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물밑작업
유수호대표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성환이 기다렸다는 듯 따졌다.
"뭐지? 아깐 우리끼리 있을 땐 자본투자는 시간 오래 걸리고 위험하다더니. 수호 보더니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들이대는 거죠?"
"내가 들이댔냐? 아주 쿨하게 했는데?"
"쿨하다니? 무릎만 안 꿇었지 아주 눈빛으로 사정사정하더니만.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제발 자본 투자하게 해달라고."
아무리 봐도 그런 티를 낸 것 같진 않았는데.
성환이 이놈이 어느덧 몇 년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내 생각을 어느 정도 간파할 정도는 되었나 보다.
"유대표 말대로 이 프로젝트는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리고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알죠? 가만 보면 맨날 앞으로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맨날 이런 말만 한다니깐."
천기누설하지 않으려고 티 안 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부지불식간에 묻어 나오긴 하나 보다.
"알 수가 있나! 그냥 내 예감이지. 그런데 혹시 대박증권에 아는 사람 있나?"
"그건 왜요?"
"작업해야 할 거 아냐"
"작업이라니?"
"다시 돌아오게 해야지. 저쪽에서 무릎 꿇고 투자해달라고 사정사정하게끔."
성환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수호는 절대 그런 스타일 아니에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급할 땐 무슨 짓이든 못할까?"
외근 갔다 온 김철수이사가 둘 사이의 대화를 진작부터 엿듣고 있었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대박증권에 진성이 있잖아."
"진성이요?"
"왜 예전에 내가 IR 파트에 있을 때 데리고 있던 최진성 과장."
천하제일 재무팀 IR파트에서 근무하다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증권회사로 이직했던 친구였다.
"진성이가 거기 있어요?"
"그래. 천하제일 나간 뒤로 몇 번 더 이직하더니 지금은 대박증권에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심사역으로 있다고 들었어."
대박 증권을 다니는 데다 심사역이라니.
잘만하면 유대표가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사님. 저녁 약속 한번 잡아주시죠. 본 지도 오래됐는데."
"그럴까? 오랜만에 한우 어때? 그때 맡김 차림 그 집"
아무리 생각해도 오랜만 같지는 않았다.
"이사님, 혹시 우리 어제 회식한 데를 말씀하신 겁니까?"
김철수이사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아! 어제였나? 난 왜 이렇게 오래된 거 같지?"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하루 만에 바로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날 수가 있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난 아직 트림하면 어제 먹은 소기름 냄새가 콧구멍을 때리는데.
하긴 돈 잘 벌고 잘나가는 증권회사 다니는 후배한테 삼겹살 사준다고 하면 나올 거 같지도 않고 부탁도 해야 할 처지이니 묻고 따지고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법인 통장에 찍힌 금액이 얼마인데.
"그러시죠. 어차피 오늘 갈 것도 아닌데요. 뭐."
김철수 이사가 기분 좋게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진성이냐? 나다."
"……."
"그래 언제 시간 돼? 소주 한잔해야지! 태평이 알지? 지금 우리 회사 대표님이잖아. 천대표랑 같이 한잔하자고."
"……."
"그래? ……알았어."
김철수이사 전화를 끊고는 약간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요? 진성이가 시간 없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요?"
"진성이가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네."
약속 잡았는데도 시무룩한 걸 보니.
김철수이사가 어제 그 인상 깊었던 한우집엔 또 가고 싶지만, 막상 오늘 또 그 집으로 가자고 하기가 곤란해서였나보다.
"이사님. 오늘도 그 집 가시죠. 또 가면 어떻습니까? 쌀밥은 매끼도 먹는데."
"그럴까? 알았어. 내가 예약 넣을게."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 *
안내받은 룸에 도착하자 최진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밝은 조명에 눈이 부시는 거 같아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조명 때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최진성과장의 한층 넓어진 이마에서 반사된 빛 때문이었다.
몇 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가 있다니.
분명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한참 후배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잠시 내 기억이 잘못 됐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최진성과장은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그저 사람 좋은 미소로 웃어넘겼다.
"반갑습니다. 천과장님 아니 천대표님!"
"진성이?"
긴가민가하는 내 표정에 그저 휑한 자기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네 맞아요. 살짝 변했지만."
살짝이라니? 이 정도면 아주 역변대회 우승감이구만.
그래도 부탁하려고 불렀다는 걸 상기해서 말로 내뱉진 않았다.
"아니, 똑같은데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이 뒤따르지 않았는지 진성이는 빈말이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화제전환이 필요했다.
"진성아. 그냥 편하게 불러라. 우리 사이에 무슨 직함 따지고 그러냐?"
"그럴까요? 태평이형?"
예전 회식 때 술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마다 진성이를 비롯한 많은 후배들이 '내일부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묻곤 했었다.
내 기억에는 예스라는 답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적인 관계가 공적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공과 사를 나름 철저하게 분리하면서 조금 친하다고 해서 갈굴 거 살짝 누그러뜨리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반대로 상사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회귀한 이후에는 마음가짐부터 많이 바뀌었다.
"그래, 편하게 불러. 어차피 같은 회사도 아닌데. 아니 같은 회사여도 상관없지만."
예전과는 내 생각이나 말투가 많이 달라진 걸 느꼈는지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네. 그러죠. 형님."
역시 술안주 중에 상사 뒷담화만큼 맛난 안주는 세상에 없다.
진성이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예전 재무팀장들을 잘근잘근 씹어댔고 나와 김철수 이사는 맞장구치며 거들었다.
특히 진성이는 그중에서도 매주 금요일마다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모아서 주간 업무 보고하면서 깨던 임상무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청도로 파견 간 송지환과장이 샌드백 역할 하기 전에는 바로 진성이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말은 좀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 금융기관으로 옮긴다고 했었지만 지금 보니 임상무의 갈굼에 못 이겨서 그냥 탈출했었던 것 같다.
"형님. 그런데 임상무 다시 봤잖아요."
"보다니 어디서?"
"작년인가? 천하제일증권하고 협의할 일이 있어서 회의차 갔었는데 그때 상석에 앉아 있더라구요. 거기다 전무로 승진까지 하고서요."
"그렇지. 내가 엔터사로 옮길 때쯤 지주사 재무팀장에서 전무로 승진하면서 천하제일증권으로 영전했었지."
이 당시까지는 조직에서 까라면 까는 수직적 문화가 팽배했다.
어떻게든 밑에 직원들을 쥐어짜면서 역량 향상보다는 단기실적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게 중요했다.
친근하고 마음씨 좋은 상사들은 그렇게 하나둘 사라졌다.
남들보다 더 악랄하고 집요한 빌런들만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걸 지켜봐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기업문화는 서서히 바뀔 거다.
농업적 근면성보다는 유연한 사고와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가 도래하면서 예전의 그런 꼰대들은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갈 것이다.
"그래서 면전에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쏘아붙이지 그랬어?"
진성이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니요. 막상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거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미처 준비한 게 없었는지 그냥 훅 지나가 버리더라구요."
진성이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을 막상 마주쳤을 때는 예전에 괴롭힘을 받던 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잠시 멍한 상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뒤 정신 차리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면 이미 기회는 지나가 버렸을 테고.
다음 또 올지 모를 기회를 기약하며 그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전 기억에 술 몇 잔을 주고받으며 제법 거나하게 취해갔다.
"형님. 그런데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죠?"
"뭐긴 뭐야! 김철수 이사님한테 너랑 자주 연락한다고 들어서 너랑 같이 오랜만에 술 한잔하려고 부른 거지."
거짓말한 티가 났는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에이. 그냥 말씀해보세요. 천하제일에서 깨질 때마다 술 한잔 씩 사주시던 게 있는데 제가 무슨 부탁이든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사실은 갑자기 술은 당기는데 원모가 약속 있다고 튕겼을 때 옆 파트 진성이를 붙잡고 술 한잔하자고 꼬셨던 거였는데.
이걸 그렇게 좋게 받아들였다니.
살짝 미안했지만 어쨌든 하소연, 뒷담화를 들어주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태창지구라고 알아? 대박증권이 주간사 할 거라고 들었는데."
"물론이죠. 아파트단지 들어설 곳인데. 형님이 어떻게 아세요?"
"거기 시행사 대표랑 지금 얘기하는 거 있는 게 있어서. 거기 혹시 대출 승인이 나는지 나면 언제 실행될 건지 알아?"
대놓고 물어보니 진성이 표정이 살짝 굳어지며 주저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면 말한다면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나'라고 짱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두 손을 양턱에 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쳐다봤다.
'얘기해줘. 제발 아는 걸 말해줘'라고 사정이라도 하듯이.
진성이는 못이기는 척 침을 한번 삼켰다.
"뭐 저희만 들어가는 건 아니니깐요."
대출 규모가 커서 여러 금융기관에서 같이 들어갈 테니 어디서 샐지 모를 거라는 말이다.
"저희가 주간사를 맡을 건 맞고 지금 심사 중인데 약간 문제가 있는 건 있습니다."
"문제라니? 혹시 부동산시장이 지금 안 좋아서? 아님 사업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건가?"
진성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시장은 앞으로 좋아질 거로 보고 있고 사업성도 꽤 괜찮다고 보고 있어요."
"그런데 뭐가 문제지?"
"지주작업에 어려움이 있는 거 같아서요. 괜히 대출 먼저 일으켰다가 동의율 충족 못 시켜서 사업 나가리되기라도 하면 저희가 다 뒤집어쓰니깐요."
"브릿지론을 이용한다든지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그게 저희 내부기준으로는 자기자본 비율을 충족 못 해서 대상 자체가 아닌데, 워낙 사업성이 좋아서 영업부서에서 세게 밀어붙이고 있어요. 제가 심사 담당이라 고민 중입니다."
한마디로 수호개발이 자기 돈(자본)은 조금 넣고 남의 돈(대출)만 많이 끌어서 사업하려고 하는 거라 대출 승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래도 사업성이 매우 좋아 영업팀에서 밀어붙이고 있다는 거다.
잘만 이용하면 유수호대표가 사정하면서 굽힐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성아!"
"네. 형님."
"내가 천하제일에 있을 때 널 어떻게 가르쳤니?"
"네?"
도대체 뭔 소리 하냐는 듯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같은 파트도 아니고 그냥 술 마시러 데리러 다닌 거뿐 특별히 따로 가르치거나 한 건 없었다.
실패다.
"예전에 우리 재무팀이 어떤 부서였지? 리스크를 관리하는 부서였잖아. 넌 지금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그렇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업부서는 실적으로 밀어붙여야 하니깐 그렇다 쳐도 내부기준도 어겨가면서 승인해준다면 결국 잘못됐을 때 책임이 누구한테 가겠어? 승인해준 사람이 몽땅 뒤집어쓰는 거 한두 번 봐왔어? 영업부서야 일 터지면 뒷짐만 질 테고 기준도 충족 못 한 거 승인해준 네 탓으로만 돌릴 거 아냐."
꼭 진성이를 설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상시 가지고 있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했다.
진성이 표정이 제법 심각해졌다.
"맞아요. 뒷다리 잡겠다는 것도 아니고 위험을 피하자는 거지."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편의점에 안 들러서 그런지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의 그 숙취가 떠올라 도저히 맥주 몇 캔을 살 수가 없었다.
술자리 효력은 일주일도 안 돼서 나타났다.
"대표님. 수호가 보자는데요?"
성환이가 묻는 말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무슨 일이지? 잠깐 스케줄 좀 보고."
다이어리를 열어보려는데 성환이 혀를 찼다.
"뭔 스케줄? 맨날 사무실 소파에 누워있으면서. 암튼 지금 내려오라고 합니다."
밖에서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내려오라는 전화가 끝나자마자 벨 소리가 울렸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는 바로 유대표가 본론을 꺼냈다.
"자본투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급하지만 사정사정하지는 않겠다. 자기들이 승인해준 거다'라는 인상을 주려는 거였다.
아무렴 어떤가.
실질이 중요하지.
"네, 그럼 그렇게 하시죠."
악수를 건네자 유대표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