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마지막 하나
그 후로도 며칠이 더 흘렀다.
오늘까지 안 오면 내가 먼저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며칠 전에 걸려온 전화와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정말 잘 참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천태평 대표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어디시죠?"
"지난번에 찾아뵜었던 대문그룹 비서실입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대표님을 직접 뵙고싶어하시는데요. 오늘 시간 괜찮으십니까?"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요."
뚝 끊었다.
옆에서 통화하는 걸 지켜보던 원모는 황당했는지 약간 언성까지 높이며 물었다.
"대표님 제가 혹시 잘못 들었습니까? 지금 뭔가를 거절하신 거 같은데요."
"제대로 들었어. 최회장인가 하는 사람이 대뜸 오늘 보자고 하잖아."
"네? 그쪽 회장님이 직접 대표님을요?"
"응."
"아니 그런데 왜요? 그걸 거절하셨다고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요?"
원모는 꽉 쥔 두 주먹을 내지르며 열을 냈다.
말하고 보니 점점 격양되는지 얼굴마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 자식이? 뭐 내가 어디 기업 회장이 오라면 오고 말라면 말고 해야 해? 자세가 안 되어 있잖아. 언제 괜찮으십니까 미리 스케줄을 물어본 것도 아니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회장이잖아요."
이 자식 사회생활 조금 하더니 직급, 직책 같은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거다.
상하관계가 분명한 위계질서 문화가 내면에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전 본적도 없는 다른 기업 회장이 더 높은 지위에 있어서 자기 위주대로 이래라저래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우리 회사 회장이냐? 그냥 옆집 아저씨지."
"아니 그래도."
"그래도 뭐? 이상한 놈이네. 설령 우리 회사 회장이라고 해도 사적으로 만날 땐 상대방에게 의견도 물어보고 시간도 물어보고 하는 게 예의지. 아주 예의가 안 되어 있잖아."
김철수 대표가 중재하듯 한마디 했다.
"그래 원모야. 천대표 말이 맞아. 어차피 연락 다시 올 거 아냐."
원모도 마지못한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전화가 다시 울렸다.
"천대표님? 내일은 괜찮으십니까?"
"네. 내일 오후에는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3시에 회장님 집무실로 오셔도 되겠습니까?"
이번엔 시간과 장소에 대해 의견을 물어봤다.
아무래도 협상할 땐 적진보다는 홈구장이 나을 듯하지만, 괜히 여기로 불렀다가 원모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느니 차라리 그리로 가는 게 나을 듯했다.
"네. 그 시간에 뵙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후.
성환이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기사 노릇 해줄 겸이지만 아무래도 이놈은 웬만한 금액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놈이니 베팅에 도움이 될 듯하여 달고 갔다.
아직은 규모가 아주 큰 기업은 아니어서 그런지 대문그룹의 사옥은 천하제일보다는 매우 단출했다.
천하제일의 반의반 정도도 안 되는 규모의 리셉션에는 안내 직원이 두 명 앉아있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겪어보니 기업의 규모는 리셉션 규모와 비례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크고 화려하게 허세를 잔뜩 부린 기업은 그만큼 빨리 사세가 기울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적정한 리셉션 크기의 회사만 남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회장 손님이라 별다른 제지 없이 바로 회장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역시나 단출한 규모의 비서실을 통과해 들어가니 50대쯤은 되어 보이는 듯한 후덕한 인상의 최회장이 일어나 맞이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천하태평 분들이시죠? 모시기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환영하는 바입니다."
"힘들긴요. 그냥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바빠서 시간 내기가 어려웠을 뿐입니다."
허세 가득한 인사말에 성환이 아니꼽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악수를 건네며 마주 잡은 최회장 손 등의 감촉은 마치 거북이 껍질같이 까끌까끌하고 투박했다.
건설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걸 알려주는 듯했다.
차를 한두 모금 마신 후 최회장이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엔 저희 직원들이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실례라뇨. 그럴 수도 있죠."
최회장은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금액을 불렀다.
"오십억 드리겠습니다."
역시 노가다 판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화끈하다.
직원들 시켜서 밀당하는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화끈하게 불러본 것이다.
마치 받든지 말든지 결정만 하라는 듯이.
단호한 최회장의 표정을 보니 여기서 거절하고 나가버리면 정말 끝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리 풍수거사를 만나보지 못했더라면 이 자리에서 바로 승낙했을지도 몰랐다.
"회장님. 그냥 저희에게 회장님댁을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팔기는커녕 그냥 사겠다는 나의 역제안에 최회장도 적잖이 당황한 듯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라구요?"
"네. 제가 생각하는 가치보다 훨씬 적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서요. 그 정도로 여기실 거면 차라리 저에게 파시죠. 제가 섭섭지 않게 쳐 드리겠습니다."
최회장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서 오므렸다.
"그러하시다면 얼마면 파실 수 있으십니까?"
최회장이 이 정도로까지 했으면 사고 싶다는 의지를 확인했으니 이젠 그냥 시원하게 원하는 금액을 말해야 한다.
한 달 동안 여기 오는 차 안에서도 이 순간을 위해서 고민 또 고민했었다.
마치 준비라도 한 듯 답했다.
"백오십억이면 팔겠습니다. 세후로요."
최회장은 예상보다 몇 배나 더 큰 금액이었는지 애써 놀란 걸 감추려 했지만 흔들리는 눈빛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옆에 배석한 비서실장은 대놓고 말은 못 하고 그저 받지 말라는 식으로 애절하게 눈빛을 쏘고 있었다.
그러나 최회장은 이를 외면하고는 바로 답했다.
"네. 그렇게 하죠."
뭐야 벌써 끝이야?
좀 더 세게 부를 걸 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다.
'역시 이 정도 결단력 실행력은 있어야 작은 인테리어 업체에서 시작해서 대기업까지 이루지'
존경심마저 일었다.
최 회장.
이자는 비단 풍수지리의 덕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인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
이제껏 최회장과의 협상장에서부터 한마디도 없던 성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제 생각한 거예요? 얼마 부를지 아직 한 번도 상의 안 해본 거 아닌가?"
"최회장하고 악수했을 때 결정했어. 그분 이미 마음먹었더라고. 용납할 수 있는 범위에선 얼마가 되더라도 사겠다고 하는."
"그 용납할 수 있는 금액이라 하면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봤지. 나라면 얼마까지 낼 수 있을까 하고. 그러니깐 대강 사이즈 나오더라고."
"음."
가벼운 대답 한마디에 많은 걸 담고 있는 듯 들렸다.
어쩌면 자기보다 내 그릇이 크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라도 했다는 듯 일종의 체념이나 경외심 같은 온갖 감정이 녹아 들어간 듯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김이사와 원모가 초조한 듯 쳐다봤다.
애써 외면했지만, 활짝 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금세 얼굴들이 환하게 바뀌는 게 보였다.
"자자 회식 갑시다. 얼른 짐 챙기시죠. 오늘은 메뉴판 보지 말고 시키는 겁니다."
"원모야!"
"네."
"막 엄청 비싸. 얼만진 모르는데 하여간 너무 비싸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아니 가볼 생각조차 못 해본 곳이야. 그런 데가 있냐?"
"네. 물론이죠."
"당장 예약해. 건환이도 퇴근하면 오라고 하고."
"네, 대표님."
원모가 예약한 곳은 인당 삼십만 원도 넘는 한우 맡김 차림 집이었다.
'얼마를 벌었는데 이 정도는 가뿐하지'라며 기분 좋게 갈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금액을 묻진 않았었지만 대충 분위기 보아하니 한 오십억 정도는 당겼나 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한 듯했다.
술자리에서 도장 찍은 계약서를 보여주자 원모는 들고 있던 술잔을 놓쳐버렸다.
역시 공경하면서도 두려움까지 담은 듯한 표정이었다.
회식을 끝내고 차디찬 냉기가 흐르는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비틀비틀 몸을 주체하지도 못한채 현관문을 들어섰는데 한 손에는 무게가 제법 나가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미 취했지만 스스로는 술이 약간 부족했다고 생각했었는지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러 맥주 몇 캔과 안줏거리를 사고 온 것이다.
배가 가득 찼지만 역시 맥주 배는 따로 있나 보다.
위장에서 쪽쪽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벌컥벌컥 넘기고 있었다.
동지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홀로 승리감을 만끽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뿐더러 마음을 한 번 더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법인 명의로 주택을 양도했을 경우에 추가로 납부하는 세금까지 고려해서 계약했으니 잔금까지 모두 받으면 이제 곧 회사계좌에 160억 원이 넘는 현찰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누가 부동산을 장기투자라고 했던가?
대박 한 건으로 어느새 실탄이 충분해졌다.
이제 암호화폐거래소가 생기면 있는 대로 사놓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 *
누군가 머리를 콕콕콕 쥐어박고 있었다.
"에이 씨, 누구야!"
고개를 쳐드니 머릿속이 폭풍을 만난 배처럼 휘청거리는 듯하더니 바로 고꾸라졌다.
침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바로 다시 누웠지만.
이불은 모두 걷어찼는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져 있는 걸 보니 밤새 숙취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던 흔적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도망갔는지 동쪽으로 난 창문의 블라인드 사이로는 한 줌의 햇살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날 알코올 기운은 아직도 계속 머릿속을 휘저으며 맥박과 같은 속도로 망치 두드린 듯 콕콕 찌르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이미 한계를 넘었으면서도 살짝 부족하다는 생각에 맥주 한잔 더 하겠다는 게 다음 날 이런 고통을 안겨준다.
매번 후회하면서도 다음번 술자리에선 바로 잊어버리고 똑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잊는다기보단 '에이 다음 날 고생 좀 하면 되지 뭐'하고 애써 무시하고 넘기는 게 맞을 거다.
갈증이 나는 것 같아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바로 뱉어버렸다.
분명히 정수기에서 받았는데 누가 몰래 술통에 연결했는지 소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는 게 한 모금도 넘길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은 역대급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만 조심하면 된다.
삼겹살이나 곱창 뭐 저절로 소주를 부르는 안주를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올라 회사를 향했다.
2호선의 리드미컬한 꿀렁거리는 소리에 내 위장도 박자 맞춰 반응하는지 같이 울렁거렸다.
그러다 정류장에 급하게 정차하는데 하마터면 어제 먹은 안주를 확인할 뻔했다.
가까스로 참고는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느낌이 왔다.
오늘 같은 날 숙취해소제를 마시지 않는다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울렁거림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명이나 견디셔 같은 숙취해소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 회사 건물에는 약국이 하나 있다.
근처에는 처방전 조제가 많지 않은 성형외과나 치과밖에 없어서 약국이 거의 없었는데 다행히 우리 회사 건물에 조그맣게 하나가 있었다.
2층이라고 해도 오늘 같은 날 계단으로 올라갈 순 없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누군가 이미 버튼을 눌렀는지 2층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역한 알코올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내가 아니라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난다는 것을.
뒤에 젊은 청년 한 명이 딱 봐도 고개를 수그린 채 오바이트를 꾹꾹 참는 게 보였다.
나와 뒤 청년 사이에 서 있던 여성 한 명이 대놓고 코를 막았다.
괜히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아 억울하긴 했지만 괜찮다.
난 곧 2층에서 내리면 되니깐.
2층에 도착하자마자 탈출하듯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왔는데 뒤에 서 있던 술 덜 깬 남자도 같이 내렸다.
아마도 이 친구가 지하에서 타면서 2층 버튼을 눌렀었나 보다.
역시 약국에 가서 숙취해소제를 사려고 한 것일 거다.
메스꺼움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특히 저 남자보다 먼저 약국에 도착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잠시 후 뒤에서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좀비처럼 한 손을 뻗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구역질을 참기라도 하듯 입을 틀어막으면서 뛰고 있었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나도 뛰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잘 참았다.
다행히 간발의 차이로 약국 문을 먼저 열고는 외쳤다.
"어명이나 견디셔 있어요?"
약사분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 듯 다급한 나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늘 웬일로 찾으시는 분이 많네요. 다행히 견디셔 하나 남았습니다."
정말 천운이다.
조금 빨리 사겠다고 내디뎠던 바쁜 걸음이 마지막 한 병을 낚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한걸음 늦게 도착한 남자는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걸 들은 듯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