 창은
[정말 소박하다.]
[예산 미리 정해놓고 그 돈 잃으니까 바로 손 터는 거 봐.]
[재벌 2세도 저럴 진데 돈도 없는 내가 빚까지 져가며 꼬라박았던 걸 반성한다.] 등
우호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고 성환이는 주변의 꼬임에도 넘어가지 않고 소신 있는 자세를 가진 개념 있는 재벌 이미지까지 얻게 되었다.
물론 검찰로부터 참고인 조사받으러 나오라는 연락도 받지 않았다.
의자에 비딱하게 누울 듯 걸터앉아 종일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가며 흐뭇해하던 성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만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파도 파도 미담뿐이네. 역시 진실은 승리한다니깐."
말을 내뱉자마자 주위를 쓰윽 한번 둘러봤다.
팀원들이 자기 기사를 보고 있는지 확인도 할 겸 '어서어서 동조하란 말야'라고 호응을 유도한 거다.
역시나 눈치 빠른 김철수이사는 그 순간을 바로 포착했다.
"맞습니다. 거짓은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깐요. 진실을 언제까지나 덮을 순 없죠. 특히나 우리처럼 이런 소신 있는 언론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면요."
딸랑딸랑도 할 겸 자기도 한 역할을 했다고 넌지시 알려준 거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대놓고 얘기한 거나 다름없다.
성환도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이게 다 평상시 이사님께서 대언론 관리를 잘해주신 덕분입니다."
호흡이 탁탁 맞아떨어졌다.
김이사와 성환이가 한마디씩 주고받는 와중 원모가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기 차례가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할 말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환이 원모 쪽을 넌지시 쳐다봤다.
그러나 멘트가 탁하고 나와야 할 타이밍에 원모가 아직 준비를 못 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임기응변이라는 건 애초에 타고나는 것이지 사회생활 기간이 는다고 같이 늘어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았으면 벌써 열 마디 말도 넘게 내뱉었을 텐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원모가 일단 입을 뗐다.
"역시 조성환님…… 이십니다."
말은 꺼냈지만, 중간에 할 말이 없어 우물우물 씹다가 그냥 맺음말을 해버린 꼴이다.
안 쉬고 말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원모가 안쓰러워 보여 내가 단어 한마디 살짝 던져주었다.
"단호하다고?"
원모가 알아들었는지 말을 이어갔다.
"네. 맞아요. 이게 다 조성환님의 그 단호하고 강직한 성품 덕분입니다."
이제야 성환이도 흐뭇했는지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내 쪽으로 지그시 돌아봤다.
'이제 너 차례다!'라고 한 거다.
난 마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두 손을 모으고는 말했다.
"심심풀이로 도박하다가 재미없다고 일어난 게 무슨 단호고 강직이야? 단호했으면 꼬신다고 해도 아예 거기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이게 다 사고원인을 파악하고 작전 짠 다음에 실행까지 한 내 덕분 아닌가. 안 그래?"
성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역시 일관성 있으시다니깐."
* * *
김범룡이 해외 도박자금 외화 밀반출과 상습도박 혐의로 구속되고 나서 그의 회사는 역시 큰 위기를 맞았다.
아무리 최근 김범룡이 회사 일은 전부 직원들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원정도박에만 빠져있었다고 하더라도 CEO의 부재는 회사에 직격탄이 되었다.
대외이미지는 추락했고 회사의 서비스도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매출이 급전직하의 그래프를 그렸다.
숫자상으로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지난번 추가 투자할 때 500억 원을 육박하던 기업가치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두 번에 걸쳐 총 23억 원을 투자했고 한 달 전만 해도 기업가치 500억 원의 20%인 100억 원으로 평가받았었는데 정말 이대로 가다간 100억 원 물론이고 원금 23억 원도 못 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안 좋은 일들은 한꺼번에 닥친다.
오늘도 역시 출근하고 나서부터 줄곧 인터넷 삼매경이던 원모가 뉴스 하나를 발견했는지 큰 소리로 나를 찾았다.
"대표님. 지금 경제 뉴스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리 다급해 보이지 않는 말투와 동작을 보아하니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또 호들갑이라도 떨려나 보다.
인터넷 열고 뉴스 찾고 아무튼 클릭 몇 번 하기도 상당히 귀찮았다.
"뭔데? 그냥 네가 얘기해라."
"천하제일엔터 뉴스 하나가 떴습니다."
천하제일엔터란 말에 소파에 대자로 누워 처자고 있던 조성환이 벌떡 일어나더니 원모 자리로 뛰어갔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저놈은 천하제일엔터의 30%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였다.
사실 그것도 알고 보면 예전에 조인철회장이 증여해준다고 계열사 중에 하나 고르라고 했을 때 그 회사 찍어준 내 덕이었다.
"천하태평도 아니고 천하제일이라고? 에이 찾아보기도 귀찮다. 그냥 말해봐. 여기서도 들리니깐."
"네. 천하제일엔터에서 이번에 자회사 하나 설립했는데 온라인 패션 스토어 사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김범룡 대표요. 온라인 패션 관련된 사업 하잖아요. 천하제일에서는 쇼핑몰은 물론이고 모자에서부터 신발, 그러니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 코디 가능하게 해주는 서비스까지 출시한다는데요? 게다가 하나만 주문하더라도 배송비까지 모두 무료라고 하고요."
"뭐라고? 정말?"
천하제일 같은 대기업이 스타트업 생태계까지 집어삼키려 들다니.
든든한 자금력으로 물량 공세를 퍼부어서 성장하는 산업에 뛰어들어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작은 업체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대기업의 횡포.
나도 꽤 오래 다녀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김범룡대표의 부재에도 기존 사업을 잘 재정비한다면 원금 정도는 건질 수도 있겠다는 한 가닥 희망이 저 멀리 허공 속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원금은커녕 그 반의 반, 아니 아예 한 푼도 못 건지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헛된 희망 고문을 갖지 않게 되고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러나 성환이의 표정은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마냥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게 살짝 보였다.
그렇다.
저놈은 좋아하고 있는 거다.
자기가 최대 주주인 회사가 한 걸음 더 성장했을뿐더러 주가까지 껑충 뛰어오르니 좋아서 죽는 거다.
초록 창을 열고 검색창에 천하제일엔터라고 쳐보았다.
스크롤을 조금 내리자 증권정보가 떴다.
일단 시뻘건 색이었고 시초가부터 지금까지 삐죽삐죽 높은 곳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
오늘만 5%가 상승하여 6만 원 역대 신고가를 찍었다.
성환이가 매입할 당시의 주가가 6천 원이었으니 열 배가 되었다는 건데.
헉!
이 자식 보유주식이 600억 원에서 몇 년 사이에 6천억 원이 된 것이다.
그것도 오늘 하루에만 300억 원이 올랐다.
"야 이 자식아!"
나도 모르게 욕이 뛰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욕설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성환이도 역시 방금 주가를 확인했는지 안면에 온통 미소를 머금은 채 돌아봤다.
"넵. 무슨 일이십니까 천대표님?"
사근사근한 말투.
오랜만에 재수 없다.
"좋냐?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이렇게 망해가는데도 천하제일엔터가 잘나간다니깐 좋아? 아주 좋아 죽겠어?"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쳐다봤다.
"그러면 만약 대표님이라면 어떨 거 같습니까?"
우문현답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니 나도 좋을 거 같았다.
좋다 말다 아예 소리라도 지르면서 사무실을 방방 뛰어다녔을 거다.
천하태평이야 원금 기준으로 딸랑 23억, 종전 평가 가치로 100억이었다고 쳐도 조성환의 지분율 35%를 고려하면 이놈 입장에선 최소 7억에서 최대 35억까지를 손해 본 거다.
하지만 천하제일엔터는 오늘 하루만 300억이 올랐으니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마치 인절미 한 팩과 인절미 먹으려고 손에 쥐고 입에 갔다 댔을 때 땅바닥에 떨어진 콩고물과의 차이 정도라고 할까.
"그래 네 말이 맞다. 좋아 죽는 게 맞는 거네."
"내 말이 그말입니다."
* * *
한 달 후.
김범룡의 회사는 만기가 돌아온 차입금을 상환하지 못하고 부도처리가 되었다.
우리 말고도 출자한 다른 네 곳의 벤처 캐피털에서도 역시 회생 불가라고 판단하였는지 한 군데도 추가 출자 등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인 걸 뻔히 알면서 물을 더 부을 수는 없는 법이니.
한편 신규사업에 진출한 천하제일엔터는 오프라인상으로도 스튜디오를 오픈하여 실제로 착용한다든지 소비자의 경험 니즈를 충족하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실시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패션 아이템을 아우르며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고 단기간에 패션플랫폼 월간 활성자 1위에 올랐다는 뉴스까지 보도되었다.
기사에는 최동욱의 사진까지 실렸다.
천하제일 그룹이 젊은 경영자를 수혈하여 공격적인 확장정책을 펴 건설, 식품, 증권, 화학, 엔터에다가 패션까지 저변을 넓히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성환이도 옆에서 그 기사를 보고 있는지 심각하게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환아 혹시 최동욱 나온 기사 보고 있냐?"
대답이 없다.
매우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데.
"천하제일엔터가 패션사업까지 진출하고 잘나가고 주가도 승승장구하니깐 정말 좋겠다. 그렇지?"
"그만하시죠."
"언젠 또 천하제일엔터 잘나가니깐 좋다며? 오늘도 주식 오르는 거 같은데? 뭐야 오늘만 해도 몇백억 번 거야?"
고개를 홱 돌려 눈을 희번덕거렸다.
더 놀리면 뭐라도 날라 올 것 같은 분위기라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제면 기사를 쭉쭉 넘기는데 관련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천하제일 그룹에서 온라인패션사업을 하는 천하제일엔터 자회사의 대표를 새로 임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임명된 대표의 사진 속 인물은 건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