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풍수지리
"누구시죠?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원모가 정장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따지듯이 물었다.
상대방은 그저 옅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원모야. 누가 왔는지 모르겠냐? 뺏지 보고도?"
원모는 이제야 앞 사람 재킷의 배지를 보고는 상황 파악이 된 듯했다.
"아.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딜 가나 수행비서 항상 달고 다니면서 굳이 재벌 티를 팍팍 내며 찾아올 사람은 조윤경밖에 없다.
난 무심한 척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너 이러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야? 조씨도 아니고 최씨 그놈한테 천하제일이 다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거냐고?"
조윤경 역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에 똥줄이 타는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성환을 꼬드기러 온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왜 없어?"
"뭘 할 수 있는데?"
"아빠한테 말은 해볼 수 있잖아."
"말은 누나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조윤경은 곤란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난 지난번 일도 그렇고. 최동욱이 아들이라고 하니 진짜 엄마 아들인 네가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이상현이 누설한 바람에 홍콩 페이퍼 컴퍼니로 장난친 걸 들켜서 조회장에게 듣기 싫은 소리 하기가 겁난다는 거다.
게다가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천하제일의 가풍상 적장자인 성환이가 물려받는 게 원칙이니 나서보라며 부추긴 거다.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적장자라고 우쭈쭈해주니 그새 넘어갔다.
"오늘 저녁 가족회의 시간에 네가 말을 먼저 꺼내 봐. 그러면 내가 이어갈 테니깐."
"알았어."
잠시 후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조윤경이 나왔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양 나는 물론이고 팀원들 모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쌩하니 나가버렸다.
이어서 성환이가 회의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야? 조윤경이 왜 왔어, 여기에?"
"그게……."
사실대로 말할까 핑계를 댈까 짱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왜 회장님께 가서 뭐라도 해보라고 했나보지?"
성환은 매우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들려요? 아니 회의실에 도청장치라도 있는 거야 뭐야?"
"꼭 들어야 아냐? 안 봐도 상황이 뻔하잖아. 자기가 나설 처지가 아니니깐 너보고 나서라고 꼬드기러 왔겠지."
"꼬드기긴요. 제가 그런다고 당할 사람입니까? 그냥 향후 승계에 대해서 논의해보자고 한 거예요."
자존심이라도 상했는지 둘러댔다.
"아서라. 회장님이 레임덕을 용인할 거 같아? 최근에 건강도 많이 회복하셨다면서. 앞에서 나서지는 않더라도 대표이사랑 최동욱 통해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려고 하시겠지. 이번 인사발표를 보고도 모르겠어?"
생각해보니 내 말이 맞는 듯 별다른 대꾸를 못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괜히 나섰다간 너만 당할 거야. 지금은 상황을 보고 그냥 엎드려 있어. 내 생각엔 최동욱을 후계자로 점찍었다기보다는 아직은 테스트 정도 해보는 것 같아."
"최동욱이 기고만장해서 나대는 꼴을 보라고요?"
"언제는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땐 이럴 줄 몰랐었잖아요."
"최동욱도 물밑에선 자기 사람들로 만들려고 하겠지만 대놓고 나서지는 않을 거야. 경영 능력을 검증받는 게 우선이니깐. 권토중래라고 못 들어봤어? 넌 지금은 나서지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서 힘을 기르는 게 나아. 여기 천하태평에서 말이지."
"권토중래라고요?"
"그런 게 있어. 사자성어야."
"아! 할많하않 같은 거요?"
"그건 줄임말이고."
"언젠 또 사자성어라면서. 그게 그거 아닌가?"
"그래 맘대로 생각해라. 그거나 저거나 마찬가지이긴 하니깐. 하여간 오늘 가족회의 땐 쓸데없이 나서지 마. 욕은 네가 먹고 조윤경 좋은 꼴만 시키는 거니깐."
성환은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한쪽을 들며 갸우뚱했다.
"그런데, 오늘 가족회의 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예리한 놈.
그러고 보니 아까 엿들은 것이지 이놈한테 들은 게 아니었다.
"아. 그거야 아까 아침에 네가 얘기했잖아."
성환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투로 말했다.
"네? 내가 얘기했다고요?"
"당근이지. 안 그럼 내가 어떻게 알겠냐?"
이럴 땐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뗐다.
"자자, 오랜만에 모든 주주들이 참석했으니 회의 한번 해볼까요?"
원모는 회의하잔 말에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따로 회의실에 가기보다는 팀원들 모두 그냥 의자만 끌어와서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곳에 대강 자리했다.
"현재 우리 천하태평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두 회사의 비상장주식과 현금 20억 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금을 마냥 낮은 이자율의 예금에 쌓아둘 수도 없고 적정한 투자처를 물색해서 투자해야 하는데요. 일 년 정도의 단기투자를 계획 중입니다. 어디 좋은 아이디어 갖고 계신 분 있을까요?"
김철수 이사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천대표. 우리가 당장 이익실현해서 분배하고 청산할 것도 아닌데 왜 단기투자를 하겠다는 거지?"
내년에 암호화폐 거래소가 생기니 가장 수익률이 높은 그곳에 몰빵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의사결정이다.
그러나 이는 미래를 알고 있는 나만 납득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낱 투기에 불과할 뿐일 거다.
괜히 지금 투자계획을 말해줄 필요 없이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다.
"네 이사님. 수익률도 중요하지만, 기간도 매우 중요합니다. 비상장주식에만 투자한다면 수익이 매우 클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현금화하기까지 상당 시간이 걸리니 회전율이 느립니다. 수익이 그보다 낮지만, 회전이 빠른 곳을 찾아 투자한다면 누적 투자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김철수 이사가 아무리 재무팀에 오래 근무했어도 IR파트에만 있었으며 그 외 언론사나 홍보 관련 일만 했으므로 이해하기에 무리였나보다.
"네 그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A안은 3년에 수익률 300%고요. B안은 1년마다 수익률 100%라고 쳐요. 그럼 A안, B안에 100원을 투자하면 3년 뒤 얼마가 될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원모가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다.
"네. A안은 400원이고 B안은 300원입니다."
욕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천하제일 재무팀 그것도 경리파트 짬밥에 지금은 천하제일 관리 이사를 맡고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왔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답이었다.
"땡! 이런 씨……. 죽을래? 더하기 하냐?"
못 참았다.
참는 건 내 스타일 아니다.
틀리면 쪽팔릴까 봐 그런 건지 정말 몰라서 그런 건지 원모 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A안이 400원은 맞는데 B안은 800원이죠. 1년마다 두 배씩 되니깐 200원, 400원, 800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기로 회전율이 높은 곳에 투자하자는 겁니다."
모두들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다.
처음에 어렵게 얘기하고 나중에 쉽게 풀어주면 대부분 이렇게 넘어간다.
단순히 원리를 이해한 것뿐이지만 말을 꺼낸 사람의 의도대로 설득하는 효과도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건환이가 답답한 듯 물었다.
"도대체 어떤 게 B안이라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마땅한 단기 투자처가 상장주식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삼영 같은 우량주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데."
회귀할 때 즈음의 삼영 주식의 가격은 대충 기억이 나지만 그건 그때의 종가일 뿐 앞으로 수년간의 그래프를 기억하고 있는 것까진 아니다.
물론 수년 뒤엔 오를 테지만 지금부터 일 년간은 떨어지다가 내년부터 확 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막상 암호화폐 거래소가 생겨 비트코인을 사려고 할 때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못 할 수도 있다는 건데.
원모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주식은 떨어질 수도 있는데 차라리 부동산을 사는 게 어떻습니까? 예로부터 부동산은 불패라고 하지 않았잖습니까?"
"부동산도 부동산 나름이지."
"장인어른 되실 분이 송도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어민보상용지 나온 거 지주 작업해서 제대로 개발하기만 한다면 꽤 큰 돈 만질 수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개발사업이 많은 돈을 버는 건 가능하다.
단지 오래 걸릴 뿐.
강남 아파트 같은 거라면 몰라도.
머뭇거리는 사이 성환이 대신 대답해줬다.
"부동산을 왜 사죠? 부동산이 투자대상이 되나?"
"투자용이 될 수도 있지. 빨리 현금화할 수만 있다면."
"땅 사다가 어느 세월에 올려 팔아서 현금화합니까? 그냥 대대손손 묶어두는 거 아닌가요? 땅이라는 게?"
"개발을 기대하고 사는 토지는 네 말이 맞지만, 주거용은 현금화가 빠를 수 있어."
"주거용이면 집이요? 옆집 사서 늘릴 거 아니면 집을 뭐하러 삽니까?"
"집을 늘리다니? 아파트 옆집 사서 벽 뚫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뇨. 옆집 사서 담 허물고 붙이는 거죠. 지금 누나 살고 있는 별채도 사실 옆집이었는데 매입해서 담 허문 거잖아요."
"아니 뭐하러 사서 붙여? 근처에 많잖아? 다른 집들."
"딱 그 자리가 풍수가 좋데요. 그래서 돈도 달라는 대로 주고 샀을걸요. 아마 다섯 배는 준 거 같은데……."
"누가 그래?"
"누구긴 누구예요. 풍수가지."
"요즘 같은 시대에 풍수가라니. 도대체 그런 미신을 누가 믿는다는 거야?"
"재벌그룹 회장들이 옛날부터 집이나 회사 터 잡을 때도 항상 풍수가를 데려간다는 얘기 못 들으셨어요? 하다못해 신입사원 면접 때도 관상가 들였다는데. 아마 우리도 예전엔 그랬을걸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었던 게 떠올랐다.
대문그룹 회장이 한남동 일대의 집을 다 사들였다고.
회장 사택의 옆집 그것도 빌라 한 동을 전부 사서 부숴버리고 성처럼 큰 집을 새로 지었다는 얘기였다.
그 옆집과의 담 때문에 맥이 막혀있었는데 담을 허물고 땅을 이어붙이면서 맥이 뚫려서 더욱 크게 번성했다는 말과 함께.
마침 딱 이맘때 정도였던 거 같다.
기회다.
단타가 가능한 부동산이다.
장군들이 난다는 장충동과 더불어 풍수지리상 최고의 터.
그곳을 잡아야 한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아직 매입작업이 본격화되지 않아 우리에게도 기회가 남아있기를 빌 뿐이었다.
"성환아! 너 혹시 한남동에 있다는 대문그룹 회장 집이 어딘지 알아?"
"당연하죠.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잠시 쭈그려있지만, 그래도 재벌이라 다들 알고 지낸다는 것처럼 위세 한번 떤 거다.
"됐고. 가자."
"네?"
"난 잘 모르니깐 네가 앞장서라고."
"지금요?"
"그래. 지금 당장 가자니깐."
"뭐 하러요? 풍수가 어떤지 보게요?"
"너네 동네는 봤으니깐 다른 동네 보자고."
"뭐 이래? 하여간 뭐가 이리 극단적이고 충동적이야?"
한남동 분위기는 조회장 안가가 있는 성북동과도 사뭇 달랐다.
크고 높은 담들로 둘러싸인 매우 큰 집들이 있는 건 비슷하나 창 한두 개밖에 나지 않은 딱 봐도 소형에 허름한 노후불량 주택들도 산재해있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빈부격차를 사진 한 컷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희한한 풍경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듯 성환이 차를 길 옆에 세웠다.
"저기요. 보이죠?"
"뭐가 보인다는 거야? 그냥 담장밖에 안 보이는구만"
"저기 저 집. 문 크게 있는 거 안 보여요?"
성환이 가리킨 집은 담장의 길이나 높이 같은 건 주위의 다른 큰 집들과 비슷했으나 유독 대문만 정말 대문이라는 말에 걸맞게 크고 웅장했다.
"큰 문……. 대문그룹이라고 문을 저렇게 크게 만든 거야?"
"그렇더라구요. 저 집안이 원래 문짝 같은 거 만드는 인테리어업체로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큰 재벌그룹으로 만들었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점쟁이가 회사 이름도 지어주고 문도 크게 내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런 미신 같은 걸 믿을 정도면 됐다.
마침 다행히 대문그룹 회장 바로 옆에는 관리 하나 안 된 듯 다 쓰러져가는 듯이 낡고 허름한 빌라 한동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아직 매입작업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데.
저 빌라에서 단 한 채만이라도 살수만 있다면 완벽해진다.
"됐어!"
"에? 뭐가 됐다는 거지?"
손가락을 뻗어 성환에게 빌라를 가리켰다.
"완벽해. 저걸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