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은혜
지갑에 천 원권이 보이질 않아, 만 원짜리 한 장을 뽑아 건넸다.
약사분이 거스름돈을 챙기려 하자 손을 들어 말렸다.
"거스름돈은 괜찮습니다. 대신 다음부터 견디셔 한 병은 팔지 말고 꼭 남겨주세요."
약사분은 그저 웃으며 사양한다는 듯 거스름돈을 챙겨주려 했다.
"수고하십시오."
그저 인사말만 건네고는 약국 문을 열고 나왔다.
이 숙취만 없앨 수 있다면 만 원 한 장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더 숭고한 역할을 하게 될
이다.
아직 마시지 않았지만, 곧 마실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견디셔의 뚜껑을 열자 '딱'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한국식당 하나 없는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찾아 들어간 삼겹살집에서 첫 번째 처음처럼 뚜껑을 깠을 때의 소리보다도 더 듣기 좋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방금 뒤쫓아오다가 간발의 차이로 숙취해소제를 사지 못한 그 청년이 부르는 소리였다.
"왜요?"
그 사람이 두 손 모아 간청하듯 말을 건넸다.
"저한테 그거 넘기시면 안 될까요?"
미친놈.
이게 나한테 어떤 건데.
만약 오늘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인생의 전부인 오늘을 말끔한 정신으로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건데 감히 이걸 넘기라고 하다니.
마치 '미친놈 아냐'라고 하듯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그러자 더욱더 간절하게 답했다.
"십만 원 드리겠습니다. 저한테 파시면 안 될까요?"
열 배 장사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번 거절하면 이십만 원도 줄 것 같은데 그러면 스무 배다.
그냥 그 돈 받고 다른 약국가서 살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
다른 데 가는 도중에 배 속에 있는 모든 걸 쏟아버릴 것만 같았다.
"안 됩니다."
역시 이 남자 예상대로 그 두 배를 불렀다.
"그러면 이십만 원에는 안 되겠습니까?"
견디셔 한 병에 이십만 원을 주겠다니 미친놈이거나 대단히 부자이거나 아니면 이 한 병이 정말 생명수와도 같이 소중하다는 얘기인데.
이 남자의 표정을 보니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이 정도 나이 때 갖은 회식에 불려가면서 다음날 제시간에 출근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시절.
같이 회식하자고 했던 부장은 아침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점심시간 이후에나 들어오고 나머지 직원들은 그저 울렁거리는 속과 요동치는 머리통을 붙잡고 시간만 가기를 빌었었다.
그때 맘 착한 선배 한 명이 말없이 건네주던 견디셔 한 병.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상시 베풀며 살라는 어머니의 충고도 스쳐 갔다.
베풀 생각을 하자 머릿속은 괜찮아지면서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돈은 괜찮습니다. 그쪽도 어지간히 이게 필요하신가 보네요."
내 말에 상대방은 희망의 한 줄기 빛이라도 본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네. 간절히요."
"저도 꼭 필요하니깐 그냥 반씩 드시는 게 어떨까요?"
"네. 그래만 주신다면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럼 먼저 드세요."
비록 한 병이 아닌 반병이지만, 먼저 먹으라고 양보까지 해주니 정말 제대로 베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은 정말 은혜를 입었다는 듯 우러러보며 견디셔를 받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꽤 만족한 표정으로 나에게 남은 병을 건네는데.
이런 X발.
반이 아니라 2/3도 넘게 드셨다.
아니 처먹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과 이미 상대방 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견디셔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니.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건넨 병의 수위를 본 것인지 상대방은 정말 죽을 죄라도 지은 듯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먹는다는 게 저도 모르게."
화를 누그러뜨리고 평온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보다 급해 보이시는데요. 숙취 해소 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베풀라는 어머니의 말을 몸소 실천했다.
쿨한 나의 말에 상대방은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청년한테 대단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비록 반의 반 정도 밖에 안됐지만 그래도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숙취가 빨리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약도 약이지만 마음가짐이 더 효과가 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성환이 두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는 말했다.
"아휴 술 냄새! 어제 그렇게 많이 드셨나?"
원모가 모든 걸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대표님 또 편의점에서 맥주 두어 캔 사서 들어가셨겠죠."
"네 개다."
"많이 드셨으면 집에서 그냥 쉬지 뭐하러 나오셨습니까?"
"해장할라고."
"지금이 몇 신데요? 우리 다 점심 먹었는데요?"
"뭐 벌써 먹어? 나도 안 왔는데?"
"밥을 꼭 같이 먹어야 합니까?"
원모 말이 맞다.
밥이야 혼자든 누구와 함께든 그냥 먹고 싶을 때 먹고싶은걸 먹으면 그만이다.
한참동안 의자에 누울 듯이 앉아 술기운을 날리고 있던 중 원모가 소리쳤다.
"입금됐습니다."
최회장 측으로부터 잔금까지 모두 입금했다는 거다.
아무리 비싸게 샀어도 매도자인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불안했는지 모두 쏴버린 것이다.
모두들 원모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 뱅킹에 찍혀있는 잔액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백억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라 '에이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애써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는지 성환도 나름 만족한 듯 보였다.
처음에 부동산 투자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던 원모가 뿌듯했는지 한마디 했다.
"대표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설마 네가 부동산 얘기했다고 이러는 거야?"
"그럼 아닙니까?"
"됐다. 다 네 덕이다."
처음 원모가 천하태평에 합류할 때는 이런 건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말은 자발적이라고 했어도 그저 천하제일에서 쫓겨나는 마당에 어쩔 수 없이 합류 했을 텐데 이 정도로까지 크게 성장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성환이 무심한 듯 물었다.
이 녀석만 지금 이성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이 돈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하죠?"
"암호화폐지."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맘속에 새겨놨던 계획을 발설해버렸다.
"네? 뭔 화폐?"
성환은 뭔 생뚱맞게 헛소리하냐는 식으로 쳐다봤다.
다가올 미래를 모를 테니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미리 천기누설할 수도 없고 설령 얘기해봤자 아무것도 믿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나도 그랬으니깐.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충분히 살 수도 있었던 걸 이건 사기야 거품이야 하며 애써 부정해가며 코인 한 개가 수천만 원까지 뛰는 걸 두 눈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의 후회와 박탈감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 성환을 비롯한 모든 팀원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은 이 돈으로 일 년 내에 가능한 한 크게 튀기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런 게 있어.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다른 투자처 생각해놓은 사람 있나?"
팀원들을 돌아보는데 아직 환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대답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원모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답했다.
"부동산에 다시 투자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만 특이케이스지 부동산은 언제 현금화할지 모르니깐 우리 같은 벤처 캐피털에는 어울리지 않아."
"주거용은 현금화가 빠르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근데 아무리 좋은 입지의 주거용이라고 해도 단기간에 수십 배가 될 수 있을까?"
"네. 그렇죠. 그건 아무래도 무리겠죠."
원모도 이제 몇십 배는 되어야 진정한 투자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의견을 접었다.
다른 투자처를 떠올리고 있는데 성환이 다짜고짜 물었다.
"그럼 직접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뭐? 만들다니?"
"주거용을 만들어서 파는 거요."
이 자식이 시행하자는 얘긴데.
부동산의 처음이자 끝이 곧 개발이익이고 그 개발이익을 다 먹기 위해서는 시행을 직접 하는 것이 답인 건 맞다.
다만 기대이익이 큰 만큼 제때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시장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분양이 잘 안 되기라도 한다면 한꺼번에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거다.
"안 돼. 자체 시행은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위험해. 160억 원이 금방 사라지고 우리 중에 누군가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감옥이라는 말에 모두들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지 몸서리치는 듯했다.
그러나 성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덧붙였다.
"160억 원을 다 태우자는 말은 아니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사업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하자는거지?"
"음……. 유망한 곳에 짧게 넣고 먹고 빠지자는 거죠."
"무슨 소리야? 우리가 금융기관이냐? 아니면 대부업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돈 빌려줘서 이자놀음이나 하자고?"
"아니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그럼 뭔데?"
"여기 사무실 건물이 내 친구 건물이라고 했잖아요. 그 친구가 부동산 개발하는 놈인데 수완이 좋거든요. 몇 년 전에 경기도 어딘가에 아파트 지었다가 천억 이상 땡겼어요. 그 돈으로 여기 땅 사서 건물 올린 거거든요."
성환이의 건물주 친구 덕분에 관리비만 내고 이 사무실을 쓰고 있는 건 알았지만 히스토리까진 몰랐었다.
그 어린 나이에 강남에 이렇게까지 삐까뻔쩍한 신축 오피스 건물을 가지고 있다니.
하물며 지금은 땅값에 신축 비용 해서 천억 언저리 정도 들었을 테지만 수년 뒤엔 삼천억을 싸 들고 다니면서도 절대 못 살 것이다.
그만큼 아파트 외에 수익형 건물도 지붕 뚫듯이 날아오를 거다.
평상시 이런 대형 오피스 건물들을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역시 이런 부동산들은 부동산으로 떼돈 번 사람들이 갖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건물이 왜?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제 친구 말이요. 경기도에 또 한 건 할라고 지금 한참 땅 작업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워낙 구찌가 커서 돈이 잠깐 부족한가 봐요."
"금융기관 PF 대출받으면 되잖아. 아님 그 전에 브릿지론이라도 받던지."
"네? 브릿지 뭐요?"
성환이는 매번 친구들과 만나면 돈 얘기나 사업 얘기 같은 걸 했을 테니 주워들은 게 많았겠지만, 아직 사회생활 경험이 짧아 부동산 개발사업의 구조나 용어에는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듯했다.
"브릿지, 말 그대로 다리 역할, 잠깐 거쳐 가는 돈 빌려주는 걸 말하는 거야. PF대출이든 브릿지론이든 개발사업에서 돈 빌려주는 건 위험은 높은 데 비해 이자만 받을 뿐 투자이익을 가져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 아무리 이자라고 해도 몇 배를 받을 순 없잖아."
자본투자와 자금대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대여는 말 그대로 돈 빌려주는 것으로 담보 잡을 경우엔 다른 채무에 우선하여 회수할 수 있지만, 투자는 모든 채무를 상환하고 남는 수익금을 가져가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을 얼마나 부담하느냐에 큰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자본투자는 가장 위험하기 때문에 단순히 이자가 아닌 투자수익을 모두 챙겨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돈 빌려주는 거 말고 우리가 일정부분 투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직 땅 작업 중이라면서? 부동산 개발이라는 게 돈 투입한 이후에 투자수익을 쥐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아? 게다가 손에 쥘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제 친구의 수완을 모르시고 하는 말이에요. 그럼 한번 만나보고 얘기라도 들어보시죠.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내가 한번 만나보고 감언이설에 홀딱 넘어갈 캐릭터도 아니고 시간은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게다가 이 기회에 부동산으로 떼돈 번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손해 볼 일도 아니니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 내가 없는 시간 한번 내줄게."
성환은 기가 찼는지 혀만 안 찼지 날 것의 썩은 미소를 그대로 내보였다.
"네, 어런하시겠습니까? 공사다만 하신 분이. 최대한 빨리 잡아보죠."
"공사다망 아닐까?"
"또 그냥 안 넘어가네. 나 사자성어에 약하다니깐."
같은 건물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티타임 갖자는 성환이 전화 한 통에 그 친구가 바로 내려왔다.
친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들 들면서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얼굴도 보기 전에 상대방으로부터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술 냄새가 전해져왔다.
"어! 저기……."
마주 보며 서로 놀란 듯 탄성을 뱉어냈다.
성환이 친구란 사람은 아까 전에 내가 견디셔 은혜를 베풀었던 그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