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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06화 (106/191)

106화 밥상에 숟가락

"어째 속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악수와 함께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자 상대방도 웃으며 답했다.

"덕분에요. 아까는 술이 덜 깼는지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쩐지 젊은 친구가 꽤 늦은 시간에 출근하더라니, 역시 건물주라서 그랬었나 보다.

술이 좀 깼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한껏 여유 있는 웃음을 내보였다.

원래 아는 사이라도 된 것처럼 인사말을 주고받으니 성환이 우리 둘 사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뭐야? 둘이 구면인가?"

"하긴 오늘 출근하면서 보긴 했지. 생명수를 나눠 먹은 사이라고 할까? 엄밀히 말하면 내걸 내준 거지만."

"뭔 소리지?"

친구가 성환이에게 몇 시간 전 출근길에서의 일을 대략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비슷한 면이 있네. 술만 마셨다 하면 다음 날 아무 때나 자기 멋대로 출근하질 않나. 평상시에는 이리저리 빼더니 한번 마시기만 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질 않나."

"내가 매번 그러냐? 오늘만 그런 거지?"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성환이 조소를 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수호라고 합니다. 성환이한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상대방이 공손하게 다시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네. 저는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관리비만 받으시는 착한 건물주님이시라고요."

'물론 관리비가 싸진 않지만요'라는 말까지 내뱉을 뻔했지만, 분위기상 적합하지 않는 것 같아 참아냈다.

보통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할 때 상대방의 이름을 주의 깊게 듣진 않는다.

어차피 곧 잊어버릴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물론 그럴 테고.

그래도 명함을 받고 나서 바로 명함집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이름을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는 제스처 정도는 취한다.

실제로 이름을 외우려는 게 아니라 존중한다는 의미로 쇼잉 한 번 해보는 거다.

그러나 이번엔 느낌이 싸한 게 사뭇 달랐다.

유수호라고?

이름이 왠지 모르게 귀에 익었다.

명함을 들어 제대로 살펴보니 수호개발 대표이사라고 적혀있었다.

이 친구가 바로 부동산개발업계의 큰손인 그 유수호?

성환이 친구라길래 막연히 그저 좋은 집안에서 입에 금수저 물고 태어나 부모님이 마련해준 종잣돈으로 손쉽게 성공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회귀 전을 기억을 떠올려보니 얼추 이 정도 또래에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던 게 생각났다.

가끔 뉴스를 통해 보던 인상과 비슷한 게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혜성처럼 나타나 손대는 프로젝트마다 완판 행진을 이어가며 젊은 나이에 업계 큰손으로 성장한 유수호 대표가 성환이 친구일 줄이야.

마치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가 풍성한 앞머리를 내밀고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오카시오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다가온 순간 확 낚아채야지, 아차 하는 순간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게 바로 기회다.

그리고 이 순간이 그 기회가 온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성환이한테 얼핏 들었는데 서울 근교에서 개발사업을 하신다고요?"

"네. 태창지구라고 미니신도시급 도시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태창지구라면 서울 강남구와 맞닿아있는 주거단지다.

몇 년 뒤 광역교통망이 들어서면서 바로 강남 생활권으로 편입될 대박 입지를 가진 곳이다.

계획 당시에는 하우스푸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동산침체기였지만.

준공 시점이 되어서는 부동산 폭등장 때문에 입주도 하기 전에 분양가의 몇 배가 넘게 거래될 정도로 가격이 뛰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지금은 시장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자금조달에 약간 어려움을 겪고 있었나 보다.

"신도시라고 하면 대개는 공공기관을 통한 공영개발 방식으로 한다고 알고 있는데 공영개발이면 개발이익을 민간이 가져갈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요즘 경기가 워낙 침체기라 그런지 최근에 주택공영개발지구 같은 규제를 많이 폐지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여기 태창지구는 우리가 사전에 지주작업(토지매입)을 꽤 많이 해놔서 공영으로 마냥 밀어붙이기 어려울 겁니다. 설령 한다고 하더라도 민관합동 개발형식이 될 거구요."

유수호대표의 말대로 민간과 공공기관이 같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형태라고 해도 절대 나쁜 조건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공영임을 내세워서 투지 수용도 할 수 있을 테니 지주들로부터 아파트를 지을 부지를 쉽게 사들일 수 있다.

또한 지자체의 관리 감독이 허술할 테니 일정 부분 공영개발 형태를 맞춘다고 해도 얼마든지 개발 이익의 대부분을 당겨올 수 있는 구조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성이 좋으면 금융기관에서 서로 앞다퉈서 대출 일으켜준다고 할 텐데 혹시 사업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문제라고 할 거까지는 아니구요. 지금은 원주민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하는 지주 작업 중인데 아직 동의율을 충족하지 못해서 대출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 동의율만 조금 끌어올리면 바로 대출 일으킬 수 있으니 그때까지 쓸 자금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새로 매입하는 토지의 계약금 정도는 지불해야 하니깐요."

"그럼 저희한테 요구하시는 게 대출금 들어올 때까지 잠시 필요한 자금을 빌려 달라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이자는 섭섭지 않게 쳐 드리겠습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일시적으로 자금 일정이 맞지 않아 급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금융기관은 어디로 컨택하고 계십니까?"

"대박증권을 주간사로 하고 협의 중입니다."

대박증권이라면 부동산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서 꽤 괜찮은 곳에만 PF대출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증권사다. 이는 사업성이 좋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자금은 어느 정도 필요하십니까?"

유수호대표는 오른쪽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내려 고쳐 앉고서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그냥 한번 떠보는 제안이 아닌 정식으로 최종 제안을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한 것이다.

"금액은 100억 원, 기간은 최대 일 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 년 안에 두 배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어떠신지요?"

100억 넣고 200억으로 받는다.

그것도 일 년 안에?

어찌 보면 꽤 괜찮은 제안이다.

한마디도 없이 듣고만 있던 성환도 비교적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리 천하태평이 소소하게 이자놀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시기는 아직 부동산개발 관련한 큰 사고가 터지기 전이어서 이런 민관 공동사업에 촘촘한 규제가 생기기 전이다.

공공기관을 제치고 이익을 최대한 당긴다는 의미에서 살짝 찔리는 감이 있지만.

어차피 개발이익을 누가 얼마나 가져가느냐의 문제일 뿐 플레이어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이다.

애초부터 사업성이 높은 지역에다가 곧 있으면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토지를 적정한 가격에 사줌으로써 원주민은 땅값으로 한몫 챙기게 되고 아파트를 지을 테니 설계회사나 건설회사 같은 공사업체들과 거기에 고용된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게 된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소비자들은 합리적인 분양금액을 지불하고 입주 시점에는 분양가의 몇 배의 가격으로 팔 수도 있으니 모두에게 분명 남는 장사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소한 이익일 뿐, 나머지 천문학적인 이익은 누구에게 가느냐?

사업하는 시행사에 대출을 일으켜준 금융기관인가?

아니다.

일반사람들보다는 훨씬 높은 이자율을 적용받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자는 어디까지나 이자일 뿐.

비싸 봐야 십몇 프로 먹고 떨어져야 한다.

그럼 PF대출 일으키기 전에 급할 때 급전으로 빌려준 주변 쩐주들?

물론 위험부담이 높긴 하지만 대출이 성공하면 바로 상환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이자는 이자.

그래봤자 100원 넣고 200원 받는 두 배 장사다.

그렇다면 결국 큰 몫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바로 이 부동산개발의 큰 그림을 그려서 사업을 일으킨 시행사 즉, 여기서는 수호개발이 모두 쓸어가는 구조다.

좀 더 자세히는 수호개발의 주주인 유수호대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발을 들이는 거다.

태창지구를 발판으로 유대표는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젊은 부동산개발업자가 될 거다.

예전에는 부동산개발업자를 업자나 꾼 정도로 취급할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진정한 사업가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하물며 미국에서는 유명한 부동산개발업자가 대통령까지 하질 않나.

우리 천하태평은 여기에 올라타야 한다.

100억 먹어보겠다고 100억을 빌려주는 거?

우습다.

성공이 확실한데 보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

이건 최소한 수십 배 남는 장사가 될 수도 있을 테니.

"저희는 급전 필요한 곳에 고리로 빌려주는 대부업체가 아닙니다."

"네, 물론 저도 성환이 이 친구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회사에 여유자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쪽은 분명히 괜찮은 투자처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이 정도 좋은 조건인데 거부하냐라는 듯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타부타 대답 없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쳐다보니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번 사업이 잘 안 될 거 같아서 그러신 겁니까?"

그럴 리가.

반대다.

대박칠 거 뻔히 아는데 단지 두 배 먹는 게 아깝다는 거지.

"아닙니다. 서울 근교에 입지도 훌륭하고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면 주저하시는 이유가 뭔지요?"

이럴 때는 그냥 FM대로 적당한 핑곗거리를 대는 게 낫다.

항상 원칙이라는 건 거절할 때의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 천하태평은 정관 사업목적에도 그렇고 업종 특성상 자금대여는 불가합니다."

"방법은 찾기 나름이 아닐까요?"

유대표의 말은 실질은 차입계약이지만 형식은 투자방식으로 해서 얼마든지 계약할 수 있지 않냐는 거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저희가 규모는 작아도 나름대로 리스크를 잘 관리하고 있어서 그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만."

"그럼 왜 만나자고 하신 거죠?"

자기가 시간 내서 실컷 사업설명도 하고 했는데 이럴 거면 왜 불렀냐는 거다.

이럴 땐 뱅뱅 둘러대기보단 단도직입적으로 지르는 게 낫다.

"음. 저희가 에쿼티(자본)로 투자하는 건 어떨지요?"

"네, 에쿼티요?"

생각지도 않은 나의 역제안에 할 말을 잃었는지 유대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컷 아파트 지을만한 땅을 찾아서 원주민들 설득해가며 토지도 상당 부분 매입했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공사를 시작할 수도 있는데.

한마디로 밥상 다 차려놨는데 내가 숟가락만 얹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어 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나 같아도 충분히 그랬을 거다.

아니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욕부터 시원하게 내뱉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이 잘 차려진 밥상을 건넛방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숟가락을 얹혀야 한다.

그러나 유대표는 그걸 용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자본이 아닌 차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칼에 거절했다.

차라리 시원시원하고 좋았다.

그러니깐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로 그렇게까지 크게 성공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대표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이어리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힐끗 내 쪽을 한번 살피는 게 비록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빛에선 '제발 생각을 바꿔라. 그냥 대여로 하는 게 어떻겠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 붙잡으면 지는 거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기회라고 해도 상대방에게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결국엔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지난 오랜 경험을 통해서 체득했다.

그저 '쿨하게 어서 가시죠'라고 하듯 눈짓했다.

유대표도 역시 지지 않고 쿨하게 인사를 건네며 사무실을 나섰다.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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