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명당
나가려는 성환이 목덜미를 붙들고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혔다.
"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성환이 기분 나빴는지 팔을 뿌리치고는 떽떽거렸다.
상소리를 하려다 간신히 참는 것처럼 보였다.
"2차 하자고. 1차 내가 샀으니깐 2차는 네가 사라"
어이가 없었는지 역정도 못 내고 실소만 내뱉었다.
"허. 뭐라고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다그쳤다.
"조용해 봐. 지금 밖에 이장님 와 있단 말야?"
성환은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목을 빼고는 집중했다.
"네? 정말?"
"안 들려?"
성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답답하다는 듯 문을 살짝 열었다.
"이제 들리냐?"
"하여간 귀 엄청 밝다니깐. 언제 들었지?"
"들리냐니깐?"
"네네 가만있어봐요. 들릴까 말까 하니깐."
문을 살짝 열어놓으니 성환이도 살짝 들리는 듯 초집중 모드로 돌변했다.
나갔다가 바로 들어온 게 이상했는지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뭐 하는 거야 이게?"
"네 할머니 너무 맛있어서요. 다음에 또 온다고 했잖아요. 지금이 다음이에요. 안주는 두부김치랑 제육볶음으로 내주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좋은지 주방으로 곧장 들어가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밖에서는 이장을 포함한 동네 어르신들이 나누는 얘기 소리가 들렸다.
"그냥 팔면 어떤가? 값도 제대로 쳐 준다는 거 같은디."
일행의 말에 이장 할아버지가 바로 역성을 냈다.
"안 판데도?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인다니깐."
티격태격하면서도 술자리가 꽤 무르익고 있었다.
남자 특히 남자 어른들의 특징은 술이 들어가면 평상시 했던 얘기 하고 또 하는 거다.
밖에 계신 어르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행들의 소소한 생활은 물론이고 이장님의 사정까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장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과 몇 년째 연락이 끊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환인 아직까지도 집에 안 왔어? 자기 엄마 보러도 안 와?"
"집엔 아직 안 왔어. 그래도 가끔씩 지 엄마 묘소는 찾는 거 같어. 어쩔 때 가보면 누가 막걸리랑 꽃이랑 놔뒀더라니깐. 태환이겄지."
"괜찮아. 이제 금방 오겠지."
"아녀. 안 올 거여. 벌써 몇 년짼데. 더구나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오겄어."
"뭐라고 했는데?"
"장례 치르고 나서 불러놓고 한마디 했지. 영화한다고 밖으로만 싸돌아다닌다고 지 엄마 맘고생만 실컷시키고 이제껏 아픈 것도 모르고 뭐 하는 짓거리냐고 쏴붙였지."
"에휴에휴. 왜 그랬나."
부인을 잃은 속상한 마음에 한마디 한 거였겠지만 그 한마디가 아들 가슴엔 비수로 꽂혔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힘들었을 거고 그 죄책감과 그걸 일깨워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에 집에는 발길을 끊었을 것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 자리가 묫자리로 안 좋다는 데도 그러는가? 태환이 일도 잘 안 풀리는 게 그 이유일 수도 있는데 아예 이참에 묘를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절대 안 되여. 나는 안 보고 가더라도 태환이가 가끔씩 찾는단 말여. 이장이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저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끊어졌다고는 해도 막상 그 마지막 한줄기 연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그래도 어머니 묘 찾아오는 길에 언젠가 한 번은 들르겠지 하고 믿고 있는 거였다.
성환이도 대강 그 심정을 이해했는지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 할머니가 주문한 안줏거리를 내왔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주문하지 않은 도토리묵이 상에 올랐다.
할머니를 쳐다보자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았는지 손바닥으로 내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 건 서비스여."
"네. 감사합니다."
하루 만에 단골이라도 된 듯 서비스 안주까지 나오고.
역시 팁의 위력은 막강하다.
"근데 지금 밖에 소리 엿듣는 것이여?"
우리가 대화도 없이 귀를 쫑긋거리고 밖에 소리에만 집중하는 게 티가 났는지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게 아닌데 들려서요. 밖에 저 할아버지 사정이 딱하시네요."
할머니도 맞장구치듯 손을 저었다.
"맞아. 아들 하나 있는 게 좋은 대학 보냈다고 경사 났다고 하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영화 찍는답시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나 보더라구."
"부모님 속이 꽤나 상하셨겠네요."
"그랬겄지. 나중에 지 엄마 그렇게 되고 나서도 지금이 몇 년째야. 아직도 그렇게 속상해하니."
"누가요? 아들이요?"
"그려."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매주 목요일인가? 오후에 여기서 막걸리 한 병 사다가 지 엄마 묘소 찾아가나 보더라고. 이장이 목요일 오후마다 서울로 일 나가는 거 아니깐 안 마주 칠라고 그러는 거겠지. 이장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서 말도 못 해주고 있다니껜."
가게 벽에 달린 달력을 보니 오늘이 수요일이었다.
"그럼 내일도 오겠네요?"
"그러겄지."
"그런데 영화한다고요 아들이? 명문대 나오고?"
"그려 태환이라고 아는가?"
장태환이라면 그 영화감독?
천만 관객을 동원한 메가 히트작은 없지만, 상업적으로도 그렇고 예술적으로도 나름 알아주는 꽤 성공한 영화감독의 이름이다.
지금쯤이면 아직 장편영화 입봉작은 나오지 않았겠지만, 독립영화판에서는 꽤 지명도도 있고 실력도 인정받는 위치였을 것이다.
왠지 그 장태환감독이 이장 할아버지의 아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내일 온다고 하니 그때 확인해보면 될 것이다.
뭔가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도 같았다.
"알 것도 같아요. 그 이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요?"
바깥에 어르신들은 술 몇 병을 더 마시더니 꽤 취한 듯했다.
이장님이 가지 말라고 붙잡는데도 먼저 마시고 있던 두 분은 한계에 왔는지 집에 간다며 팔을 뿌리치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할 수 없는 듯 이장님도 남은 막걸리 한 병을 들고는 쓸쓸히 귀가했다.
성환이도 지겨웠는지 바로 재촉했다.
"가죠. 이제. 이게 몇 시간째야."
"그래 내일이 목요일이니까 오후에 다시 오자. 내일 아들을 만나서 설득해 보는 거야. 내일도 내가 살게."
성환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대표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대목이 말이 안 되는 거지?"
"우리가 설득한다고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보려고나 하겠어요? 부모 자식 사이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거 같으면 와도 벌써 왔겠지."
성환은 비슷한 입장이 돼 본 적이 있었는지 부자 관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성환이 말대로 제3 자가 설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당사자들 모르게 우연히라도 마주치게 한다고 한들 바로 뒤돌아선다면 할아버지 생전에는 아예 다음번을 기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설득하는 게 어렵겠네."
성환은 뭔가 묘안이라도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풍수로 접근하는 게 어떨까요? 아까 묫자리가 안 좋으니 어쩌고 했잖아요."
"풍수 그거 다 미신이잖아."
"아직도 안 믿어요? 천하제일그룹도 그렇게 컸다니깐. 우리한테 빌라 산 대문그룹도 크게 번창할 거라는 말 대표님이 한 거 아닌가?"
"아니 그건 최회장을 보고 한 말이지 어떻게 풍수 때문이겠어?"
21세기에 그것도 유학파 출신에 이렇게 젊은 놈이 풍수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가끔 언론을 통해 접하던 재벌가의 풍수지리 관련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재벌 집안들은 대부분 이를 중히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자라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분 기억하죠? 우리 집안에서 도움받는 풍수가 선생님이요."
"장풍거사?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회귀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는 등 신기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그분 한번 모시고 와보죠. 뭐 밑져야 본전 아닌가? 거마비 두둑이 챙겨드릴 테니 그분도 손해볼 거 없고."
성환이 말이 맞다.
어차피 돈 싸 들고 쫓아다녀 봐야 팔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고 마땅히 다른 대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니 그냥 뭐라도 해보는 거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게다가 내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 * *
다음 날 아침.
버스 종점인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성환이 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역시나 바로 섭외했는지 장풍거사를 모시고 함께 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장풍거사는 엷은 미소와 함께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네, 결국 또 뵙게 되는군요."
결국이라니 통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자세히 물어볼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제 갔었던 이장님 댁 뒷산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도 이 산에서 도대체 그 묫자리를 어떻게 찾을까 고민했었지만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울창한 숲이 아닌데다 전부 다 둘러봐도 묘가 딸랑 한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장풍거사는 묫자리를 보자마자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거사님이 보시기에도 정말 이 묫자리가 안 좋습니까?"
내 물음에 장풍거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다마다요. 이런 데는 애초부터 묫자리를 쓸 수 없는 곳입니다. 여기다 묘를 쓰면 남은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네? 뭐라구요?"
어쩐지 이 산에 묘라곤 달랑 여기 하나뿐이더라니.
게다가 장풍거사의 말이 지금 이장 할아버지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성환을 바로 흘겨봤다.
성환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두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가 장풍거사에게 미리 하나도 얘기해주지 않았다고 한 거다.
장풍거사는 흡사 냄새라도 맡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렁벌렁하며 킁킁댔다.
"바람도 탁합니다."
"탁하다뇨?"
"흉색이라는 뜻입니다. 냄새도 그렇고 색깔도 탁하게 보입니다."
"그게 보이십니까?"
"보이다마다요. 원래 길산도 아닌데다 바람도 흉색에 음풍으로 불고 있습니다. 여긴 묫자리로는 쓰는 곳이 아닙니다."
"쓰면 어떻게 되는데요?"
"자손들 일이 잘 안 풀릴 겁니다. 일이 안 풀리니 조상들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을 거구요."
성환이 언질을 준 게 아니라면 정말 장풍거사 말이 딱하고 맞아떨어진 거다.
잠시 후.
어디선가 컥컥하는 신음 소리 같은 게 살짝 들리는 게 근처에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묫자리 뒤쪽에서 아까부터 누군가 누워있었는지 옷을 털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바로 이장님이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게 방금 우리가 나눈 얘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장풍거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지요?"
엉겁결에 살짝 엿들었지만 자기의 상황과 일치한다는 생각에 장풍거사의 말에 확신을 가진 듯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묫자리가 좋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을 테니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장풍거사는 곤란하다는 듯 주저주저하자 이장님은 극구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차를 내오겠다며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마루를 둘러보자 신문 기사들을 스크랩해놓았는지 온 벽을 채울 정도로 가득했다.
대부분 독립영화 감독인 장태환에 대한 기사였다.
역시 장태환 감독이 이장님의 아들이 맞았다.
겉으로는 명문대를 나와 판검사 같은 출셋길도 마다하고 영화판에 뛰어든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거 같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묵묵히 꿈을 응원하고 있던 것이었다.
차를 내오던 이장님이 이제야 우리의 존재가 수상했는지 나를 보고 한마디 했다.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요?"
"네. 어제 잠깐 들렀었죠. 도시개발 때문에 이장님 댁 토지 매입한다고 했었던."
마치 속았다라는 생각이었는지 이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럼 아깐 다……."
쑈한 거냐고 물으려는 것 같아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파트단지라도 해도 집이니깐 풍수를 봐야 해서요. 이렇게 유명하신 풍수지사님을 모시고 둘러본 겁니다."
장풍거사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의구심의 눈빛을 거두었다.
"그럼 선생님 묫자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환이 말씀해주셔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장풍거사는 온화한 듯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묘를 옮기십시오. 멀지 않은 곳에도 얼마든지 땅의 기운이 좋은 명당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