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15화 (115/191)

115화 진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바로 성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채 한 번도 울리지 않았는데 바로 받았다.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네. 지금 나가고 있습니다. 차에 시동 걸고 있거든요. 하여간 성격 한번 어지간히 급하다니깐."

"아냐 아냐. 차 타지 말고 그냥 걸어서 나와."

"네? 걸어 나오다니?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걸어갑니까?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에이씨. 잔말 말고 그냥 운동 삼아 나와."

"운동을 집 놔두고 왜 길바닥에서 하지?"

헬스장도 아니고 집에서 운동을 하다니.

이제 보니 돈 많은 사람들이 호텔 헬스장에서 운동한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다.

집에 운동기구 몇 개도 못 들여놓는 사람들만 호텔 같은 데 가서 남들 땀 냄새 맡아가면서 열심히 땀 흘리는 거였다.

"그럼 운동하지 말고 그냥 걸어 나와라. 그 카페 말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와."

"네? 지하철? 우리 동네에 지하철이 다녀요?"

농담이 아니라 찐으로 놀란 말투였다.

마치 대단한 과학 법칙이라도 발견한 듯 유레카를 외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알기론 너 태어나기 전부터 다녔을 걸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그 집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지하철을 타본 적이 없어서."

예전 재벌 2세 출신의 대선후보가 토론에서 지하철 요금이 얼마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80원이라고 답했다던 게 떠올랐다.

그 당시에 들었을 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지만 지금 성환이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 창 지도를 열고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을 대충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너 혹시 티머니카드는 있냐?"

"티머니? 뭐지? 그거 트리니티보다 위급이에요? 이상하네. 분명 그거보다 높은 건 없다고 들은 거 같은데."

신용카드 등급으로 알아듣다니.

이 자식은 지하철은 물론이고 버스도 한번 타본 적이 없었나 보다.

티머니나 후불제 교통카드 기능 등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그보단 설명해준들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다. 됐다. 그냥 지폐 몇 장이나 들고나와라."

"지폐야 항상 두둑하죠."

"이 전화 끊지 말고 계속 걸어 나와. 혹시 누가 따라붙더라도 절대 아는 척하지 말고 그냥 걷기만 해. 특히 두리번거리지 말고. 그리고 이따 나 보더라도 절대 아는 척하지 말아라."

"뭐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누가 너 따라붙었어. 아무래도 마카오 카지노에서 네 사진 찍은 놈인 거 같아. 그놈이 너 계속 찍고 있다고 하니깐 일단 유인해야지."

"유인은 무슨 유인이요. 그냥 잡아서 족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무슨 형사라도 되냐? 아니 형사여도 그건 안되지.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십 분도 넘게 기다렸을까.

지하철 출입구 주변에 서 있는데 멀리서 성환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훈련소 마지막 코스인 30km 행군을 마치고 들어오는 것마냥 얼굴엔 오만가지 짜증을 잔뜩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성환이 뒤로 누군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홍콩 완탕 집에서 볼펜을 들고 큰 소리로 떠들던 그 남자가 맞았다.

"성환아! 3번 출구 쪽으로 내려와서 표를 사고 개찰구로 들어와."

"네."

성환이 지하철 출구를 찾아 계단을 내려가면서 인파 속으로 섞이자 뒤에 따라붙던 남자가 성환이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정장 상의 주머니에 꽂았다.

바로 저게 그 볼펜 캠코더다.

저걸 뺏어야 한다.

급하게 머릿속으로 그린대로 성환이에게 볼펜 빼앗을 작전을 설명해주었지만 별다른 추임새나 대꾸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성환아. 설마 이해 못 한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못 알아들은 거야?"

그러나 전화기에선 대답 없이 한숨만 전해져왔다.

멀찌감치에서 보니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뒤따르던 남자는 행여라도 들킬까 봐 재빨리 몸을 돌려 딴청 피우는 척했다.

"야 뭐해? 돌아보지 말라니깐. 그럼 따라붙는 놈이 눈치채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표 사라면서요. 아무리 봐도 표 파는 사람이 없는데요?"

"바로 앞에 기계 같은 거 있잖아. 거기다 돈 넣으면 돼."

두리번거리다 매표 기계를 발견했는지 앞에 서서 이것저것 눌러보며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뒤에 줄 서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답답해서 보다 못했는지 직접 표 사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만 원짜리 지폐를 넣고 일회용 카드가 나오자 성환은 거스름돈도 챙기지 않은 채 바로 개찰구로 향했다.

이어 아주머니는 왠 횡재냐 하는 식으로 두 눈이 반짝거리더니 거스름돈을 슬쩍 챙기는 것이었다.

쫓아가서 내놓으라고 하려 했으나 늦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빠른 움직임으로 이미 시야에서 한참은 벗어난 뒤였다.

"야! 거스름돈 안 챙겨?"

"거스름돈이라뇨?"

"지하철 요금이 얼만지 알아?"

"얼마긴. 만 원 아니에요? 아까 아줌마가 분명 만 원짜리 한 장 넣으라고 했는데."

"야. 그거야 천 원짜리가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아니다. 됐다."

그래.

지금 이 급박한 순간에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새가 어디 있냐?

그냥 도움받은 대가로 팁 좀 얹어드렸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5만 원짜리 안 넣은 게 어디냐.

지하철 요금이 만원이라니 대선후보로 나선 재벌 2세처럼 말도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80원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성환이 만 원짜리 표를 대고 지하철에 올랐다.

미행하던 남자도 성환을 따라 올랐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한 정거장을 지나 열차가 출발하자 성환이 갑자기 홱 뒤로 돌아서선 미행하던 남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뭐야? 이거 몰카 아냐?"

몰카란 말에 옆에 짧은 치마 입고 서 있던 여성이 갑자기 캭 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주위 사람들이 변태 보듯 쳐다보고 웅성웅성 대자 미행하던 남자는 매우 당황하여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결백하다는 듯이 두 손을 절레절레 저었지만 성환이가 그 남자의 주머니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펜이요!"

그 남자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내가 나서서 주머니에 꽂혀있던 볼펜 캠코더를 낚아챘다.

"제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미행하던 남자는 부지불식간에 얼음처럼 굳어졌고 난 몰래 빠른 손놀림으로 김철수이사의 볼펜과 바꿔치기했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김철수이사의 볼펜을 들어 보였다.

"에이. 오해네요. 이거 그냥 팬입니다."

그새 열차는 다음 정류장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그러자 재빨리 문밖으로 볼펜을 던져버렸다.

워낙 순식간이었는지 미행하던 남자는 내게 욕을 내뱉기는커녕 미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몸을 던져 문밖으로 나가서는 펜을 집어 들었다.

집어 든 펜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열차 문은 닫혔고 서서히 다음 역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이제야 자기가 당한 걸 알아차렸는지 심한 욕설을 내뱉으며 무섭게 노려봤다.

난 최대한 해맑게 웃으며 오른손 주먹을 내밀고는 세 번째 손가락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뽀큐!"

* * *

"와! 화질 정말 죽이네요. 007 영화 보는 거 같은데요?"

원모는 첩보영화에서나 보던 카메라의 성능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는지 탄성을 질러댔다.

"이거 봐 이거. 이런 걸로 찍으니깐 그렇게 가깝게 찍는데도 내가 찍히는 줄 몰랐죠. 내가 그렇게 눈치가 없고 둔하겠어?"

아무도 자기한테 둔하다고 한 적 없었는데 성환이 제 발이라도 저렸는지 혼자 구시렁댄 거였다.

드디어 화면에 성환이 얼굴이 처음으로 잡혔다.

화면은 성환이를 줄곧 따라다니면서 정말 초 근접해서 찍은 것이었다.

"원모야. 네가 말한 기생오라비 나왔다."

비꼬는 내 말투에 신경이 곤두섰는지 원모는 흰자를 희번덕거리며 노려봤다.

하나도 안 무섭다.

"알았어. 기생오라비가 아니라 오라버니라고 했었나? 계속 눈 그렇게 떠봐. 확 그냥 아주……."

원모는 체념한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잠시 후 성환이 김범룡과 함께 마카오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이 나왔다.

성환은 김범룡과 가벼운 실랑이를 하는 듯하더니 팔을 잡은 김범룡의 손을 뿌리치고는 블랙잭 테이블로 혼자 걸어갔다.

"저 때 저놈이 나한테 위층에 VIP 포커 테이블 있다고 가자고 엄청 꼬시더라구요."

"호구 잡는 거지. 저 때 따라갔으면 아마 빼도 박도 못했을 거야. 김범룡이랑 같이 엮여 들어갔을 거라구."

그때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는지 성환이는 끔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블랙잭 테이블로 간 성환은 칩을 바꾸려는지 딜러에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100달러짜리 열 장.

그것도 미화가 아닌 홍콩달러였으며 한국 돈으로 환산해봤자 겨우 10만 원을 살짝 넘을 정도였다.

성환이는 자기 말이 맞지 않았냐는 식으로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내가 뭐랬습니까?"

"진짜야?"

"아니, 보고도 못 믿어요? 칩 사는 거 똑똑히 안 보이십니까? 딸랑 1,000달러. 그것도 홍콩달러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요?"

"정말 초등학교 때 오락실에서 10만 원도 넘게 넣었단 말이야?"

지난번에 분명 초등학교 때 오락실 기계에 돈 넣는 수준이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 물었지만, 성환은 질문 자체가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내뱉으며 답했다.

"허허. 아니 그럼 오락실 갈 때 일이만 원 들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난 분명 일이천 원 정도 들고 갔던 거 같은데.

옆에 있던 원모 그 말을 듣고는 그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원모는 일이백 원 들고 갔던 모양이다.

세대 차이라고만 하기에는 금액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컸다.

"암. 그랬든지 말든지.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냐?"

말해놓고도 속으로는 살짝 빈정 상했다.

성환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였고 정작 나만 중요하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영상 속 성환은 바꾼 칩으로 블랙잭 딱 한 판에 모두 걸었다.

딜러가 건네주는 카드 두 장을 받고는 합이 21을 넘겨 버스트가 났다.

딜러가 성환이 칩을 가져가자 성환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재미없어. 이딴 걸 무슨 재미로 해!"

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카지노 밖을 빠져나갔다.

예전에 성환이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런 전체적인 스토리가 있었는데 앞뒤 다 자르고 순간순간의 장면만 뽑아서 카지노에 들어선 것과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만 사진으로 만들어서 언론사에 제보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불법 환치기를 한 것도 아니고 베팅한 금액이 거액도 아닐뿐더러 상습적으로 한 것도 아니니깐."

"그렇죠. 게다가 분명히 재미없다고 멘트까지 날렸잖아요."

"그래. 그럼 이 동영상 김철수이사님 오시면 아는 후배 기자분한테 제보로 넘겨버리면 되겠다."

잠시 후.

김철수이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외투를 벗기도 전에 우리가 있던 테이블로 와서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천대표. 있잖아."

"네. 이사님. 카페에 있던 그 자식 뒤를 밟아보셨나요?"

"그랬지. 내가 누군데."

답변은 시원시원했지만, 표정은 그와는 반대로 사뭇 심각해 보였다.

"왜요? 얻은 게 별로 없었습니까?"

"아니 그 반대야. 생각지도 않은 걸 본 거 같아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깐 선뜻 말하기도 곤란하고."

살짝 성환이 쪽을 흘겨보는 게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팩트는 팩트로만 생각하면 되니깐 상관없습니다. 그냥 말씀해주세요."

"아까 카페에서 한참 동안 그놈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시 통화하더니 밖으로 나가더라고."

"누가 만나러 왔나 보죠?"

"천대표가 따라갔던 사람인 것 같아. 카페 앞에서 누굴 만났는데 상대방이 뭔가 잘못한 게 있었는지 막 그 사람을 꾸짖고는 같이 차 타고 어디론가 갔어."

분명 미행하면서 찍으라고 시켰는데 찍기는커녕 볼펜 캠코더까지 뺏겼다는 보고를 받아서 그자를 사정없이 깬 것일 거다.

"따라가셨죠? 누구 만나던가요?"

"택시 바로 잡아서 따라붙었지. 그런데 그 차가…… 천하제일 본사로 들어가더라고."

설마설마했었는데 천하제일에서 붙인 놈들이었다.

성환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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