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00화 (100/191)

100화 인증서

"네? 해지라뇨? 해지는 절대 안 됩니다."

"안 된다니? 그냥 계약금 두 배로 변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맞다.

해지하는 것도 계약당사자의 정당한 권리이다.

배액배상만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계약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칠천만 원인데 그걸 물어내면서까지 해지하겠다니.

대문그룹 최회장 측에서 작업한 게 확실하다.

"무슨 이유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거까지 알 필요 없고. 그냥 내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는 거지."

슬리퍼 신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서 계약서에 도장 찍고 돌아간 사람이 이제 와서 그 집이 필요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마 돈 때문이며 우리보다 후하게 쳐준다는 데가 있어서라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나 보다.

"매각금액이 부족하십니까? 혹시 다른 데서 더 많이 주겠다는 데가 있기라도 한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더 챙겨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계좌번호나 불러줘요. 지금 바로 두 배로 보내드릴 테니깐."

얼마든지 올려줄 수도 있다는 말에 금액은 물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배액배상하겠다는 걸 보니 더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어지간히 큰 금액으로 제안받았나 보다.

나가리다.

그래도 일단은 시간을 벌어놓고 작전을 짜야 한다.

"할아버지. 저희도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금액도 맞춰줄 수 있습니다."

"에이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냥 내가 여기에 뼈를 묻을 때까지 살 거라니깐."

"그럼 계약은 그대로 두고 그 집에 살게 해드리면 될까요? 아주 저렴하게 전세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냥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니깐. 계좌번호나 불러봐요. 계좌번호 안주면 여기 계약서에 적힌 주소로 돈 들고 갈 테니깐 그리 알아."

분위기를 보아하니 끝이다.

수십 배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게 생겼다.

"네. 조금 생각해보고 바로 전화드릴게요."

"지금 안 불러주면 그리로 갈 거예요."

매도자 할아버지 그냥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계약금을 두 배로 받는 순간 계약은 바로 해지된다.

게다가 매도자 할아버지는 내가 계좌번호를 안 불러주니 슬리퍼 차림에라도 돈 싸 들고 바로 쳐들어올 기세다.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정말 끝났나?

단타로 대박칠 부동산의 기회가 이렇게 날아가는 것인가.

마치 화라도 내는 양 큰 소리로 통화해서인지 원모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대표님. 보아하니 어제 계약 물리자고 하는 거 같은데, 그거 때문인가요?"

"맞아. 짐 싸. 지금 도망가자."

"네?"

"안 들려? 일단 여길 뜨자고. 계약금 두 배로 돌려준다고 온 데잖아. 받으면 끝나는데 일단 피해서 시간이라도 벌어놔야지."

"아니 왜요? 하루 만에 7천을 벌었잖습니까. 확실하지도 않은 걸 마냥 기다리는 거보다 낫지 않습니까?"

"7천을 벌다니? 수십억을 날린 건데."

"그럼 차라리 그 돈으로 딴 거 사면 안 됩니까?"

"안 돼 무조건 그거 사야 해. 일단 뜨자. 뭐해 짐 안 챙기고? 짐 챙기면서 넌 성환이랑 김철수이사님께 전화해. 따로 연락할 때까지 사무실로 출근하지 말라고!"

워낙 다급하게 재촉하니 원모도 할 수 없다는 듯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대강 정리를 끝내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사무실의 불을 모두 껐다.

"준비됐어? 이제 나가도 되지? 며칠간 들어오지 못한다고 생각하자고."

"네. 뭐 특별한 것도 없는데요."

"중요한 거는 챙겨야지."

"중요한 게 있어야 말이죠."

딱히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겠고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가지만 챙기고 나왔나 보다.

엘리베이터 앞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자 세 번째칸 엘리베이터가 30층에서 우리가 있는 23층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편 두 번째칸 엘리베이터는 18층, 20층 점점 우리 층과 가까워지면서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어제 매도자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이대로면 마주친다.

"원모야 피해!"

"네?"

"복도로 가자고!"

재빨리 원모를 잡아끌고 복도 계단 쪽으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간발의 차이로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할아버지 일행은 우리 사무실 쪽으로 간 듯했다.

"할아버지! 매수자하고 방금까지 통화한 거 아니에요?"

"그랬지 십 분도 안 된 거 같은데? 혹시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럼 기다려 볼까요? 직원이라도 오면 그냥 쥐여주고 가죠."

역시 코칭해주는 누군가가 같이 있었다.

아마 대문그룹 최회장 측에서 보낸 비서실 직원들일 거다.

자기들이 작업 끝내놨는데 우리가 더 얹어주고 채갔다니 할아버지를 찾아와 되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

계약금 배상은 물론 매도금액까지 후하게 쳐준다고 하고 돈 싸 들고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코칭하는 것일 거다.

계단실 밖으로 잔뜩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원모가 한마디 했다.

"뭐하십니까? 대표님. 그리고 갑자기 복도로 왜 피한 겁니까?"

"방금 올라온 엘리베이터에서 어제 매도자 할아버지 목소리를 들은 거 같아서."

"그게 들리십니까?"

"설마 못 들었어? 완전 소리 질렀는데? 병원이나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원모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그냥 그러려니 생각한 듯했다.

"방금 전까지 계좌번호 불러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여기로 오면서 전화한 거 같아. 누군가 조력자가 있는 게 확실해. 옆집에서 정말 사람이라도 붙였나 봐. 이 정도로 나오는 거 보니깐 잘만 하면 정말 큰돈 벌겠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어차피 계약해지하겠다고 마음 굳혔다면서요."

"어떻게든 막아야지."

복도를 걸어 내려와 건물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죠? 대표님?"

"우선 팀원들 모여서 작전회의라도 해야지. 일단 한 블럭이라도 멀어지자."

돈 주겠다는데 피해다니는 꼴이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그래도 더 큰 돈을 위해서면 이 정도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무실이야 얼마든지 오랫동안 더 비울 수도 있다.

선릉역 뒷골목의 한 커피숍.

소식을 듣고 성환이와 김철수 이사까지 합류했다.

짐 싸 들고 도주한 바람에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김철수이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천대표!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사무실에는 오지 말라니. 빚쟁이라도 쫓아온 거야?"

"아뇨 그 반대에요. 돈 주겠다고 쫓아온 거예요."

"뭐라고?"

"어제 계약한 빌라 매도자 측이 갑자기 연락 와서 계약 해지하겠다고 해서요. 계좌번호 안 줄 거 같으니깐 직접 돈 싸 들고 두 배 변상한다고 찾아왔다니깐요. 아마 팔았다는 소식 듣고 옆집에서 바로 작업한 거 같습니다. 옆집이 대문기업 최회장 집이거든요."

김철수이사는 빚쟁이가 아니란 말에 한편으론 안심이 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계속 피해다니기만 할거야?"

"글쎄요. 돈을 받으면 바로 계약 해지되니깐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중도금, 잔금은 언젠데?"

"중도금은 보름, 잔금은 한 달 뒤에요."

한 달이란 말에 김철수 이사 표정이 굳어졌다.

"한 달 동안 사무실에 못들어간다고?"

"그건 최악의 경우고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봐야죠."

원모는 상심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하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게 얼핏 보였다.

이 자식 한 달 동안 출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좋아 죽는 거다.

"원모야!"

내가 부르자 마지못해 고개를 드는데 그 짧은 사이 마인드 컨트롤이 잘 안 되었는지 안타까운 척했지만, 한편으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지 웃픈 표정을 내어 보였다.

"네. 대표님."

웃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는지 발음이 새어 나왔다.

"넌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이다."

"네? 출근이라뇨?"

"대책 마련은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정색하자 원모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는 시무룩해졌다.

"네? 아 네."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고 시간만 흐르는데 마침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매수자 할아버지였다.

전화까지 피하면 재협상이고 뭐고 없을 거 같아 할 수 없이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저기 오늘 회사 아무도 안 오나? 계좌번호를 주지 않으시니 직접 드리려고 방금 여기 회사에 왔는데."

방금 왔다니.

아까도 거의 다 도착해서 계좌번호 달라고 전화했으면서.

"네 어르신. 지금 저희가 모두 외근 중이어서 언제 들어갈지 모릅니다. 내일 다시 천천히 얘기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계좌번호나 남겨줘. 내 계약금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드릴 테니."

"아닙니다. 저희는 그 집이 정말 필요합니다. 어르신 그냥 마음 바꾸시죠."

"나도 그 집이 필요하다니깐.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 거라고!"

흥분한 듯 소리쳤다.

사무실 앞에서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닌 듯 짜증이 솟구쳤나 보다.

"어차피 방법 없는데, 그냥 빨리 받는 게 나을 텐데. 혹시 세 배로는 부족한가?"

"아닙니다. 저흰 정말 그 집이 필요합니다."

"알았어.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뚜뚜뚜뚜.

끊어버렸다.

아마 최회장 측 비서실 직원들이 돌아가면서라도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을 태세다.

어쩌면 집 주소까지 알아내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법인등기부등본에 등기이사의 집주소가 나와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당분간 집에도 못들어가게 생겼다.

정말 짜증이 제대로 몰려왔다.

상황을 지켜만 보던 성환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왜 상대방이 계약을 깨면 계약금의 두 배를 받을 수 있는 거죠?"

"글세. 계약금이라는게 약속을 하는거니까 손해배상 같은 개념이 아닐까?"

그냥 살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거지 이에 대해 법조문을 찾아보거나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어디 나와 있기라도 한 거겠죠?"

"그렇겠지. 당연히 민법에 나와있겠지."

성환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끙끙대다가 포기한 듯 휴대폰을 내려놨다.

"에이 몰라. 도대체 어딨다는 거야?"

뭔가를 스스로 찾아보려하는걸 보니 예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

그러나 역시 아직 습관은 안 되었는지 포기 또한 굉장히 빠르다.

내가 성환이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낚아채 초록 창에서 검색을 시작했다.

계약해지, 해약금 등 두어 마디 치나 민법 조문이 바로 나왔다.

휴대폰 화면을 띄운 채 성환에게 던졌다.

"야. 십 초면 될 걸 이게 뭐 어려운 거라고 버벅대냐?"

성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휴대폰을 받고는 화면에 뜬 법조문을 읽었다.

"매매의 당사자 일방이 계약 당시에 금전……을 교부한 때에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거봐. 있잖아. 배액 상환해서 해제할 수 있다고."

성환이 내 말뜻을 이해 못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배액이라는 게 두 배란 말이거든."

성환이 자기가 설마 그런 것도 모르겠냐라고 하는 듯 노려봤다.

"아니 그거 말고.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란 말이 있잖아요."

"그게 뭘?"

"이게 무슨 시기를 뜻하는 거 같지 않아요?"

"시기라니?"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기간 같은 거. 그 이후엔 못한다, 뭐 이런 거요."

조문을 천천히 읽어보니 성환이 말이 맞는 듯했다.

"그러네.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만 해제할 수 있다는 말이네. 그런데 그 이행의 착수란 게 뭘까?"

성환이 한심하듯 쳐다봤다.

"그것도 모르십니까?"

이 자식이 아는 걸 내가 모르고 있다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지만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다.

"모르니깐 알려줘 봐. 무슨 말인데?"

"물건 사는 사람이 해야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글쎄? 돈 내는 거?"

"그렇죠. 돈만 내면 되는 거죠. 다른 게 뭐 할 게 있습니까?"

그렇다.

매수자가 이행할 일이란 돈을 내는 것뿐이다.

성환이 아는 변호사 몇몇과 통화를 하더니 두 손을 활짝 쳐들었다.

"맞네요. 중도금을 먼저 보내버리면 이행을 착수한 거랍니다."

중도금을 납부할 시기가 안 되었더라도 미리 납부만 한다면 이행을 착수한 거고, 그렇다면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성환은 스스로 대견했는지 뻗은 두 손으로 자기 어깨를 감싸고는 토닥거렸다.

미친놈.

그래도 어쨌든 생각지도 못하게 크게 한 건 했다.

차마 칭찬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사회생했다는 기분에 눈 딱 감고 뱉어버렸다.

"성환아, 잘했어."

김철수이사도 엄지를 치켜들며 같이 거들었다.

계약금 보낸 계좌번호를 알고 있으니 중도금은 물론이고 잔금까지 그냥 보내버리기만 하면 된다.

"원모야! 지금 송금하자."

그러나 귀까지 새빨개진 게 원모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 원모야? 너 설마?"

"네……. 저…… 안 가지고 나왔습니다. 인증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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