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99화 (99/191)

99화 계약

성환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걸? 다 쓰러져가는데 뭐하러 삽니까? 저기서 사람이 살 수나 있을까요?"

"누가 너보고 살래? 그냥 사놓고 옆집에 파는 거지."

"팔다뇨?"

"성북동 안가 별채도 옆집 사서 붙인 거라며? 여기도 그럴 거라는 게 네 눈에는 안 보이냐?"

"엥 그럼 대표님은 그런 게 보입니까?"

"당연하지. 대충 둘러 봐봐. 코너라 왼쪽과 앞쪽은 도로로 막혔고 뒤에는 산이라 더 뻗을 데가 없어. 그런데 바로 오른쪽은 이 빌라야. 지금 집 대충 보면 남북으로 길어서 안 이쁘잖아. 이 빌라 부지만 붙인다면 네모반듯한 모양도 되지. 이 동네는 풍수가 좋다고 소문난 지역이기도 하니 완벽하잖아."

"뭐야? 아깐 또 미신이라며 갑자기 이제 와서 완벽하다니."

"믿지 않는 사람한텐 미신이지만 믿는 사람한텐 일종의 종교일 수 있어. 나한텐 그저 낡고 허름한 집이지만 대문그룹 최회장에겐 그게 아닐 수 있다는 말이지."

성환은 대충 이해했는지 더 이상 반문하진 않았다.

"그냥 따라와 봐. 우선 집 나온 게 있는지부터 보자."

성환은 그래도 못 미더운지 귀찮은 내색을 지어 보였다.

"없으면 바로 가는 겁니다."

"알았어. 딱 몇 군데만 들러보자."

꽤 높은 지역에 있어서인지 주위엔 부동산은커녕 편의점 같은 흔하디흔한 점포 하나 없었다.

골목골목을 뒤지다가 결국 아랫동네까지 꽤 내려와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중개사분이 소파에 걸터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고개를 돌려 대강 위아래로 한번 훑더니 다시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에 대한 응대가 영 아니었지만 어렵게 찾은 거라 돌아나갈 수도 없고.

주위에 다른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물을 내놓았다면 여기일거라는 생각에 찬밥 더운밥 따질게 아니었다.

"저기요. 여기……."

중개사는 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체 귀찮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대낮에 양복 입은 남자 두 명이 들어서니 대강 사이즈가 나온 거다.

실수요자는 절대 아닐 테고 그저 인테리어나 등기, 세무 신고할 손님 소개해달라고 온 업자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명함이나 주고 가라는 듯 손을 뻗어 상담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저희가 집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살짝 자세를 고쳐잡고 이제야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냥 둘러보러 온 게 아닌 정말 집을 살 의사가 있는 것처럼 보여야 매물을 알려줄 거 같아 간절한 눈빛을 꺼내 보였다.

"집 보시게요?"

"네! 이 친구가 결혼해야 해서 신혼집이 급해서요."

성환이 결혼이라는 말에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

"아 그러시구나. 보통 이렇게 남자 두 분이서는 집 알아보러 잘 오시지 않거든요. 나이 차이가 있어 보여서 친구 사이도 아닌 거 같고."

"네. 영업직이라 같이 돌아다니다가 들렀습니다."

중개사분 뭔가 이상하다는 듯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사신다는 분이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아 네. 저희 회사 명의로 사서 이 친구한테 사택으로 쓰게 하려고요."

"아하. 그러시구나."

이제야 정말 살 의향이 있어서 온 손님이라고 판단한 듯 자세와 말투가 달라졌다.

"이 친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곧 결혼해야 해서요. 빨리 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마침 회사가 근처고 하니까 이 동네에 마련하려구요."

"네, 원하시는 가격대는 있으세요?"

"자금 여유가 많지는 않아서요. 조금 저렴한 빌라 같은 데가 있나요?"

"얼마 정도 금액으로 생각하시는데요?"

중개사의 물음에 성환이 답답한 듯 답했다.

"그냥 사오십 억은 안 넘었으면 합니다."

금액을 듣고 상대방이 놀랐다.

"네? 뭐라구요?"

성환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이 친구가 숫자를 잘 몰라서요. 사, 오억 정도 말한 겁니다. 혹시 지나갈 때 보니까 청림빌라라고 좀 저렴해 보이고 하던데. 거기 매물 있습니까?"

'제발 있어라'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상대방의 오른쪽 눈꼬리가 올라가는 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정말 사시게요?"

최대한 간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당장요."

"거기 매물이 곧 나올 게 있는데 마침 한 5억 정도에 팔고 싶다고 하네요. 그런데 거기는 이미 매물만 나오면 바로 사겠다고 신신당부한 데가 있어서요. 예약이라고 해야겠죠."

"누군데요?"

"그냥 손님이에요. 강남 쪽에 계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딱 집어서 이 빌라만 사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네. 다른 거 소개해줘도 필요 없다고 하시네요."

이건 대문그룹 최회장 측에서 비서실이나 측근들의 명의를 빌려서 작업한 거다.

최회장 본인 또는 계열사 명의로 빌라의 집들을 사들인다면 소문이 돌아서 기존 집주인들이 한몫 챙기려고 안 팔고 버틸 테니 분명히 차명으로 작업하고 있을 거다.

여러 사람의 명의로 전부를 매입한 후에 최회장에게 다시 되파는 형식이 될 거다.

그중에 하나만 낚아채기만 하면 된다.

"저희한테 넘기시죠. 수수료는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럼 안 되죠. 그 손님하고의 관계도 있는데. 이미 예약했다니깐요."

거절하면서도 살짝 눈빛이 흔들리는 게 더 센 걸 말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하는 듯했다.

"저희가 수수료로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중개사분은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부동산 뒤쪽 내실이 있는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귀를 쫑긋 기울이니 역시나 전화하러 간 것이었다.

"여보세요! 거기 청림빌라 예약한 손님 있잖아. 수수료 얼마 준다고 했어?"

"……."

"뭐? 오천? 그렇게나 많이?"

"……."

"알았어."

잠시 후 화장실 다녀온 척 태연하게 자리에 돌아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파이널 오퍼를 던졌다.

"수수료로 일억을 드리겠습니다."

"네? 일억이요?"

상대편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 일억이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계약서를 쓰는 겁니다. 지금 당장 전화해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중개사가 급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어떤 마음인지 고스란히 전달됐다.

결과가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성에서 확실한 수익으로 바뀔지 말지 결정되는 바로 그 순간.

"네 사장님. 행복부동산이에요."

"……."

"사장님 내놓은 집 오억에 팔아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

한참 수화기를 들고 있던 중개사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다른 데 통해서 파시겠다고요? 얼마에요? 지난번엔 분명히 저한텐 전속 중개해주신다고 한 거 아니었나요?"

"……."

"매입하신다는 분은 누군데요?"

"……."

"그분이면 저한테 예전부터 사달라고 부탁해 놓은 분인데……."

잔뜩 낙담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꺼냈다.

"저한테 예약 걸어놓은 손님이 다른 부동산에도 걸어놨나 보네요. 다른 부동산에서 6억에 팔아주겠다고 하고 낚아채 간 거 같아요. 안 되겠는데요. 혹시 다른 데는 안 찾아보십니까?"

중개사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포기한 듯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냥 물어본 거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은 거다.

"사장님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뒤통수 맞으신 거 같은데 분하지 않으십니까? 당하고만 계실 거예요?"

중개사 표정이 잠시 분노로 일그러지듯 하다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네 이 바닥이 다 그렇죠. 어쩔 수 없죠. 뭐."

"지금 집주인분께 다시 전화 거세요. 전화하셔서 더 비싼 값에 팔아주겠다고 하세요. 수수료도 안 받고요. 어차피 수수료는 저희가 1억 드릴 테니 매수자분께 그까짓 거 수수료 쬐끔은 따로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요?"

한줄기 서광이라도 비추는 듯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정말이요? 그럼 얼마에 매입하실 수 있으신데요?"

다른 데서 6억에 산다고 했으니깐.

한 2천 정도 더 부르면 괜찮겠지.

아니 좀 더 써서 3천 부를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

옆에서 듣고만 있던 성환이 답답했는지 대신 답했다.

"7억이요."

3천도 충분한데 1억을 더 주겠다고 하다니 놀란 마음에 신발로 성환의 구두를 툭툭 쳤다.

성환은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찌푸렸다.

마치 '귀찮으니깐 그냥 하자는 대로 하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중개사분 매우 놀란 듯 되물었다.

"정말 7억으로 매입하실 수 있으시다고요?"

성환이 확신에 찬 듯 답했다.

"네. 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금 당장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다면요."

중개사의 눈빛은 투지를 가득 담은 듯 활활 불타올랐다.

그래.

지를 수 있을 땐 과감히 질러야 한다.

괜히 밀당하면 상대방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시간만 주는 거다.

생각할 여유 없이 밀어붙이는 게 답이다.

"네, 이 친구 말대로 지금 당장 전화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내 말에 전화기를 들고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지금 바로 저희 사무실로 오시면 7억에 팔아드릴게요. 사장님께는 수수료도 안 받겠습니다."

"……."

"지금 뛰어오세요. 제가 손님 붙잡고 있을 테니까요. 빨리 오셔야 해요."

한 십 분이나 지났을까.

정말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한 분이 숨을 헐떡이며 중개사 사무실로 들어섰다.

슬리퍼 차림인 걸 보니 전화 받고 급한 마음에 신발도 제대로 안 신고 나왔나 보다.

그러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다른 데랑 계약하려고……"

헉헉.

"한 게 있는데 여기 사장님께서 하도 부탁하니깐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야."

헉헉.

숨을 헐떡거리는 게 민망했는지 그냥 도장부터 내밀었다.

계약시 필요한 서류들을 마련하는 사이 원모가 사용인감을 가지고 왔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바로 계약금 7천만을 인터넷뱅킹으로 송금했다.

인터넷뱅킹을 못 하는 집주인 할아버지는 은행까지 직접 가서 통장에 입금되었는지 확인을 하고 와서는 기쁜 마음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집을 사면서 집 구경 한번 해보지 않는 게 이상할 법도 했지만 당장 손에 쥘 뭉칫돈 생각에 집주인은 물론 중개사도 그런 비슷한 얘기도 꺼내질 않았다.

탐욕 앞에는 앞뒤 잴 것도 없고 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도 안 나는 법이다.

오직 지금 당장 손에 쥘수 있는 돈 생각만 있을 뿐.

집 계약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

원모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왜 집을 사는거죠? 부동산은 투자용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으셨잖습니까?"

"부동산도 부동산 나름이라고 했잖아. 저건 단기 투자용이야."

"네? 그냥 30년 된 빌라라고 한 거 같은데요? 재개발 동네도 아니고. 재개발이라고 쳐도 최소 십 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저건 달라. 재개발도 아니고. 팔 데도 있다니깐."

원모가 여전히 납득이 안되는지 성환에게 따지듯 물었다.

"조성환님 옆에서 왜 대표님 안 말리셨습니까? 그 동네 그 정도 오래된 빌라면 3~4억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70억도 아니고 7억인데요? 돈 몇 푼 가지고 왜 기운을 뺍니까? 사야 한다면 반드시 사는 게 중요하지 한두 푼 덜 쓰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뭐하러 오래된 빌라를 그 돈 주고."

"제가 봐도 괜찮을 거 같아요. 저희 집도 예전에 옆집 다섯 배 주고 샀다니깐요. 열 채 빌라에 아홉 채를 제값 주고 샀으면 나머지 한 채는 40배를 받아도 된다는 말 아닌가요?"

이놈이 평균의 개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단독주택 한 채가 아니라 오히려 빌라라서 훨씬 큰 수익이 가능할 수 있다.

한 채의 시가가 4억 원이라고 하면 열 채 모두 합쳐 시가가 40억이니 다섯 배까지 줄 용의가 있다면 모두 합쳐서 200억 원까지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아홉채를 6억원주고 샀다고 하면 총 54억원을 지출했고 나머지 한 채는 146억원을 주고도 살수 있다는 게 된다.

"원모야. 성환이 말이 맞아. 이건 정말 초대박이 될거야."

돌아오는 차 안.

대박의 기대에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창밖에 빌딩 숲을 감상하며 커피한잔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어제 계약했던 집주인 할아버지 전화번호였다.

잔금까진 한 달이나 남았는데다 통화할 일이 따로 없는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여보세요."

"어제 계약한 사람인데요."

"네. 무슨 일이시죠?"

"그게……. 계약 해지할라고."

어째 불길한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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