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홍콩출장
얘기할 게 있다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다니.
예전에 처음 투자받았을 때조차도 찾아오기는커녕 자기 회사에만 처박혀서 자기 할 일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몇 년 사이에 외모뿐만이 아니라 행동까지도 꽤 많이 변한 듯했다.
성공하면서 그에 따르는 돈맛을 보다 보면 어떤 누구라도 바뀐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화장실을 다녀온 성환이도 처음 보는 손님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내가 설명해주고 나서야 알아본 듯 놀라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랑 비슷한 걱정을 했는지 그리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대표님께서 출시하는 어플마다 시장에서 반응이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김범룡은 절대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문제라뇨.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사업이 잘돼서 신규사업까지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벤처 캐피털로부터 투자유치를 받을까 하는데 천하태평에서도 참여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보려고요."
초창기 우리가 투자했던 3억 원으로 몇 개 어플을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사업확장을 위해서는 큰 투자가 이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후속 투자에 따라올 거냐고 묻는 거다.
아까 성환이가 낮잠 자다 꾼 꿈도 예지몽이었다는 말인가.
손님이 빨간 보따리와 파란 보따리를 내밀었다는 얘기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성환이 조인한 이후에 천하태평의 첫 투자였는데 벌써 이런 선택의 시간이 오다니.
시간 참 빠르다.
"기업가치랑 투자 규모를 알 수 있을까요?"
"네 여러 군데 벤처 캐피털로부터 기업가치를 500억 원으로 인정받아서 20%인 100억 원 정도 신규 투자받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500억이라는 말에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투자유치 후 기업가치가 500억이라면 천하태평의 지분율이 원래 20%였으니 같은 비율만큼만 따라가면 100억이 된다는 말인데.
최대한 놀라지 않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보이려 했지만, 어찌나 떨렸는지 목소리에선 저절로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다.
"네에.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전 반드시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성환이도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꽤 기뻤는지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대표님께서는 저희가 창업할 때 엔젤 투자로 도움을 주셨으니 이번에도 기회를 드릴까 하고 찾아뵌 겁니다. 참여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자기 회사에 투자하는 걸 기회라고 표현하다니.
엄청난 자신감에서 나온 발언일 것이다.
이제 따라가느냐, 따라가지 않느냐 아니면 그냥 팔고 나가느냐.
세 가지 안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20%의 지분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규 투자 100억 원 중 20%인 20억 원을 투자해야 한다. 향후 김범룡의 회사가 쭉쭉 성장해서 기업가치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판단이 될 때는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장래가 불확실한데다 그렇다고 지금 팔고 나가기는 좀 아깝다고 생각되면 따라가지 않고 그냥 기존 주식만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추가로 자금을 투입하지 않는 대신 그만큼 지분율은 줄어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장이 멈추고 여기까지가 한계다라고 판단될 때는 바로 매각해서 현금화할 수 있다. 지금 기업가치를 인정해주는 투자자들에게 넘겨버리는 것이다.
물론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무조건 따라가는 첫 번째 안이 정답이지만 다른 주주들의 설득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다.
"저희는 물론 대표님과 회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 사이즈 투자면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회사 내부적으로 상의해보고 연락드리도륵 하겠습니다."
일단은 판단을 유보하고 시간을 벌겠다는 거였는데 성환이 이상한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님. 최소한 어떤 사업을 하실지 간단하게라도 물어보는 게 기본 아닌가요?"
김범룡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묻지 않았지만 정말 기본도 안 지켰다는 성환이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다.
"네. 대표님 혹시 신규사업계획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여기 준비한 게 있습니다."
김범룡은 가방을 꺼내 사업계획서를 건네주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는 신발추천하고 의상을 매치하는 어플을 출시해서 사업을 키우고 있지만, 국내 시장규모가 워낙 작아서 성장하는 데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럼 해외 진출을 고려하셔야겠군요?"
"네 맞습니다. 마침 중국에서 의류 관련 인터넷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는 홍콩법인과 연이 닿아서 이들과 중국 내 합작법인을 설립해서 우리 서비스를 론칭하는 걸로 협의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양사 간에 시너지효과를 보겠다는 거군요."
내가 김대표의 말끝마다 맞장구쳐주는 게 의도가 엿보였는지 성환이 매서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네, 저희 회사는 신발 같은 패션 아이템을 매칭하고 추천해주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홍콩법인 측에서는 중국 내 인터넷쇼핑몰의 운영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윈윈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사업계획을 들어보니 꽤 괜찮은 구상이라고 생각됐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회귀 전 내 기억에는 분명히 김범룡은 천재 개발자이자 은둔의 경영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패션 쪽이 아닌 공유경제와 관련된 사업을 주력으로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전해진 이미지는 실제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었다.
사업이라는 것도 처음엔 이것저것 하면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다가 다른 방면으로도 얼마든지 넓힐 수 있다는데 생각이 이르자 살짝 안도할 수 있었다.
사업계획을 들은 성환이는 여전히 확신이 가지 않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대표님. 저희 주주들과 모두 상의해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범룡 대표를 배웅하고 난 후 바로 성환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넌 저 사업계획이 별로라는 거야?"
"아니 사업계획이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젠데?"
"사람이 너무 많이 변해서요. 지난번에 창고 같은 데서 봤을 땐 냄새 나는 추리닝에 쓰레빠 질질 끌고 일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이제 일손을 놓은 게 아닐까 싶은데요."
"대표가 혼자 일을 다 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변하는 게 무슨 문제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거 아냐?"
성환은 역시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대표 입고 있던 외투 어떤 건지 모르죠? 분명히 예전에 내가 사려고 찜했었던 거 같은데. 팔렸다고 해서 못 샀단 말이에요."
"뭐, 옷 한 벌 좋은 거 걸치면 안 되는 거야? 회사 잘 돼서 돈 잘 버나 보지."
"그게 아니라 처음 사는 사람한텐 안 파는 브랜드라고요."
어떤 브랜드들은 돈 싸 들고 간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신상품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단골한테만 준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꽤 오랫동안 저러고 다녔다는 얘긴데 이미지와 괴리가 크긴 컸다.
"에이,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
"그러겠죠? 설마……. 아니겠지."
성환은 애써 부정하면서도 은연중에 자기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얘기한 거다.
김철수 이사와 원모가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방금 있었던 일을 공유했다.
"천대표! 지금 그 기업가치에 파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야?"
"네. 가능하죠. 신규 투자 안 따라가면 지금 80억에 팔 수 있을 겁니다."
80억이라는 말에 김철수 이사와 원모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뭐라고? 3억 투자해서 80억이 된 거라고? 불과 몇 년 만에?"
"그렇죠."
"그럼 팔고 다른데 투자하는 게 어때?"
예상대로 추가 투자를 따라가자는 내 의견에 반대했다.
김범룡이 어떤 사람인지 나중에 얼마나 크게 될지 모르니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다.
"이사님. 지금은 80억이지만 몇 년 뒤엔 800억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 팔아버린다면 그런 기회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김이사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봤다.
원모도 탐탁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회사 들어오면서 정문에서 봤는데요. 슈퍼카가 한 대 서있길래 누가 타고 있나 봤는데 지금 얘기 들어보니깐 김범룡 그 사람인 거 같습니다."
"슈퍼카라고?"
"네. 전 또 조성환님이 새로 뽑아서 앞에다 세워놓은 줄 알았죠."
뭐야.
아직 상장이나 대규모 투자도 일어나기 전인데다 그 정도로 큰돈을 벌진 못했을 텐데 벌써 치장에 신경 쓴다는 말인가?
"원모야 혹시 최근 재무제표 본 적 있어? 자기 돈으로 샀을 리는 없고 사더라도 분명히 회사 명의로 샀을 텐데 차량 운반구 같은 자산이 생겼나 봐봐?"
"네. 지난번 주총하고 나서 보내준 재무제표가 있습니다."
원모는 서랍을 열고 자료를 찾아서 한참을 살펴봤다.
"차량 운반구 늘어난 건 없습니다. 그런데 보증금이랑 지급수수료가 증가한 거 보니 리스로 처리한 거 같은데요?"
좋지 않은 징후이긴 하다.
회사경비로 비용 처리하면서 슈퍼카를 빌려 타다니.
돈만 많은 집 자제들이나 하는 몹쓸 짓을 따라하고 있는 거다.
짜증은 났지만, 천재 개발자의 미래를 알고 있는 마당에 어쩔 수 없이 쉴드를 쳐 주었다.
"얼마나 힘들었겠냐? 몇 년 동안 저녁은커녕 주말도 없이 빡세게 일하느라고. 그런 식으로라도 푸는 걸 테니 이해해주자고."
내가 들어도 설득이 안 될 정돈데.
김이사나 원모 역시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는지 굳은 표정을 거두질 않았다.
결론이 나지 않자 보다 못한 성환이 중재하듯 나섰다.
"직접 보고 오시죠."
"뭘 봐?"
"홍콩에 합작법인 설립한다고 하지 않았나? 홍콩 가서 합작파트너 직접 만나보고 판단하자구요."
나름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김범룡 대표가 비록 말은 우리에게 투자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고 많이 연습한 듯 줄줄이 설명한 걸 보니 약간은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었다.
그러니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을 듯했다.
* * *
김범룡 대표에게 연락하자 역시나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며칠 만에 김대표, 성환이와 함께 바로 홍콩으로 향했다.
몇 시간의 비행 끝에 우리 비행기는 사뿐히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밖에 한 발짝 내딛자마자 사우나에 들어선 듯 습하고 더운 기운에 숨이 턱 막혀왔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청량하고 산뜻한 봄바람이 코끝을 스쳤었는데, 여긴 습도가 90도는 넘어서였는지 한여름 서울 날씨보다도 훨씬 덥고 습해서 마치 찜통에 코를 갖다 댄 것만 같았다.
꽤 높은 불쾌 지수 때문인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말투에선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침사추이 부근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바로 미팅 장소로 향했다.
역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답게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인파 때문에 일직선으로는 몇 발자국 내딛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페리를 타고 센트럴 선착장 부근에 있는 합작파트너의 회사에 도착했다.
홍콩 파트너의 송부대표란 사람은 우리에게 사업계획서를 건네주고는 사업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대표가 보여줬던 자료와 대동소이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성환이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설명을 중단시키고는 영어로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들 회사의 중국 내에서의 실적과 시장점유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송부대표 역시 영어로 유창하게 답변했다.
실제 사이트를 열어서 일일 방문객 수와 매출액 그리고 성장률을 설명해주었다.
발표 내용만 보자면 상당히 잘나가는 업체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합작법인의 적정한 투자 규모는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환의 질문에 송 부대표는 준비된 듯 바로 답했다.
"양사가 각각 3천만 위안 출자하기로 논의 중입니다."
3천만 위안이면 원화 기준 50억 정도다. 김범룡대표가 얘기한 규모와 차이가 상당했다.
성환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바로 반문했다.
"그보다 많은 금액으로 투자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김범룡대표는 합작파트너 앞에서 갑자기 챌린지 받은 것에 당황했는지 대신 답했다.
"향후 중국 내 차입 여력이 안 따라주면 추가 출자가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자금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답변이었다.
어차피 두 번 할 거면 그냥 한 번에 출자 많이 받아놓는 게 나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