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02화 (102/191)

102화 네고의 시작

수고했다는 의미로 엄지척을 날렸다.

그러자 원모는 마치 큰일이라도 해냈다는 듯이 두 팔을 번쩍 들고는 화답했다.

거구는 아직 상황판단이 안된 듯 고개를 돌려가며 나와 원모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원모야!"

"네 대표님."

"우리 간이영수증 있지? 이분한테 끊어드려라. 이왕이면 3만 원으로."

"네? 네 알겠습니다."

문방구에서 살 수 있는 간이영수증은 세금계산서나 신용카드 매출전표 등 법에서 정한 적격증빙은 아니지만 그래도 3만 원까지는 가산세 없이 비용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외근까지 나와서 고생했는데 회사 경비로는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도리다.

3만 원이라는 말에 짜장면값으로 2만 원을 지불했다고 해도 만 원 한 장을 남겼다고 생각해서였는지 구척장신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잠시 후 바로 고개를 젖히는 게 이제야 놀렸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보면 몰라? 게임 끝난 거? 대문인지 쪽문인지 너네 회장한테 가서 돈 준비하라고 전해드려라. 꽤 많이 필요할 거라고."

"뭐라고?"

"중도금이랑 잔금까지 모두 할아버지 계좌로 보냈다고. 이행을 완료했다는 말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대로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음. 공탁이든 뭐든 계약금 두 배로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 거래는 이미 끝났고 더 이상 해제가 안 된다고."

거구는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방금 전 상황을 대략 설명하니 상대측에서 욕설을 늘어놓았는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면서 휴대폰을 얼굴에서 뗐다.

사실 이 자가 잘못한 건 없는데 욕까지 먹어 안쓰러웠으나.

뭐 내 알 바는 아니다.

거구는 매섭게 한번 째려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별말 없이 조용히 돌아갔다.

우리 탓이라 생각해서 충분히 원망할 법도 했으나 이제 곧 회사로 돌아가 맞닥뜨릴 갈굼이 더 걱정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의 기획력과 성환의 기지와 원모의 실행력이 어우러진 작전.

성공이다.

며칠 동안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발만 동동 굴릴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반나절 만에 사무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흐뭇한 마음에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아 좋다. 사무실 출근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천하제일에 다닐 때는 잠을 푹 자더라도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붙잡고 끙끙대며 사무실로 향했었는데.

지금은 사무실이 너무 좋다.

오후만 되면 햇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동향에, 청소 한번 제대로 안 해서 먼지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꽃가루처럼 날리는 내 오피스텔 안에서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사무실 통 창에 서서 선릉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뷰를 감상하면서 종일 햇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행복이다.

그래도 뭐니 뭐니해도 가장 좋은 건 나에게 무언가 지시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가끔 출근길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내 표정이 웃고 있는 걸 발견할 때가 종종 있었다.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게 이상했는지 성환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집 한 채 그거 얼마나 된다고."

"얼마일지는 두고 봐야지. 세상 하나뿐인 상품의 가격 결정은 수요공급 원리에 따르지 않거든."

"그게 아니면? 뭐 경제 이론이라도 만드셨나?"

"가격은 사고자 하는 사람이 최대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냐에 달렸지."

"그러니깐 그걸 어떻게 알죠?"

"대강 알았잖아. 얼마나 급하면 중간에 낚아채겠다고 하루 만에 입질이 오겠어."

정말 일 년 정도는 묻어둘 각오로 매입했지만,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은 몰랐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얼마나 급하고 절실한지를 알게 되었으니 주도권은 확실히 우리에게 넘어왔다.

천천히 기다리면서 최대치를 받아내기만 하면 된다.

잠시 후.

원모가 서류뭉치들을 들고 왔다.

"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

"뭔데?"

원모가 내민 서류는 등기부등본이었다.

매입한 빌라의 나머지 아홉 채 등본을 뗀 것이었다.

"어제 우리가 산 게 마지막 집 같습니다."

"뭐라고?"

"어제 산 집만 빼고 아홉 채 모두 최근 2년 사이에 매매가 됐더라구요."

정말 등기부등본을 넘겨보니 원모 말이 사실이었다.

매수자의 이름이 모두 다른 걸로 봐서는 소문 안 나게 작업하려고 대문그룹 최회장 측에서 명의신탁 형태로 다른 사람을 내세워 차명으로 계약한 것일 거다.

이제 우리가 매입한 한 채만 더하면 끝나는 건데 그쪽 입장에서 정말 다 된 밥에 재 뿌린 격이 된 셈이다.

재를 걷어내려면 밥 한솥의 반 정도까지 덜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것까지 파악하다니.

원모도 회사 짬밥을 거꾸로 먹기만 한 건 아니었나 보다.

흐뭇하게 쳐다보며 고개 한 번 끄덕여줬다.

"잘했어. 역시."

"제가 뭘요."

여러 말 없이 짧고 굵은 칭찬 한 번이 더 좋은 법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대 봐야 형식적으로 그저 내뱉은 진정성 없는 말처럼 들릴 테니.

만족한 듯 웃는 모습을 보니 방금 전 인증서 놓고 왔다고 욕먹은 게 완전히 풀린 듯했다.

* * *

소유권이전 등기 날 아침.

제출할 자료 준비를 모두 마치고 셀프등기를 하러 나서기 전 누가 찾아왔는지 사무실 벨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주려 나간 원모가 처음 보는 두 명과 함께 들어왔다.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그래? 누구신지……?"

"대문그룹에서 오셨다는데요."

곧 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다.

등기 이전하기 전에 협상하려고 온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급한 게 아닌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제안드릴 게 있어서 찾아뵀습니다."

"저희는 제안받을 일이 없는데요."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상대 두 명은 응접실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아버렸다.

막무가내 스타일이다.

기분이 살짝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손님인데 세워놓고 돌아가라고 했으니 상대측 역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해서 참았다.

원모가 쭈뼛쭈뼛하고 있었다.

차는 뭘로 준비할지 물어보려는 거 같아 그냥 대답해줬다.

"차는 필요 없어. 바로 가실 거니깐."

쌀쌀맞은 말에 별다른 대응도 없이 일행 중 한 명이 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서류 두 장을 꺼내 옆에 펼쳤다.

봉투는 돈이고 서류는 계약서일 거다.

현금 같으면 대충 두께로 얼마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 테지만 딸랑 수표 한 장 써왔을 테니 도무지 추측할 길이 없었다.

"섭섭지 않게 챙겨드렸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기 계약서에 사인해주시면 봉투는 바로 챙기실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 금액까지 미리 적어놓고 돈까지 준비해서 왔다는 얘기는 네고가 없다는 말과 같다.

흡사 최후통첩이라도 되는 양 받거나 말거나 양자택일하라고 한 것이다.

계약서에 얼마가 기재되어 있는지 봉투 안 수표는 얼마짜리인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보는 순간 내 손에 쥔 패를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원모도 궁금한 듯 계약서에 손을 뻗으려 하는 거 같아 바로 어깨를 찰싹 때렸다.

"에에. 뭐 하는 짓이야?"

내가 타박하듯 소리치자 원모가 이제야 알아차리고는 둘러댔다.

"저흰 필요 없으니깐 가져가시라고 하려구요."

계약서를 들고는 상대방에게 건넸다.

원모 녀석 임기응변이 많이 늘었다.

상대방은 어이가 없었는지 한마디 건넸다.

"지금 거절하시면 다음번엔 더 이상 이런 제안을 드리지 않는다는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그러시던지요. 저희도 팔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요. 얼마 쓰셨는지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쿨하게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나가면 다시는 뵐 일이 없으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다마다요. 원모야 손님들 가신 데니 모셔다드려라."

상대측은 원모가 안내하려는 걸 뿌리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원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대표님. 얼만지 못 보셨습니까?"

"내가 왜 봐? 하나도 안 궁금한데."

센 척 한 번 했으나 그래도 궁금하긴 궁금했다.

아무리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이라고는 하지만 말만 그런거고 사실은 지금부터 밀당 시작이라는 건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최초 제안 금액을 알아야 나중에 얼마까지 불러도 되겠구나라고 대강 사이즈가 나올 수 있다.

"그렇군요. 전 살짝 봤는데 말씀 안 드려도 되겠군요."

이 자식이 일부러 놀리는 거다.

"왜? 놀라는 거 보니까 십억이 넘나 보지?"

"에헤이. 말씀 안 드린다니깐요."

"아이쿠, 부정하지 않으니깐 이십억도 넘나 보지?"

"부정이라뇨. 그냥 말씀 안 드린다고요. 대표님께서 궁금하지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이 녀석이 선을 넘었다.

난 세 번은 못 참는다.

"야 이 자식아! 장난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버럭 화를 냈다.

이 녀석이 몇 년을 한 사무실에서 같이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내 한계를 모르다니.

이건 역정을 낸 내 잘못이라기보단 둔해 빠진 이 녀석의 책임이다.

"죄송합니다. 전 또 농담인 줄 알고."

고개를 수그리고 읊조렸다.

갑자기 며칠 전 어머니가 해준 말씀이 떠올랐다.

상대방에 대한 작은 배려 이런 것들이 부족해서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말.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고쳐야겠다.

"갑자기 화내서 미안."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나 역시 원모는 그 말 후에 뒤따르는 액션이 없다.

이 정도 했으면 금액을 알려줄 법도 한데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새 정말 까먹기라도 한 건지 한참을 노려보는데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오늘부터 조금씩 고친다는 건 실패다.

아니, 사람 성격이 바뀐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야 이 자식아. 그럼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이제야 알아듣고는 얘기를 꺼냈다.

"30억이요."

"뭐라고?"

창가에서 조용히 커피 마시고 있던 김철수이사가 금액을 듣고는 매우 놀란 듯했다.

드디어 한 건 터트렸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천대표! 한두 번 더 튕기면 35억 정도까지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7억 주고 샀으니깐 단 며칠 만에 5배로 튕긴 거잖아."

그만하면 꽤 만족한다는 거였다.

"아니요. 그 가격에 팔 거면 애초에 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난리를 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래? 그럼 얼마에 팔겠다는 건데?"

"그걸 알아봐야죠. 최회장이 얼마까지 낼 수 있는지."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봐?"

"그거요? 성환이가 해야죠."

성환은 무슨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내가요?"

"그래. 예전에 풍수가 도움 많이 받았다니깐 대충 알 거 아냐. 혹시 대문그룹이 찾는 풍수가분이 있는지 알아봐봐. 안되면 너희 집에 도움 주는 분이라도."

귀찮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으나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는 김이사와 원모의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는지 조용히 답했다.

"찾는 건 해드리죠."

"알았어. 그런데 왜 안 나가?"

"꼭 나가서 찾아야 합니까? 이게 있는데."

한 손으로 아이폰을 들고는 흔들어댔다.

이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데요. 혹시 대문그룹 최회장이 이용하는 풍수가가 누군지 좀 알아봐 주세요. 아니면 우리 집에서 찾으시는 분이라도요."

"……."

끝이다.

그냥 전화 한 통만 하면 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초록 창을 열고 검색을 하던지, 아니면 관련 서적을 뒤지거나 알만한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받는 등 스스로 움직이는 게 몸에 배어 있는데.

성환은 그냥 전화 한 통 걸어서 부탁 아니 지시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정말 삼십 분 정도나 지났을까.

띠링!

메시지가 왔는지 성환이 핸드폰이 울렸다.

성환이 핸드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이어서 내 폰이 울렸다.

"풍수가 선생주소 전달했어요. 대문그룹 일 봐주시던 분은 돌아가셨다고 하고 우리 집에서 찾으시는 분 주소에요. 오늘 오후에 찾아뵙겠다고 해놨다고 하니깐 지금 천천히 가시면 될 겁니다."

"그래 잘했어. 가자. 등기소 들렀다가 그리로 가면 얼추 시간 맞을 거야."

"가다뇨? 내가?"

"그래 바로 너.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아까 분명히 내가 찾는 거까지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당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할 수도 있는 걸 같이 가자고 할까 봐 미리 선수 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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