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03화 (103/191)

103화 밀당

김철수이사 쪽을 쳐다봤다.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린 듯 손사래를 쳤다.

"난 안 되는데. 점심에 기자 후배들이랑 약속 있단 말야. 한 달 전에 잡아놓은 거라 취소는 곤란해."

미리 대답을 준비해놓지도 않았을 테니 이 정도 속도의 반응이면 진실일 확률이 높다.

고개를 돌려 원모를 쳐다봤다.

흠칫 놀라긴 했으나 역시나 자기 차례가 올 걸 알았는지 방금 전에 준비라도 해놓은 듯 바로 답했다.

"전 오늘 고향에 계신 할머니께서 올라오신다고 해서요. 오후에 터미널로 마중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짝 내리깔며 흔들거리는 게 얼핏 스쳤다.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상갓집까지 갔다 온 거 같은데."

"그건 친할머니였고요. 이번엔 외할머니입니다."

할머니 드립에 더 파헤칠 수도 없고 그냥 포기다.

"알았어. 혼자 가지 뭐."

어차피 서울인데 한 시간 안쪽이면 어디든 간다.

할 수 없이 홀로 사무실 문 밖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혹시나 하는 맘에 사무실 안쪽으로 귀를 기울이자 내가 나가서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팀원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모야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그럴까요? 오랜만에 부대찌개는 어떠십니까? 참! 그런데 이사님 점심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있지. 그런데 오늘이라고는 안 했어. 내일 약속이야. 그런데 원모 넌 할머니 마중 나간다고 했잖아."

"할머니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대표님 두 번 다 오셨는데 그걸 기억 못 하시네. 후후"

개자식.

돌아가신 할머니 핑계를 대다니.

확 그냥 저승에서 상봉시켜 줄까 보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올라타는 바람에 더 이상 들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더 들어봐야 짜증만 났을 테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 * *

성환이 건네준 주소는 생전 처음 가보는 동네였다.

서울에 아직 이런 동네가 있을까 싶은 말 그대로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달동네, 쪽방촌이었다.

후하고 불면 쓰러질 것같이 낡은 집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고 지저분한 골목을 지나는데 가로등도 거의 없어 밤에는 무서워서 돌아다닐 수도 없을 것 같은 동네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왠지 모르게 푸근하고 이웃 간의 정이 넘쳐나며 평화롭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나 그건 화면을 통해 볼 때의 느낌일 뿐 실제로는 삭막하고 음습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어렵게 찾은 풍수지사의 거처는 점집이나 철학관과는 다르게 아무 간판 하나 없이 그저 평범한 빈민가 주택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실력 있는 사람은 아닌 듯.

실력이 있었다면 이런 누추한 곳에 거처를 마련해놓지는 않았을 터 괜한 걸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힘들게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듯하더니 백발의 노인 한 분이 문을 열어주셨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풍거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일찍 오셨군요. 들어오시지요."

성환이 말대로 미리 전화해놓았나 보다.

장풍거사가 안내한 방은 여느 철학관 같은 곳과는 확연히 달랐다.

마치 정년 퇴임한 문학 교수의 서재를 보는 듯 전문 서적뿐만이 아니라 소설이나 시집 등 온갖 종류의 책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냥 보여주기식의 전집으로 채운 게 아니었다.

제각각의 단행본 위주인 데다 딱 봐도 새 책이 아닌 정말 여러 번 읽어본 듯한 중고 느낌이 들었다.

"천하제일에서 오셨다구요?"

"네. 하지만 이번엔 회사 일로 온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여쭤볼 게 있어서요."

"말씀해보시죠."

"여기 주소가 있는데요. 같이 가주셔서 풍수를 살펴봐 주실 수 있으신지요? 사례는 해드리겠습니다."

며칠 전에 산 빌라와 그 옆 대문그룹 최회장 집 주소가 적인 종이를 건넸다.

돋보기를 끼고 자세히 살펴보던 장풍거사는 주소를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여긴 안 가봐도 됩니다."

"네? 그래도 직접 한번 가서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긴 산세, 지세, 수세가 워낙 유명한 곳이라 웬만한 풍수지사들은 다 아는 땅입니다. 저도 여러 번 찾아가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남동의 지명은 한강과 남산이 만난다고 해서 한남이라 이름이 붙여진 곳입니다. 즉 산과 땅의 모양과 기세, 물의 흐름과 기가 절묘히 만나는 곳이지요. 그중에서도 이 주소의 지역은 영구음수형 터에서 견정혈이 놓인 자리에 경사까지 완만해서 최고의 집터가 될 수 있습니다.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지 중의 길지이죠."

역시 최회장이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들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하나의 터가 두 필지로 나뉜 게 문제입니다. 두 필지를 합쳐야만 반듯한 모양으로 터가 넓어지며 재물과 복이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원래 하나의 길지에 집이 두 채로 나뉜 게 문제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지금은 두 집 사이에 놓인 담이 그 기세를 막고 있어서 길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그 담을 무너뜨리고 건물 하나를 없애든지 아니면 둘 다 부수고 다시 하나 짓든지 해서 분산된 기운을 모아줘야 합니다. "

회귀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니 장풍거사의 말이 맞는 듯했다.

대문그룹이 이 빌라를 통째로 매입한 이후에 계열사 몇 개뿐인 소규모 그룹에서 몸집을 크게 늘려가기 시작해 대규모 기업집단으로까지 변모했었다.

"그럼 거사님께서는 이 땅의 가치가 어떠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이런 비슷한 길지를 살 수 있는 가격은 되어야겠죠?"

"그런 곳이 어디를 말씀하시는지?"

"아쉽지만 서울엔 몇 군데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도 이미 다른 명문가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내놓지 않겠죠. 그런 길지에 터 잡고 있으니 망할 일도 없을 테니깐요."

장풍거사의 말이 맞다.

그런 땅이 있다면 누군가 깔고 앉아있을 거고,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들이 사는 집일 것이다.

그렇다면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얘긴데.

역시 이 빌라는 가격 측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부르는 게 곧 값이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감사 표시를 해야 할지요."

"괜찮습니다. 저도 두 번째 오신 분을 오랜만에 뵈어서요. 저한테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아무래 생각해도 지난번엔 온 기억이 없는데.

아마 다른 사람과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그래도 조그마한 사례라도 하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천하제일 그룹에서 종종 찾아주시고 챙겨주시니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복채처럼 지폐 몇 장을 꺼내서 드리기도 뭐하고 해서 그저 공손히 감사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문밖을 나서는데 안쪽에서 장풍거사가 한숨을 내쉬며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의 삶이라.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할 텐데."

나를 두 번째 봤다는 게 아니라 내가 회귀한 것을 알아본 것이다.

오랜만에 봤다고 하니 나처럼 회귀한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

아무튼 사람은 그 사람이 거처하는 동네, 옷차림 등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시 들어가 자세히 여쭤보고 싶었지만 접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 즉 회귀하던 날 이후의 일에 대해서 행여나 안 좋은 말이라도 들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금빛 찬란한 인생도 인생이지만, 당장 한 치 앞도 몰라 전전긍긍하며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 역시 인생이다.

회귀하던 순간까지의 미래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그 이후까지 알게 된다면 불확실성이 주는 짜릿함이 없어져 오히려 삶의 낙이 없을 것만 같았다.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이곳에 다시 또 오면 그만이다.

* * *

대문그룹 측 사람들이 다녀간 후 일주일이 지났다.

내색은 안 했지만 김이사나 원모는 어찌나 속이 탔는지 못 참고는 결국 말을 꺼냈다.

"천대표 지난번에 온 그 사람들 정말 마지막 제안이 아니었을까? 벌써 일주일도 넘은 거 같은데."

"네 대표님. 먼저 연락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매입금액하고 복비, 취득세까지 들인 돈이 한두 푼이 아닌데요. 이러다가 몇 년째 묵혀두기만 하면 어떡하려구요."

조급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먼저 연락하는 순간 수를 읽힌다.

돈이 급하구나. 조금 쥐여주면 금방 팔겠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주는 꼴 밖에 안된다.

"걱정하지 마. 그리고 행여나 그쪽에서 다시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절대 문도 열어주면 안 돼. 아니 그냥 소금이라도 뿌려서 쫓아내든지 하지 절대 말 한마디라도 들으면 안 돼."

"네? 얼마나 제시하는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야. 금액은 그쪽이 제시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던져야지."

"몇 달째 연락이 안 오더라도 마냥 기다리시자는 말씀이십니까?"

"응.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몇 년까지는 못 기다린다.

암호화폐거래소가 내년에 생긴다고 하니 기다릴 수 있는 건 최대 일 년 정도다.

자리 잡은 터가 좋아 아무리 비싼 값에 팔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트코인 수익률을 따라갈 순 없을 테니.

원모는 고개를 돌려 성환이 쪽을 바라봤다.

옆에서 들었을 테니 한마디 지원사격이라도 부탁하려는 거다.

그러나 성환은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참다못해 원모가 하소연하듯 나섰다.

"조성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환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섯다'로 보면 지금 우리가 무슨 패를 들고 있는 거죠?"

이 자식이 어느새 고스톱뿐만이 아니라 '섯다'에도 발을 들였나.

"당연히 광땡이지. 그것도 삼팔광땡(3광과 8광의 조합으로 섯다에서의 최고 패)"

"삼팔광땡을 들고도 그냥 패를 보여주겠다는 겁니까? 깔린 돈만 먹고 떨어지자구요?"

역시 화투의 세계에 입문한 기간이 어느 정도 쌓여가니 어느새 현실에 적용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럼. 절대 안 되지."

"그냥 가만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이길 게임에서 상대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든지 말든지 냅 두면 되지 않나?"

성환이까지 이렇게 나온 마당에 더 이상 반론을 낼 수가 없었는지 원모는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좀 더 기다리시죠."

김철수 이사 역시 성환이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어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 *

그렇게 또 몇 주가 흘렀다.

이쯤 되니 나도 살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다른데 더 놓은 곳을 찾아서 그냥 이사라도 하는 게 아닐까?'

'설마 장풍거사 말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실력 있으면 돈도 많이 벌고 좋은 데서 살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갔다.

정말 밀당을 하려는 거면 최회장 측은 보통이 아닌 거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응이 왔다.

정말 포기할까 보다라고 살짝 생각이 들 때쯤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지만 이건 왠지 최회장 측에서 연락한 것이라는 느낌이 딱하고 왔다.

하루에 한 통도 울리지 않는 내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자 김이사와 원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드디어 왔다'라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난 두 사람의 기대를 뭉개버리듯 통화 거절하기 탭을 눌렀다.

"으윽."

원모가 상황을 인지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다시 같은 번호로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잘못해서 끊어진 줄 알고 바로 다시 건 것일 거다.

역시 통화 거절 탭을 누르자 못 참았는지 원모가 한마디 했다.

"대표님 왜 안 받으세요. 연락 온 거 아닐까요? 그쪽에서?"

"괜찮아 다시 걸 거야. 두 통 정도는 씹어줘야지."

다시 휴대폰이 울리길 기다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시 전화기에 이상이 있나 싶어 원모 전화로 내 번호를 눌러봤지만 우렁차게 울리는 게 고장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대표님. 다시 온다면서요?"

거의 울기 직전인 듯 원모가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기다려봐."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뱉었지만 내가 실수라도 한 건가라는 생각이 살짝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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