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10화 (110/191)

110화 술술 풀린다

장풍거사는 산세나 물길의 모양뿐만이 아니라 바람 냄새까지 오감을 모두 활용하여 내린 결론을 술술 읊었다.

풍수에 대해 잘 모르는 나마저도 묘하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하물며 나도 이런 느낌인데 당사자인 이장님에겐 더욱더 신뢰감을 주었는지 손뼉을 치며 격하게 맞장구를 치기까지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장님. 저희에게 땅을 파시고 할머니 묘는 좋은 곳으로 이장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땅을 팔라는 말에 경계심을 잔뜩 세워서 쳐다봤다.

하지만 장풍거사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이긴 하니 고민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한참 뒤 어렵게 꺼낸 말은 결국 '노'였다.

이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겄어. 아들놈 때문에……."

땅을 팔면 집도 그렇고 묘까지 이장해야 하는데 그러면 행여라도 아들이 찾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다.

지금은 아들이 가끔 자기 어머니 묘라도 몰래 찾아오는 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집에 들를 수도 있는데 땅을 팔아버린다면 그 가능성마저 모두 날아가 버릴까 봐 팔겠다는 결정을 쉽게 못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반은 넘어온 거 같으니 아예 나가리는 아닌 것 같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구려."

"여기 줄줄이 걸려 있는 게 신문 기사 같은데요. 혹시 기사 속에 사진이 아드님이신지요?"

자랑스러운 마음에 이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네. 우리 아들이요. 유명한 영화감독입니다. 이렇게 신문에도 나고."

헤드라인에 대서특필된 것도 아니고 그냥 문화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았을 거다.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뿐이었을 거다.

"아드님 영화는 보셨나요?"

"봤다마다. 목요일마다 서울에 이런 영화들 틀어주는 극장이 있어서 매주 가고 있구먼. 그렇지 않아도 오늘도 좀 있다가 갈려구."

목요일마다 서울로 일 나가는 게 아니라 독립영화를 보러 다닌다는 거였다.

행여나 아들이 찍은 작품이라도 나올까 하는 마음이었을 거다.

물론 본인에게 재미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들이 몸담은 영화판을 이해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몇 년간 집 한 번 들르지 않고 슬그머니 어머니한테 인사만 하고 돌아가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장님. 아드님과 무슨 사정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으나 이장님께서 아드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을 보니 곧 있으면 좋은 소식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인사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들러붙지 않는 내 모습에 이장은 약간은 안도한 듯 엷은 미소를 보였다.

장풍거사를 거처에 가까운 차가 닿을 수 있는 아랫동네까지 모셔드리고 성환이 다시 회사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다시 가자!"

"네? 다시라니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어제 그 가게지."

성환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쳇! 또 그 가맥집인가 뭔가 가서 막걸리 한잔 할라구요? 도토리묵 서비스 주니깐 아주 신났나 보네. 단골 났어 단골."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오후에 아들이 온 데잖아."

"어차피 설득 못 한다니깐요. 우리가 말해봐야 아들한테 씨알이라도 먹히겠냐고요?"

"아니, 우리가 아들한테 직접 말할 필요는 없어."

"그럼요?"

"우리끼리 말하는 거지. 영화감독 상대로 연기 한번 해보자고."

"무슨 연기?"

"그 할머니 얘기 기억 안 나? 이장님 아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막걸리 사러 온다는 말?"

성환이와 난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서 자체 대본을 만들고 대사를 쳐보면서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나 역시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몇 마디 주고받는 것뿐인데도 연기가 아닌 척 연기를 하려니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그래도 열 번 이상 주고받으며 합을 맞추었다.

우리가 가게 앞에 차를 대자 주인 할머니가 단번에 알아보고는 버선발로 나와서 반겼다.

"에고, 또 왔어?"

"네. 도토리묵이 너무 맛있어서요. 오늘은 서비스 말고 그냥 주문할게요. 계란말이랑 스팸구이도 주시구요."

할머니는 싱글벙글하며 햄을 집어 들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진짜 스팸으로 집었다.

역시 단골의 힘이 세긴 세다.

냉장고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내 들고는 바깥쪽 평상에 자리했다.

어느덧 봄이 왔는지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따스함이 실려있는 게 느껴졌다.

거기다 계란 부치는 냄새까지 얹혀서 배에서 저절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안주가 나와 허겁지겁 집어 먹는 사이 멀리서 차 한 대가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엔진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역시나 가게 앞에 멈추고는 남자 한 명이 내리는 것이었다.

이장님의 아들 장태환감독이 분명했다.

성환이에게 눈짓을 보내자 알아듣고는 큰 소리로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 이장님 왜 이렇게 안 오시죠?"

"아참! 그러고 보니깐 목요일마다 서울 올라가신다고 했었네. 영화 보신다나 뭐라나. 오늘은 늦게 오시겠는걸?"

"뭐라고요? 노인네가 영화는 무슨 영화?"

"몰라. 아들이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데 아들 영화 한번 보시겠다고 매주 가신다나 봐."

"그래요? 아들 얘기는 한 번도 안 하시던데?"

"아들이 집에 발길을 끊었다고 들었어. 들리는 말로는 자기가 아들 앞에 나서기 미안해서라나 뭐라나. 암튼 예전에 맘에도 없는 말 한마디로 크게 상처 줬다고 아들한테 연락 한번 못하겠다고 하셨어."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아들놈이 그런 것도 모르고 왕래 한 번을 안 하다니 이장 어르신 참 불쌍하네요."

"그러게. 그 아들이란 놈은 온 이장님 댁 안에 뭘로 도배해놓은 지도 모를 거 아냐?"

내가 생각해도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국어책을 읽는 듯한 말투도 전혀 없었을뿐더러 너무 자연스러웠다.

장태환은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내 들고서 계산할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가 엿듣고 있는 게 티가 났다고 느꼈는지 짐짓 아무 일도 아니였던 것처럼 헛기침 한번 내뱉고 할머니께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고는 차에 올랐다.

나도 탁자에 5만 원짜리 한 장을 올려놓았다.

"할머니, 잘 먹었습니다. 거스름돈은 괜찮아요."

할머니는 버선발로 문밖까지 나와서 우리가 차에 올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장태환의 차를 뒤 쫒았다.

예상대로 역시 어머니 묘소로 바로 가지 않고 이장님댁 앞에 차를 대는 것이었다.

우리도 멀찌감치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는 살금살금 다가갔다.

장태환은 대문 밖에서 까치발을 들어 안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는 문을 살짝 열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아들이 언제고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잠가놓지 않았었나 보다.

한참 만에 문 밖으로 나온 장태환은 멀리서 봐도 어깨를 들썩거리는 게 흐느끼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서 마루고 방이고 온통 자기 사진과 기사들로 도배되다시피 한 걸 확인한 게 분명했다.

물론 동의서에 사인 받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의도치 않게 주고받은 상처 때문에 오해가 쌓여 오랫동안 부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게 해주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성환도 마찬가지였는지 훈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다음 주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저기 천태평씨신가요? 지난주에 명함 받았었는데."

역시나 이장님이었다.

비록 수화기 건너편이었지만 지난주보단 한결 밝아진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네, 이장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혹시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조만간 지난번 그 풍수가 선생님과 같이 뵐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오늘이라도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장풍거사를 모시고 다시 한 번 이장님 댁을 찾았다.

딱 봐도 지난주의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진 듯 한층 밝아진 얼굴이었다.

마루에 앉자 차를 내오면서 말을 꺼냈다.

"사인하겠습니다. 이제 이 동네에 꼭 붙어있지 않아도 돼서요."

"네? 아드님과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이장은 미소를 머금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강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스쳐 갔다.

지난주 집에 들어간 장태환 감독은 자기가 이제껏 오해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느꼈을 것이고 아버지를 다시 찾아왔을 것이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부자간에 마주 보고 서서 특별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는 장면이 스쳐 갔다.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이건 내 상상이 아니었다.

정말 회귀하기 전에 극장에서 봤던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제목은 가물가물했지만, 장태환 감독이 만든 영화로 부자간의 관계 회복에 관한 내용이었던 게 기억났다.

장태환 감독은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서 이를 영화화했던 것이었다.

평단과 관객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영화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출품해서 상까지 받았던 기억도 뒤따랐다.

이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은 조건이라고 했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고 마치 사정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말씀해보시죠."

"땅을 팔면 여기 집도 이사해야 하지만 마누라 묘도 같이 이장해야 해서요."

조용히 장풍거사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다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들 일도 잘 풀릴 수 있게요."

장풍거사도 상대방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는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를 읽은 듯 성환이 나섰다.

"거사님. 이장님 사정이 딱하신 거 같으니 바쁘시더라도 저희 집안에서 부탁드린 일이라고 생각해주시고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교적 정중한 요청에 장풍거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환이 한마디 덧붙였다.

"사례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사례는 괜찮습니다. 그저 이분께 도움드리는 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어쩐지 실력이나 명성에 비해서 꽤 누추한 곳에 기거하더라니, 돈보다도 다른 것들을 더 중시하는 분인 것만 같았다.

며칠 뒤.

아들과의 관계도 회복되고 장풍거사의 도움으로 부인 묘를 이장할 곳까지 찾을 수 있자 이장님은 약속대로 계약서와 동의서에 사인해 주었다.

더군다나 이장님과 뜻을 함께하는 몇몇 분들이 같이 사인을 해줌으로써 유수호 대표가 내건 조건 그 이상을 충족할 수 있었다.

성환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유대표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단하십니다. 천대표님."

유대표는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맞이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단순히 돈 빌려주는 게 아니라 자본투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마다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결해주셨는데요."

"네. 이번 프로젝트 같이 크게 한번 성공시켜보시죠."

"이번 건 마무리되면 다음 사업할 때도 힘을 빌려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장기적인 사업 파트너 관계를 가져가자는 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돈이 덩굴째 굴러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빌리긴요. 대표님 수완이 너무 좋으니 저희가 오히려 도움받는 거죠."

미팅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약속대로 100억을 투입하긴 했으나 천하태평의 지분율을 유대표에 근접하게끔 높게 가져갈 수는 없다고 해서.

아쉽지만 자본투자 50억에 대여금 50억으로 합의를 봤다.

대여금 50억 원은 대박증권의 대출이 실행되기만 한다면 바로 두 배인 100억으로 회수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자본투자를 한 50억은 몇 년 뒤 분양이 완판되고 사업이 종료되면서 따따따블 이상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속된 말로 청진기 한번 대보면 딱하고 견적이 바로 나오는데 최소한 삼십 배, 적어도 1,500억 이상은 당길 수 있는 사이즈다.

분양 후 준공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걸리긴 하겠지만.

내년에 암호화폐 거래소가 설립된다고 해도 초창기에 당장 크게 뛰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이 부동산개발 건의 수익률이 더 좋을 수 있을 것 같다.

비트코인인 가격이 횡보하고 있을 때 이 투자 건을 마무리하여 회수한 돈으로 몰빵하면 그만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