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두음법칙
미팅을 끝마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김범룡 대표가 예약해 놓은 덕분에 근사한 식당에서 광둥요리를 먹은 후 밤이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실 단 몇 시간짜리의 미팅 한 번이니 1박이면 충분했지만, 이왕 온 김에 하루는 관광이나 하자는 성환의 말에 못 이기듯 2박 3일 일정에 동의했다.
홍콩은 아침부터 돌기 시작하면 하루면 대강 다 둘러볼 수 있다.
김범룡 대표는 내일도 다른 미팅이 잡혀있다고 하니 할 수 없이 성환이와 둘이서만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내일 몇 시에 만나지? 어디부터 보러 갈까?"
일정을 물어보는 내게 성환이 정색을 하며 쳐다봤다.
"네? 남자 둘이서 손잡고 관광지 돌아다니자고? 미쳤어요?"
자기 생각해서 그런 건데 괜히 기분 더러웠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아니. 어이가 없잖아요."
"나도 너랑 다니기 싫거든. 그냥 너 여기 잘 모를까 봐 안내해 줄라고 한 건데. 됐다 됐어. 그냥 모레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비행기 안에서나 보자."
"그러시죠. 굳이 만나서 공항 같이 갈 필요가 있나?"
그래.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관광은 혼자 다니는 게 최고다.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다음 날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세수만 한 채 호텔 조식도 거르고 바로 나갔다.
아무리 공짜라고 하더라도 하루에 먹을 수 있는 끼니 수는 정해져 있다.
한 끼라도 내가 메뉴를 결정할 수 없는 곳에 갈 수는 없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출장 때마다 아침에 들르던 차찬탱 집을 찾아갔는데 역시나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방문한 셈이니 내 기억보다도 오히려 가격이 저렴했다.
좁은 의자에 합석해 앉아 프렌치토스트와 도톰한 파인애플 번, 그리고 밀크티를 주문했다.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하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단내가 났다.
세 시간 정도면 바로 뱃살로 직행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 중에 살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매일 이렇게 다디단 걸 먹고도 살이 안 찌는 걸 보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밖에 나가 뙤약볕에서 몇 시간을 돌아다녀 보니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습고 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면서 아침은 물론이고 어제저녁에 먹은 것까지 모두 태워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때가 돼서 배가 슬슬 고파오자 얌차 식당에 들어갔다.
따로 주문도 할 수 있지만 여긴 종업원이 찜통을 들고 다니면서 딤섬을 내주는 곳으로 재미있을 거 같아 몇 개를 골랐다.
그중 하나 쪼그만 찐빵같이 생긴 하얀색 딤섬을 베어 물었는데 물컹하면서도 오독오독한 뼈 같은 게 씹혔다.
뱉어보니 닭발이었다.
원래부터 닭발을 좋아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한 번의 씹기로 그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불의 향을 잔뜩 머금은 매운맛 때문에 발 냄새를 맡지 못해서 맛있다고 착각한 것이었지, 닭발에서 실제 고린내가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어쩐지 족발도 갖은 한약재를 넣더라니, 맛보다는 냄새를 가리기 위한 용도였나보다.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 발길 닿는 곳이면 아무 데나 다니다가 어두워지자 트램을 타고 야경으로 유명한 빅토리아 피크에 올랐다.
높은 빌딩마다 갖가지 조명들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반드시 저 마천루 중에 하나를 사리라 마음먹었다.
나중에 여자친구라도 생기면 건물 조명을 이용해서 고백할 수 있도록.
그런데 왠지 건물 하나로는 부족할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아예 붙어있는 빌딩 세 개를 사는 거다.
하나는 'I' 다른 하나는 'love',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you'라고 쓰면 되겠지 하니 괜히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버스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유명한 완탕 집이 있다는 게 떠올라 바로 찾아 들어갔다.
항상 만원에, 줄 서는 곳이었지만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는지 손님이 많지 않아 바로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 한국말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복장은 관광객처럼 보였으나, 짧은 머리와 시커먼 피부에서 느껴지는 험궂은 인상과 함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봤을 때 관광객은 절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 잘 찍었어?"
"네. 형님. 제가 누굽니까?"
"마카오 카지노는 사진 찍는 거 안 되는 거 아닌가?"
상대방의 질문에 남자는 주위를 쓰윽 하고 둘러봤다.
아무래도 한국말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미쳐 고개를 돌리지 못해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안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요즘 누가 카메라를 대놓고 찍습니까? 이런 게 있는데."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볼펜을 들어 보였다.
딱 봐도 평범한 파카 볼펜처럼 생겼는데 몰카에 쓰는 특수캠코더인가보다.
외국이니까 저런 말도 쉬쉬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나저나 분명히 나랑 눈까지 마주쳤는데.
내가 전혀 한국 사람 같이 생기지 않았단 말인가?
혼자 온 관광객은 없다고 생각했겠지 하고 그저 자기 위안 삼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 확실히 나오게 찍었지? 얼굴 안 나오면 한 푼도 못 받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 옆에 딱 붙어서 동영상까지 다 찍어놨으니깐요."
딱 봐도 한국에서 출장 나온 흥신소 직원이다.
아마도 불륜 커플들이 마카오 카지노에 출입하면서 도박과 각종 유흥을 즐기는 걸 담아 가려고 한 것일 거다.
조만간 유력가 집안에서 이혼 소송한다는 기사 한 줄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호텔에 돌아오자 종일 먹고 마시고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는지 녹초가 되었다.
나 역시 여행에 진심인 한국인인 것도 있었겠지만 자유시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어서 오버 페이스 했나 보다.
전화하면 또 지랄할까 봐 전화할 수도 없고 귀를 쫑긋 기울였지만, 옆방에선 성환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친구랑 술 먹나 보지 생각하고 침대에 눕자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하자 잠시 후 성환이도 나타났다.
역시나 쿨하게 수속 같은 모든 절차는 각자 알아서 마치고 비행기 안에서 만난 것이다.
술 냄새도 나는 것 같지 않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어제 뭐 했냐?"
"그냥 이것저것요. 친구도 만나고."
"넌 홍콩에도 친구가 있냐?"
성환이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전 세계 어디든 있는 게 친구 아닌가? 페북 안 해요?"
"그래, 위아더월드지."
"그거 그런 뜻 아닌데……. 에이 관두죠. 의미만 통하면 되지 뭐."
"여하튼 이번 출장으로 내린 네 결론은 뭐야?"
성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뗐다.
"어차피 지금 법인에 여유자금도 있는데 그냥 투자하시죠. 어차피 다른 데 마땅한 투자처도 없는데. 대신 다른 분들은 대표님이 설득하는 걸로 하시고."
'썩 내키지는 않지만, 대안도 없고 어차피 몇 푼 되지도 않으니 정 네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해라.'
뭐 이 정도로 얘기한 거다.
그러면 뭐 하러 왔지?
그래도 아무튼 동의는 했다.
다른 사람들 동의를 얻으라는 성환이의 조건은 매우 쉬웠다.
성환이가 동의한다고 하자 별다른 의문을 갖거나 저항 없이 모두가 동의했다.
천하제일로 출근하는 건환이도 전화만으로 간단히 동의 의사를 표했다.
비교적 빠른 시간에 별다른 이슈 없이 다른 네 군데의 투자회사와 20억씩 총 100억의 신규투자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천하태평은 김범룡의 회사에 종전 투자금 3억을 포함해서 총 23억 원을 투입했고 20%의 지분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 *
"원모야 아직 연락 안 돼?"
"네 대표님. 로밍으로 넘어가긴 하는데 받지를 않습니다. 뭐 홍콩이나 중국에 출장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거지. 다시 받을 때까지 걸어봐."
"에이 대표님! 예전에 사업하는 사람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원모가 짜증 난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예전에 3억을 넣었을 때랑 추가로 20억을 더 얹었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누구를 만나 어떤 비즈니스를 하든지 회삿돈으로 좋은 차를 빌려 타든지 말든지 별 상관도 안 하고 그냥 알아서 잘하겠지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아무리 미래에 잘 나갈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꽤 많은 금액을 투입했으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게다가 며칠째 전화도 하고 문자도 남겼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하니 불안감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며칠 후 원모를 다시 불렀다.
"전화했냐?"
"네. 그런데 로밍으로는 안 넘어갑니다. 한국 들어온 거 같은데요?"
"그래? 문자라도 남겨놔. 보면 바로 연락하라고."
원모는 귀찮다는 듯이 성의 없이 답했다.
"네."
기분이 살짝 상해 귀찮게라도 할 생각에 말을 번복했다.
"아니다. 그냥 네가 받을 때까지 전화 넣어. 받으면 바로 나 바꿔주고."
그러나 뜻밖에 원모는 그 정도로는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핸드폰을 들고는 있는데 연결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못 듣겠지 하고는 전화하는 척하면서, 지 할 일 다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핸드폰을 들어 원모 번호를 눌렀다.
벨 소리와 함께 내 번호가 뜨자 뜨끔했는지 원모가 꽤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뭐야? 설마 김대표한테 전화 안 하고 있었던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갑작스런 상황에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그냥 어버버버 얼버무렸다.
"죽는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실제로 통화버튼을 눌렀는지 통화연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역시 김범룡대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연락이 안 된다니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 * *
다음 날.
원모가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뭔가라도 발견한 듯 갑자기 소리쳤다.
"대표님! 떴습니다."
말투와 목소리에 담겨있는 감정은 단순한 놀람보다는 환희나 기쁨에 가까웠다.
"떴다니 뭐가?"
"뉴스에 김범룡대표 떴습니다. 천재 개발자 출신의 스타트업 경영자라고요. 지금 초록 창 뉴스 경제면 한번 보세요."
그럼 그렇지.
취재하느라 바빠서 며칠째 연락이 안 닿았었나 보다.
그러나 잠시 후 원모가 급격히 실망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에고. 아니네요. 이름이 다르네요. 뉴스에 뜬 사람은 김범용이네요."
클릭은 했지만, 창이 열리기까지 단 일이 초의 시간도 기다릴 수 없었다.
원모 자리로 뛰어가 화면을 응시하자 '천재 개발자 출신의 스타트업 경영자. 김범용 대표'란 제목이 들어왔다.
"아니야. 그 김범룡대표 맞아. 오타야. 기자가 두음법칙 한다고 김범용이라고 적었겠지."
원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에이 두음법칙은 첫음절만 해당하는 거 모르십니까?"
"뭐라고?"
"두가 머리 두자잖아요. 그리고 사람 이름은 첫음절이어도 두음법칙 안 해도 된다는 거 모르십니까? 초등학생도 아는 걸 설마 기자가 실수하겠습니까?"
원모가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면서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 보세요. 사진도 완전 다른 사람이구만. 에이 괜히 좋다 말았네."
원모 말대로 기사에 실린 사람은 우리가 알던 김범룡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나이나 이름은 물론 심지어 생긴 것까지 비슷하게 보였지만 분명 그가 아니었다.
식은땀 한줄기가 등짝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름만 듣고 사업도 대충 비슷한 거 같아서 오해했었나 보다.
어쩐지 하는 짓거리가 이상하더라니.
회귀 전 내 기억 속의 그 천재 개발자는 김범룡이 아닌 사진 속의 김범용이었다.
그렇다고 그저 낙담만 할 필요는 없다.
그 천재 개발자 출신 유니콘 기업 CEO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성공을 못 하리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안다고 그 많은 성공한 기업가들을 모두 아는 건 아니니 분명히 비슷한 이름의 김범용에 가려서 그렇지 어쩌면 꽤 성공한 사업가가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적당한 핑계로 위안 삼아봤지만 무거운 마음이 가라앉진 않았다.
다음 날 원모가 인터넷을 뒤지다 뉴스 하나를 발견했는지 소리쳤다.
"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
어제 기사를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절망감에 짓눌린 듯한 말투였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원모가 가리킨 뉴스는 해외 불법도박과 관련한 기사로서 김범룡을 지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