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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08화 (108/191)

108화 조건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사업이익을 그냥 나눠주지는 않겠다는 거다.

내가 꼬신 대로 심사역인 진성이가 승인을 안 해줬을 거다.

그래서 대박증권으로부터 당장 대출이 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협의한 게 있는데 다른 금융기관을 주간사로 당장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방법이 뻔히 없는 상황임에도 유대표는 사정사정하듯 마냥 굽히지는 않겠다는 거다.

물론 우리 말고 방법이 없지 않냐는 듯 비꼬면서 대할 수도 있지만.

같이 사업하는 마당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 친구는 곧 업계에서 꽤 이름을 날리게 될 테니 반드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어떤 조건인지요?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설마 그냥 숟가락만 얹겠다는 건 아니시겠죠?"

"물론이죠. 어떻게든 이번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건 해야죠. 저희가 어떤 역할을 하면 되겠습니까?"

"지주 중에 그 동네 이장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그분을 설득해서 계약서 도장을 찍어 오는 게 조건입니다."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하다 하다 안 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져본 거일 수도 있다.

"어떤 분이신데요?"

"동네 터줏대감 같은 분이십니다. 보유 면적도 상당하지만, 그것보단 많은 주민분들이 이분 한 명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냥 '디시젼메이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분만 설득하면 많은 분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테고 그러면 면적 기준과 인원 기준으로 동의율을 충족시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돈 싸 들고 안겨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해보셨나요?"

유대표는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흘겨봤다.

"당연하죠. 땅값의 배를 쳐주겠다는데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된다며 버티고 있습니다."

성환이 끼어들어서는 물었다.

"혹시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 주겠다는 말도 해봤어?"

역시 성환이 스타일답게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냐는 거다.

"두 배 불렀을 때도 고민 한 번 안 해보고 안 된다는 걸 보니 절대 그럴 분이 아닌 거 같아. 이미 계약하신 다른 분들 눈치도 있고 해서 이분만 더 크게 챙겨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그럼 유대표님 생각에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겁니까?"

"저도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돈도 마다하는 걸 보니 뭔가 다른 게 있긴 하겠죠."

유대표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아무래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다고.

다른 사람들 몰래 살짝 한 뭉텅이 쥐여주면 되지.

아니면 차라리 자식들한테 직접 주는 방법만 찾는다면 증여세나 상속세도 피하고 일석이조가 될 수 있을 텐데.

생각보다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네. 그런 거라면 저희가 한번 해결해보겠습니다."

성환이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흔쾌히 답했다.

"우리가 해보지. 그 정도 조건이야 뭐."

유대표가 종이쪽지 한 장을 가만히 건넸다.

"여기 그 이장님 댁 주소입니다. 빠른 시일 내로 해결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예산 범위는 충분히 넓게 생각하고 계십시오."

세 배, 네 배까지도 쓸 수 있다고 언질해놓은 거다.

유대표는 할 테면 해 봐라는 식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성환과 함께 유대표가 알려준 주소지로 향했다.

서울 경계를 막 벗어나 달려가는데 회귀할 때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곳이 이미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차 있거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이미 가득 찬 듯 눈을 씻고 쳐다봐도 평지 같은 빈 땅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채 십 분도 가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덧 도착했는지 성환이 차를 세웠다.

비교적 평지에 산이라고 있어 봐야 뒷동산 정도였다.

누가 보더라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딱 좋게 생긴 땅이었다.

"여기 같은데요?"

"벌써 도착한 거야? 엄청나게 가깝구나."

"가깝긴. 베스트 드라이버인데다 차가 좋아서 빨리 온 거지."

비교적 높은 지역이었는지 차에서 내리자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대충 둘러봐도 녹지와 농지가 대부분으로서 주택과 비닐하우스 등이 듬성듬성 서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 그린벨트로 개발이 제한되어서 아직 이런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일 거다.

차가 서 있는 곳 뒤에는 파란색 철제대문의 오래된 단층 주택이 한 채 있었다.

인기척 때문이었는지 담 넘어 마당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개 줄 끄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성환이네 태오처럼 마당에 그냥 풀어놓고 키우는 것 같았다.

누가 왔다는 걸 알았는지 안에서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누구세요?"

그냥 잡상인 정도로 생각했는지 안에서는 문을 열지도 않고 물었다.

"실례지만 혹시 장필성 선생님 계십니까?"

"전데요. 누구신데요?"

"아 네. 저희는 선생님 댁 땅을……."

말 한마디 채 끝나기 전에 호통이 대문을 넘어왔다.

"아니 글쎄 안 판다니깐. 또 그러네. 확 그냥 개라도 풀어버릴까 보다."

안에서 문이라도 열 듯 손잡이를 잡는 소리가 나길래 못 열도록 재빨리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이 할아버지 이미 목줄이 풀려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 가까스로 문을 열리지 않도록 막아 세웠다.

비록 생긴 걸 보지는 않았지만 거친 숨소리와 짖는 소리만 들어봐도 보통 놈이 아닌 게 확실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개는 좀 묶어놓고 저희랑 잠깐 얘기 좀 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할아버지는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더 들을 거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니 됐대도. 그냥 가지 못해? 셋 셀 때까지 안가면 문 열 거야!"

"하나, 둘, 셋"

보통 일 초 정도는 쉬고 둘, 셋까지 부를 텐데 이 할아버지 어찌나 성격이 급한지 일 초 만에 셋까지 모두 세 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환이와 함께 바로 차에 올라타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야! 넌 덩치도 산만 한 사냥개 키우는 놈이 시골 똥개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냐?"

"소리만 들어봐도 키우는 개가 아니라 집 지키는 개잖아요. 물리기라도 하면 어쩔라구요? 천하제일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질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돈과 명예, 권력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

그런 건 먼저 살고 난 다음에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나저나 말 그대로 문전박대당했다.

게다가 다음을 기약할 수도 없는 상황처럼 보였다.

"이거 완전 나가린데?"

"도대체 몇 배를 먹으려고 저러는 거지? 지난번 한남동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반대로 우리가 당할 차롄가?"

"아니야. 꼭 그런 거 같진 않아 보여."

"내일 다시 한 번 가서 물어보죠. 얼마나 원하는지?"

"내일 또 가면 이번엔 곱게 안 끝날 거야. 최소한 소금 세례라도 맞을 거 같은데?"

"그런가요?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건가?"

"아냐, 하나 있긴 있어."

"뭔데요?"

사람에게 가장 약한 부분은 가까운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자식 같은 가까운 사람을 포섭한다면 의외로 쉽게 일이 끝날 수도 있다.

"이장 할아버지가 저렇게 완강하니 더 들이대 봐야 답도 없을 거 같고 차라리 가족들을 설득해 보는 거야."

"가족이요?"

"응 할머니도 좋고 이왕이면 자식들이 좋겠는데. 탐문이나 하러 가자."

차를 타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 동네를 몇 바퀴 돌아다녔지만, 사람들이 통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집 문이나 두드려서 이장 할아버지 가족에 대해 물어볼 수도 없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한참을 돌다가 마침내 마을 초입 어귀에 평상이 몇 개 놓여있는 오래된 가게가 하나 보였다.

오늘은 나가리 같고 그냥 배나 채우고 가야겠다.

슈퍼라고 하기엔 조금 작았지만 그래도 멀리서 봐도 가맥집 포스가 딱 느껴지는 게 이미 동네 어르신 두 분이 얼굴이 벌게진 채 낮술을 즐기고 있었다.

"저기다."

"동네 슈펀데요?"

"그냥 슈퍼 아니야. 딱 봐도 그냥 가맥집이야."

"잉? 가맥집?"

"응 가게 맥줏집이라고. 저기 앞에다 주차해라. 한잔하자고."

가게 앞에 차를 세워놓고 내리자 낮술을 들이키던 아저씨들이 우리가 딱 봐도 외지인 듯 보였는지 잔뜩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도 역시 한잔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서울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가격만 무지 비싼 짝퉁 가맥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수십 년전 개업할 때부터 이미 간단한 안주를 내어놓기 시작한 정통 가맥집처럼 보였다.

"우린 여기서 먹자."

"아니 왜 밖에 경치 좋은 테라스 놔두고 안에서?"

"저 사람들이 우리 외지인인 거 알고 경계하잖아. 그냥 여기서 간단히 한잔하면서 분위기 보고 가자고. 물론 넌 운전하니깐 술은 나만 먹고."

가게 주인인 듯 할머니 한 분이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스윽 하고 다가오더니 조용히 두꺼운 도화지 한 장을 건넸다.

메뉴판이었다.

빛바래다 못해 본래 색이 뭔지도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해져 있었다.

음식도 흘렸는지 여기저기 고춧가루나 된장 같은 게 묻어있었다.

성환이 표정이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혼자 드시죠. 전 생각 없습니다."

"안주만이라도 먹어."

"술도 안 먹는데 뭐하러 안주를 먹습니까?"

"내가 살라고 했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바닥을 휘저었다.

"그냥 얻어먹은 걸로 칠게요."

"알았어. 그럼 다음엔 네가 사는 거다."

성환은 귀찮다는 듯이 그냥 턱짓으로 답했다.

계란말이와 스팸구이를 시키자 할머니가 매대에서 계란 몇 알과 햄을 들고는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스팸이 아닌 좀 저렴한 사각햄을 드는 것을 봤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가격 자체가 워낙 저렴해 충분히 납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돌아다니니 배가 고픈 듯하여 밥도 겸할 겸 막걸리를 주문했다.

주문과 함께 기본 안주 삼아 도토리묵을 내주었다.

"야, 여긴 이런 것도 서비스로 주나 보네."

"언제까지 드십니까?"

"시킨 건 먹고 가야 할 거 아냐? 배고프면 너도 먹던지."

성환도 배가 고팠는지 차마 할머니가 만든 안주는 먹지 않았지만, 과자 같은 걸 몇 개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였으나 밖의 술판에선 이장과 관련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취기도 오르자 그냥 다음번을 기약하기로 하고는 계산대를 향했다.

주인 할머니가 주판을 펴 손가락을 몇 번 튕기더니 술값을 불렀다.

"삼만 원이여."

유치원 다닐 때 주산 학원을 다녀서 대충은 아는데 주판에 나온 숫자는 절대 삼만 원이 아니다.

더군다나 메뉴판 금액 보고 대충 계산한 것보다도 많이 나왔다.

"할머니 쪼금 많이 나온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돋보기를 끼고는 주판알을 다시 튕겼다.

"계란말이, 스팸구이, 도토리묵……."

"할머니 도토리묵 서비스 주신 거 아니예요? 저희는 안 시켰었는데."

"먹었잖는가."

"네?"

"먹었어? 안 먹었어?"

할머니 말이 맞았다.

안 시켰으면 안 시켰다고 말씀드리면 되는 거였다.

게다가 서비스였다고 생각한 건 그냥 내가 지레짐작한 거였고.

조용히 지갑에서 오만 원권 한 장을 꺼내서 쥐여드렸다.

"잘 먹었습니다. 거스름돈은 괜찮습니다."

"에이 그래도 어떻게 더 받드라고? 그냥 거스름돈 받제."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폐를 꺼내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아닙니다. 다음에 오면 또 잘해주세요. 오늘 정말 잘 먹었습니다."

성환이 비꼬는듯한 어투로 물었다.

"돈에 그렇게 철저하신 분이 오늘 웬일이지?"

서비스 아니었냐고 따지지도 않았는 데다 팁까지 챙겨드린 게 이상했었나 보다.

"그냥. 외로우신 분 같은데 맘 상하게 할 필요 있나. 잘 먹고 좋은 서비스 받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외롭다뇨?"

"딱 봐도 혼자 사시잖아. 세 시간 동안 가족은커녕 손님 한 명 안 온데다가 전화 한 통도 없었던 거 같은데."

강원도 첩첩산중에 혼자 생활하시는 어머니 생각이 나기도 했다.

물론 동네분들하고 매일 화투라도 치시니 다르긴 할 테지만 어쨌든 가족과의 만남은커녕 전화도 아주 드문드문하게 하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라도 자주 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마침 바깥에서 먼저 마시고 있던 어르신들 술판에 누군가 참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장씨 왜 이렇게 늦게 와? 우린 벌써 두 병씩 깠구만."

"아니 오늘도 또 서울서 땅 팔라고 사람들이 와서 말이지. 이것들이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질 않구먼."

문전박대당했던 이장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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