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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14화 (114/191)

114화 볼펜

'홍콩에서 합작사업을 추진 중인 젊은 사업가 마카오 원정 도박'

중국 내 신규사업 진출 명목으로 벤처 캐피털로부터 투자유치를 받은 후 자금을 빼돌려 마카오 카지노에서 탕진했다는 내용이었다.

연락이 안 되던 사이에 카지노에서 당기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김범룡을 몰랐었구나.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성공할 뻔하다가 도박으로 인생을 종친 놈에게 피 같은 돈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하니 애초에 반대했던 김철수이사나 원모에게 미안해졌다.

김철수 이사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대표 이제 우리 어쩌지?"

"죄송합니다. 나가리된 거 같네요."

원모도 간절하게 물었다.

"그래도 장기적으로는 보면 언젠간 회복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낮은 금액에 우리 지분을 처분할 수 있다든지요?"

꼭 방법을 찾겠다기보다는 한줄기 희망적인 말이라도 듣길 기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티끌만큼의 가능성을 얘기해봐야 희망 고문일 뿐 당사자에게는 괴롭기만 하지 절대 도움이 안 될 거다.

이럴 땐 그냥 확실히 단념시키고 그 이후를 모색하는 게 더 낫다.

"장기는커녕 다음 생이라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사업도 뒷전인데다 도박으로 탕진한 놈한테 다시 기회가 오겠어? 그냥 날렸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거야."

모두들 낙담한 표정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는데 성환이의 표정은 달랐다.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성환아. 이번 투자 건은……."

"네. 대표님이 알아서 하시죠."

내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내가 한 짓이 있어서 차마 욕지거리를 내뱉지는 못했다.

김이사도 상황 파악을 했는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 어떻게 매번 성공만 하겠어. 우리가 최근에 이룬 성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서도 세상을 다 잃은 듯 낙담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밥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도무지 마주 앉아 숟가락을 뜰 수 없었는지 아무도 점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가 싶다가도 간혹 여기저기 들려오는 한숨 소리가 사무실에 누가 누가 있구나 하는 걸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모두가 동의했으니 모두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긴 했지만.

왠지 나만 죄진 거 같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피해자 행세만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짜증도 났지만 따질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냥 입 다물고 노트북만 붙잡고 있을 수밖에.

늦은 오후.

김범룡 기사가 더 있나 넘겨보다가 관련 기사가 하나 뜬 걸 발견했다.

젊은 사업가의 마카오 카지노행에 재벌가 장남이 동행했다는 뉴스와 함께 사진이 한 장 실렸다.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 속 남자는 화이트진에 딱 달라붙는 알록달록 야리꾸리한 색깔의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이게 재벌룩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게 실루엣만 봐도 성환이었다.

어쩐지 김범룡의 뉴스를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불안한 표정만 짓더라니.

성환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매섭게 째려봤다.

그러나 성환이는 이유를 궁금해한다거나 눈을 피하지 않고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기사 네 얘기지? 설마 기사 나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오전에 연락받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나올진 몰랐죠."

"사진 너 맞지? 상습도박이라니!"

"저 사진이 나냐고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상습도박은 절대 아닙니다."

상습도박이라는 말에 김이사와 원모가 매우 놀란 듯 내 자리로 왔다.

내 노트북 화면 속 기사를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홍콩 출장 때 김범룡이랑 마카오 갔다 온 거였어?"

"가긴 했죠. 혼자 나가다가 로비에서 김대표를 만났는데 특별히 관광할 데 없으면 가까운 마카오라도 갔다 오자고 해서요. 거기 호텔 식당이 맛있다길래 그냥 따라갔었죠."

"같이 게임한 건 아니고?"

"같이 하긴요. 난 그냥 심심풀이로 잔돈만 바꿔서 살짝 하고 바로 일어났는데?"

"혹시 불법 환전소 같은 데 가서 환전하고 몰빵한 게 심심풀이란 말은 아니겠지?"

성환이 매섭게 노려봤다.

"날 어떻게 보고? 그렇게 양아치는 아니라니깐. 그냥 초등학교 때 오락실에 돈 넣은 수준 딱 그 정도만 했다고요. 그리고 블랙잭이나 바카라 같은 건 재미없어서 못하겠거든요? 화투처럼 머리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운으로 뽑기하는 건데 뭔 재미가 있다고."

이 정도 반응이면 거짓말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블랙잭보다 화투를 좋아하는 이유와 똑같은 말을 하니 믿음이 갔다.

"알았어. 그런데 김범룡이랑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면서 이 사진은 어떻게 찍힌 거야?"

김철수 이사가 화면 속 사진을 뚫어지게 살펴보더니 한마디 했다.

"이건 김범룡 찍다가 우연히 얻어걸린 사진이 아니야. 누군가가 조성환님을 쫓아다니면서 찍은 게 분명해."

"네?"

"조성환님이 사진 정중앙에 계시잖아. 게다가 얼굴도 잘 보이게 할라고 각도에 무지 신경 썼고. 이 정도 거리에서 노리고 찍었는데도 조성환님께서 몰랐다면 분명 소형몰래카메라 같은 걸로 찍었을 거야."

마카오 카지노, 얼굴이 보이도록 찍은 사진에 몰카라니.

홍콩 완탕 집에서 한국말로 떠들던 두 명이 바로 떠올랐다.

그들은 불륜 현장을 담으려는 흥신소 직원이 아니라 성환이를 노리고 온 놈들이었다.

팀원들에게 홍콩 완탕 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얘기들 들으면서 원모는 손뼉을 치며 아쉬워했다.

"대표님. 그놈들이 말한 분이 조성환님이란 걸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뭔 개소리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 자식들이 기생오라비 같다고 했다면서요."

말하면서도 실수란 걸 직감했는지 고개를 홱 돌려 성환이 눈치를 쳐다봤다.

그러나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수습을 하려는 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조성환님께서 기생 오빠처럼 잘생겼다는 말씀을 드릴라고……. 아니 아니지.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가 계시지. 그럼 기생 남동생…… 아니지,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나머지 핑계 댄다고 헛소리를 쭉쭉 읊어댔지만,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었다.

역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질 놈이다.

"원모야! 오라비는 남동생이라는 말이 맞거든. 오빠는 오라버니라고 한단다. 아무튼 이미 늦었다. 수습 안 돼."

원모는 전장에서 패하고 돌아와 처분을 기다리는 군인처럼 푹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조성환님."

성환이는 물론 기분이야 나빴겠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런 씨. 그럼 누가 나 찍으라고 시키기라도 했단 말이에요? 누구야 도대체?"

분노가 끓어오르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은 누가 그랬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 피해갈지가 중요하지."

"잘못한 게 없는데 피하다뇨?"

"언론에 나온 이상 사실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야. 도박 혐의로 기소된 김범룡대표와 같이 도박판에 갔다는 거 자체가 문제지."

"그래도 모자이크 처리했으니깐 누군지 모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사님?"

불안한 마음에 김철수이사에게 위안 삼을 만한 답을 듣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김이사는 냉정하다시피 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어차피 시간문제입니다. 곧 조성환님이라고 밝혀질 테니 적극적으로 아니란 증거를 모으는 게 낫습니다."

언론이야 의혹이 있는데 클릭 수가 따라붙을 거 같으면 사실관계 확인 없이 그냥 터트려버리는 게 자연스런 생리다.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다.

정말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오히려 당사자가 직접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

물론 가까스로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언론에선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일 테니 정정보도를 자세히 실어주지 않을 것이다.

정정보도가 나온다 한들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다면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일 테다.

억울하지만 빠른 시간에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김철수 이사의 우려대로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사진 속 인물이 천하제일그룹의 조성환이라는 추측성 보도가 이어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댓글 창에서는 성환이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수년 전 마약 사건까지 재소환되는 분위기였다.

성환이는 출근도 못 한 채 집에 틀어박혀 그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김철수이사가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며칠 동안 발로 뛰며 파악한 내용은 이랬다.

김범룡이 홍콩 출장 때마다 마카오에 들락거리면서 도박 빚을 지기 시작했고 빚은 시간이 갈수록 눈더미처럼 불어만 갔다.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자 일거에 갚을 방법이 투자 명목으로 필요금액 이상을 조달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합작투자에 50억이 필요한데 100억을 출자받았던 게 그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침 호구 하나를 데리고 오면 그 호구가 잃는 돈의 30%를 탕감해준다는 브로커의 말에 성환을 꼬드겨 카지노에 데려갔다고 했다.

물론 성환이 거기 앉아서 큰돈을 걸고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으나 여론이 좋지 않아 곧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조사한다는 소문도 나돈다고 했다.

대책 마련을 위해 성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이 알아보신 것도 얘기할 겸 우리가 안가로 갈게."

"어려울 거 같은데요. 회장님께서 말씀 한마디도 안 하시고 며칠째 거실에 앉아만 계세요. 손님 오실 분위기가 아닙니다."

지난번 마약 사건 이후로 이제는 불법도박이라니.

조회장은 아무리 아들이 자기가 아니라고 해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웠는지 꽤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럼 네가 잠깐 앞으로 나와. 우리가 아랫동네 카페에 가 있을게."

"네. 그럼 한 시간 뒤에 갈게요."

성북동 아랫동네에 안가와 가장 가까운 카페에서 김철수 이사와 함께 성환이 오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홀짝거리던 중 반대쪽 테이블에서 누군가 전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머리에 새까만 피부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분명 홍콩 완탕 집에서 봤던 그 흥신소 놈들 중 하나였다.

"그놈 오늘도 안 나왔다고?"

"……."

"나오는 차 번호마다 다 확인한 거야?"

"……."

"알았어. 계속 대기해. 모든 걸 찍으라고 지시받았으니깐 무조건 쫓아다니면서 아무거나 라도 다 찍어놔."

"……."

"그리고 마카오 때 찍어놓은 자료는 어딨어?"

"……."

"아직 그 볼펜에 들어있다고?"

내용을 들어보니 이놈은 지난번 홍콩 완탕 집에서 몰카를 찍었던 놈과 통화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성환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찍고 있었다.

모두 담다 보면 언젠간 작은 꼬투리라도 하나 걸리겠지 하는 식일 거다.

마카오에서 찍은 동영상이 아직 그 볼펜 캠코더에 있다고 하니.

결국 결백하다는 증거가 거기에 담겨있다는 말인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캠코더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

빠르게 짱구를 굴려 가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이사님. 혹시 파카 볼펜 같은 거 가지고 계세요?"

다행이다.

김이사가 속주머니를 뒤지더니 볼펜을 하나 꺼내 보였다.

"이거 말야? 기자 때 습관이 남아 있어서 아직도 이렇게 항상 가지고 다니지."

김이사가 건넨 볼펜은 홍콩 완탕 집에서 엿봤던 그 볼펜과 제법 비슷하게 생겼다.

"네, 다행이네요. 그거 저 좀 빌려주세요. 아니 그냥 주세요."

"어? 이건 왜?"

"저기 저쪽 테이블에 머리 짧은 사람 보이세요?"

고개를 돌리더니 내가 말한 사람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이 그때 홍콩에서 봤다는 놈들 중 하나에요. 통화하는 거 보니깐 아무래도 일행 한 명이 성환이 집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을 거 같은데요. 제가 성환이네 쪽으로 가서 그놈 따라붙을 테니깐 이사님께선 저기 저놈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주세요. 배후가 누군지 알아야 하니깐요."

김철수 이사는 결의에 찬 듯 단호한 눈빛을 띠어 보였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봐. 오랜만에 몰래 취재하는 거 같고 재밌겠는데."

기자 시절에 잠입하거나 몰래 따라붙어서 취재하는 건 수없이 많이 해봤을 테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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