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01화 (101/191)

101화 작전

"뭐라고? 그럼 통장이랑 인감은?"

원모가 말없이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이런!"

어쩐지 다들 즐거워하는 와중에도 원모가 줄곧 안절부절못하는 거 같더라니.

사고 한번 제대로 쳤다.

"야. 그렇게 중요한 걸 안 챙기고 도대체 뭐한 거야?"

내가 따지자 원모는 미안한 마음 한편으론 원망스러움도 있었는지 쏘아붙였다.

"그렇게 중요하면 대표님께서 챙기실 수도 있잖습니까? 아님 말씀이라도 해주시던지요."

그래.

원모가 잘못한 건 아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원모는 물론 나도 몰랐을뿐더러 인증서나 통장 같은 건 나도 챙길 생각조차 못 했었으니깐.

김철수 이사도 대강 상황을 파악한 듯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누구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잖아. 사실 누구 잘못이랄 것도 없고."

"네. 이사님 말씀이 맞아요. 원모야 화내서 미안하다."

원모도 조금은 화가 풀린 듯 한층 누그러졌다.

"아닙니다. 관리 이사인 제가 챙겼어야 했습니다."

성환도 별일 아니라는 듯 끼어들었다.

"계약금 빼고 6억 얼마. 그거 그냥 내가 보내면 되지 뭐 그런 거 가지고. 보내는 사람 이름을 회사로만 하면 되지 않나?"

그렇지.

우리에겐 치트키가 있다.

몇억 정도는 그냥 손가락질 몇 번으로 당장에라도 보낼 수 있는.

그러나 원모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저……. 계좌번호 적힌 거요. 계약서도 사무실에 있습니다."

"이런!"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돈도 준비되어 있고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어디로 보낼지 모르다니.

매도자 할아버지 쪽과 같은 입장이 돼버렸다.

계약금 두 배로 돌려주겠다고 사무실 앞에 죽치고 있을 테니 그리로 갈 수도 없고.

중개사한테 전화해봤자 상대측에서 이미 손을 써놨을 테니 협조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짱구를 이리저리 굴려봐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성환이 녀석 뭔가 묘안이라도 떠오른 듯 '그러면 되겠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가죠."

"간다고? 어딜?"

"어디라뇨. 당연히 사무실이지. 인증서고 뭐고 지금 다 사무실에 있다면서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 할아버지가 지금 돈 싸 들고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텐데?"

"그건 가봐야 아는 거지. 왜 가보지도 않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하지?"

성환이 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집에도 들어갈 수도 없는 데다 여기 카페에서 백날 죽치고 앉아있어 봐야 답이 나올 것도 아니니.

"그래 가자. 일단 가서 생각해보자."

성환이 차를 타고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바로 아래층인 22층까지 올라갔다.

마치 작전이라도 지휘하듯 김철수 이사에게 말했다.

"저희는 매수자 얼굴을 다 봤으니깐 이사님께서 다른 데 가는 척하면서 사무실 한번 슬쩍 보고 오시는 게 어떠세요? 저희는 복도에 있을게요."

"그러지. 오랜만에 잠입 취재하는 거 같고 재밌겠는데."

김철수이사는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고 23층으로 다시 올라갔고 우리는 복도 쪽 계단실로 나왔다.

잠시 후.

사무실을 다녀온 김철수 이사 표정이 어두웠다.

"예상대로야. 할아버지가 남자 두 명이랑 지키고 있어. 쉽지 않겠는데."

"그래요? 뭐 하고 있던가요?"

"전단지 같은 거 보고 있더라고. 점심이라도 배달시키려나 본데."

"전단지요? 여기 계세요. 제가 잠깐 위층에 갔다 올게요."

계단실 한 층을 올라가 23층 복도에 다다랐다.

귀를 쫑긋 기울이니 상대측 일행들의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메뉴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가벼운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 중국집으로 정했는지 배달주문을 했다.

"탕수육 하나에 짜장면 세 개요."

"……."

"네? 여기 건물이 배달이 안 된다고요?"

"……."

"4만 원이요? 네. 그럼 도착하셔서 연락주시면 밑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우리 사무실 빌딩은 배달이 안 된다.

직접 내려가서 음식을 받아올 수는 있지만, 배달원이 배달통을 들고 사무실까지 올라갈 순 없다.

최소한 한 명은 잠시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잠시 후.

일행 중 누군가의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네 팀장님."

"……."

"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한참 동안의 통화를 마치고는 바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해결될 거 같은데요. 상대방이 계약금 돌려받는 걸 거부해도 방법이 있답니다. 계약금의 두 배를 법원에 공탁하면 효력이 있다니까 지금 당장 법원으로 가시죠."

"그런 방법이 있어요?"

곧이어 할아버지와 일행 한 명이 급하게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역시 상대방이 나름 그룹사 회장 정도가 되니 이 정도 법률 자문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누가 먼저 돈을 상대방에게 쥐여주느냐에 달렸다.

여기서 서초역 법원까지는 아무리 막혀도 삼십 분 안쪽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지하철을 탄다면 그보다 빨리 도착할 수도 있다.

차에 내려서 걸어가는 시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시간, 서류 작성하고 제출하는 시간 등 이것저것 모두 감안해도 한 시간 안에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해야만 한다.

한 층을 내려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성환이 이상한 듯 물었다.

"대표님은 그런 게 여기서 들려요?"

"문 살짝 열어놨으니깐."

대충 얼버무렸으나 역시나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나저나 이제 한 명이니깐 우리가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저랑 이사님, 성환이가 붙잡고 있을 테니까 원모가 그사이에 사무실로 들어가면 되겠다."

김철수이사가 불안한 듯 답했다.

"내가 좀 아까 지나가면서 슬쩍 봤는데 구척장신에 수염까지 난 게 영락없는 관우상이야. 우리 세 명 가지고는 어림없을 듯해. 그러다 조성환님께서 다치시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구."

김이사가 온화한 얼굴로 성환이 쪽을 슬쩍 쳐다봤다.

이 와중에 딸랑딸랑 한 번 한 거였다.

그나저나 완력으로 안 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잠시 후 성환이 무심한 듯 말했다.

"잘됐네. 어차피 배달오면 여기 못 올라오니깐 받으러 내려갈 테니 그때 들어가면 되지 않나?"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래도 완전히 안심되는 건 아니다.

"그러다 늦게 오기라도 한다면?"

"중국집이 늦게 오는 거 봤습니까? 천재지변이 아니면, 아니 천재지변이어도 삼십 분이면 충분하죠."

"그래. 일단은 기다리자. 사오십 분 기다려도 안 오면 그때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되니깐."

"네."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아니 이제껏 내가 시킨 배달을 통틀어서 오늘처럼 짜장면이 기다려지긴 처음이었다.

학창 시절 동아리 방에서 수정이와 단둘이 있을 때 짜장면 시켰을 때가 떠올랐다.

불은 짜장을 제일 싫어한다는 수정이 말에 속으로 '제발 불지 말고 빨리 와라'라고 빌었을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더 간절했다.

난 다시 23층 복도에 올라 귀를 기울였다.

혼자서 폰만 쳐다보고 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0분, 20분이 지나고 30분쯤 되었을까 드디어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배달 오신 건가요?"

"……."

"제가 사정이 있어서 못 내려가는데 가지고 올라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

"혹시 수고비 오만 원 얹어서 구만 원 드리면 될까요? 철가방은 그냥 밖에다 내려놓으시고 짜장면 하나만 가지고 올라와 주시면 됩니다."

"……."

"네. 바로 좀 부탁드릴게요."

이런!

전혀 예상치 못하게 틀어졌다.

배달 아닌 척 밑에서 들고 올라오면 수고비로 오만 원까지 챙겨주겠다는 건데.

그 정도면 나 같아도 받겠다.

아니 오만 원이 아니라 단돈 만 원이어도, 계단으로 뛰어가고도 남겠다.

이제 방법이 없다.

어차피 지금 지키고 앉아있는 사람이 내 얼굴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 짜장면을 낚아챌 수밖에.

밑에 층으로 와 재빠르게 상황을 알렸다.

"원모야. 내가 배달 음식 낚아채서 문 앞에 지키고 있는 사람 유인할 테니까 네가 상황 봐서 사무실로 들어가. 들어가면 문 잠그고 바로 송금해버려."

원모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넵."

"성환이 너는 우선 나한테 십만 원 줘봐."

"네? 웬 돈?"

"돈 주고 음식 받아야 할 거 아냐?"

"뭘 시켰는데 십만 원이에요?"

"짜장면 하나."

"네? 짜장 하나에 십만 원이라고?"

"됐고. 말하자면 복잡해. 그냥 돈이나 내놔."

성환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이사님이랑 성환이는 최악의 사태 때 원모가 들어갈 수 있게 그 덩치 놈을 막는 걸로 하시죠."

김철수이사 역시 비장한 나의 말에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22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올라가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는 역시 배달원인 듯한 사람이 짜장면 하나를 신문에 싼 듯 안 보이게 들고 있었다.

"여깁니다."

그 사람의 팔을 낚아채듯이 내리게 했다.

"네? 아까 23층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22층인데 헷갈려서 잘못 말했나 보네요. 아무튼 짜장면 하나 맞네요."

배달원이 뭔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여기 말씀드린 대로 수고비요. 음식값 포함해서 십만 원으로 드릴게요. 거스름돈은 괜찮습니다."

눈앞에 십만 원을 보자 방금 전에 품었던 작은 의구심은 눈 녹듯 사라졌는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이제는 내가 배달할 차례다.

짜장면 하나를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23층에서 내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무실 앞에 정말 구척장신은 될만한 거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여기 짜장면 시키신분 계십니까?"

내가 소리치자 거구가 나를 향해 손을 마구마구 흔들어댔다.

"여기요!"

빤히 쳐다보며 잠시 고민하는 척하자 거구가 손짓으로 재촉했다.

"어이! 여기라고!"

그래도 내가 발걸음을 떼지 않자 거구의 얼굴에 핏기가 잔뜩 올랐다.

"뭐 하는 거야? 이리 안 가져와?"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내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허기가 지네. 이거 그냥 내가 먹을게요."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반대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내 말에 황당했는지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이자가 체구만 큰 게 아니라 어찌나 민첩한지 금세 내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이어서 내 팔을 잡자 살갗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 들며 자연스럽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악! 항복!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드세요."

사정사정하면서 힐끗 사무실 쪽을 보자 원모가 몰래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성공이다.

그러나 이자는 짜장에 진심인 자다.

겨우 짜장면 하나 뺏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 팔을 부러뜨리기라도 하듯 잡아채고는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야?"

"장난이라뇨? 절대 아니죠. 죄송합니다. 너무 맛있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거구가 짜장면 그릇을 낚아채듯 가져가고는 턱짓을 했다.

꺼지라는 뜻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한마디 덧붙였다.

"배달 다 했으면 가."

"저기요. 계산은요? 아까 수고비 주신다는 것도 그렇고."

거구가 마지못한 듯 귀찮은 표정을 짓더니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카드 앞면을 보니 역시 대문그룹 법인카드였다.

"얼마야?"

"잠시만요. 저희는 현금만 받는데요?"

"현금만 된다라니. 아까 분명히 카드로 계산할 거라고 말했었잖아."

"네? 그럴 리가요. 전 못 들었는데요?"

거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입가에 실소를 머금고 노려보았다.

카드 안 받으면 큰일이라도 치를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카드리더기를 안 가져와서요. 대신 현금으로 조금만 받겠습니다."

거구가 지갑을 펼쳤는데 딸랑 만 원짜리 두 장뿐이었다.

"이거밖에 없는데?"

재빨리 이만 원을 낚아챘다.

"이거라도 주십시오."

"영수증은 줄 수 있나?"

"네? 영수증이요?"

이자도 역시 회사 직원이다.

업무 때문에 외근 나와서 자기 돈을 한 푼이라도 쓸 수는 없는 법.

예전 천하제일 시절 생각이 났다.

한편 거구와 잠시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송금까지 완료했는지 원모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 사무실을 나오는 게 보였다.

뒤따라 나온 성환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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