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97화 (97/191)

97화 변화

<천하제일 그룹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쇄신 바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회장이라는 직함은 물론 모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조인철회장이 경쟁사 전CEO를 영입하고 사내 우수인력을 발탁해서 주요 경영진에 앉히는 등 그룹의 혁신안을 내놓았다며 긍정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평상시 그룹에서 관리하던 언론사 대부분은 그룹경영의 공정성과 투명성 제고에 앞장서고 있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앞으로 상당 기간 천하제일 그룹의 광고를 어느 매체에서든 볼 수 있을 거다.

그룹 CI 광고, 신규제품은 물론 출시한 지 꽤 된 구제품이라도 관련 광고가 쏟아질 것이다.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할 것도 있는 법이니.

모양새는 조회장이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는 형국이나 실상은 그룹 내 권력은 한 줌도 내놓지 않은 채 그대로 쥐고 있게 되었다.

주요 포스트에 오른 최동욱이 조회장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진 모르겠으나 앞으로 점점 더 그룹 내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면서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갈 것이다.

당분간은 그만큼 조윤경과 조성환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질 것이다.

자신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걸 알리기라도 하듯 성환은 온갖 상심을 얼굴에 담고서 사무실에 들어섰다.

"당분간 천하제일로 간다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늘 이렇게 누추한 천하태평에까지 행차하셨나?"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여기 자리 뺀다는 거 농담 아니었는데? 원모가 책상 쓰고 싶다던데?"

성환이 고래를 홱 하고 돌려 원모를 노려봤다.

원모는 당황한 듯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표님. 제가 언제요? 와 진짜 이상하십니다."

"네가 그랬잖아."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며칠 전부터 계속 성환이 책상이랑 노트북 쪽을 그윽하게 바라봤잖아. 의자는 어디서 났냐? 얼마냐고 안 물어봤어? 그게 그 얘기 아니야? 내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물론 뒤로 완전히 눕혀지는 의자가 부럽긴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양아치도 아니고 겨우 그거 땜에 조성환님께서 나가시길 바랄려구요?"

"봤지? 부정은 안 하네."

"에휴. 그게 부정한 거잖습니까!"

성환은 더 이상 듣기 짜증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하시죠. 전 이제 거기에 갈 데도 없어요."

"아니 왜? 어차피 거기 네 자리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부속실 옆에 회의실에 있지 않았었나?"

"이제 공식적으로 회장님 안 나오시니깐 부속실도 축소해서 딴 데로 옮기고 21층은 비워둘 거래요. 20층에는 새로 온 대표이사랑 기획조정실장 자리 만들고 있고요."

"최동욱이 20층으로 온다고?"

21층은 회장실과 그에 딸린 비서실과 부속실 등이 자리하고 있으니 회장이 물러나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건 맞다.

그러나 20층은 대표이사실과 최고위층 임원들이 사용하는 크고 작은 회의실들만 자리했다.

기획조정실장실은 원래 19층에 있었다. 그러나 기획조정실장 최동욱이 20층으로 들어온다는 건 그만큼 그룹 내 위상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21층은 없애는 마당에 그렇다고 최동욱이 있는 20층에 갈 수도 없으니 정말 성환은 갈 데가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조윤경 사무실로 갈 수도 없고.

말은 툴툴 맞게 했지만, 처지가 처지인 만큼 살짝 위로가 필요했다.

"성환아. 밥이나 먹으러 갈까?"

"방금 출근했는데요. 입맛도 없고."

정말 만사가 다 귀찮은 표정이다.

한 번 더 꼬드겨봐야겠다.

어차피 사양할 분위기인데 뭐든 못 던질까?

"짜장면 먹으러 가자. 지금 주문해놓으면 딱 맞을 거야. 에이 기분이다. 오늘은 양장피랑 팔보채도 시켜줄게."

"에이 정말! 생각 없다니깐요."

음 그것마저 마다하다니 정말인가보다.

상실감이 꽤 상당한 듯.

"알았다. 그럼 이번에 내가 사준 걸로 치는 거다."

성환은 귀찮다는 듯이 알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오늘 한턱 제대로 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원모가 끼어들었다.

"대표님! 저도 마침 아침 안 먹고 와서 살짝 배고픈데요. 전 분 거 싫어하니깐 가서 시키시지 말입니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원모, 역시 본능에 충실한 놈이다.

"그래. 그럼 너 혼자 가서 시켜 먹어. 난 오늘 점심 굶을 거니깐."

"네? 방금 사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사준다곤 했지."

"그런데요?"

"너 말고 쟤."

"네? 그럼 조성환님께 사주는 걸로 치고 제가 대신 가면 되겠습니다."

끈질긴 놈.

뭔 말을 못 하게 만든다.

"내일 가자. 오늘은 중국집이 안 땡긴다."

"내일 토요일인데요? 또 저만 나오라는 말씀이십니까?"

몇 년 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일 밥 먹자고 뱉었다가 그 말을 믿고 토요일에 자기 혼자 나온 걸 얘기하는 거다.

지난번엔 대꾸도 없이 그냥 토요일에 출근했었는데 원모도 어느새 눈치가 제법 는 것 같다.

"알았다. 가자."

"네. 잠시만요. 짐 좀 챙기겠습니다."

"오늘 말고. 다음 주 월요일에."

그날 밥 먹고 오후에 출근하면 된다.

급 시무룩해진 원모가 몇 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그러시죠. 설마 안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오후에 출근하신다거나?"

귀신같은 놈.

눈치뿐만이 아니라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잠시 후.

띵동!

현관에 누가 왔는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원모야! 오늘 손님 오시기로 했냐?"

"아니요."

띵동!

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

"원모야!"

"네. 대표님. 오늘 오시기로 한 손님 없습니다."

답답한 놈. 내가 정말 그게 궁금했을라고.

"문 열라고 임마."

"아 네."

꼭 이렇게 콕 집어서 말을 해야 알아듣는 건지 이제야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님이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 들어와 버렸다.

손님이 아닌 건환이였다.

"아직 제 지문으로 되네요."

벨 소리에 답이 없어 그냥 한번 지문등록 장치에 손가락을 대봤는데 문이 열렸다는 거였다.

"당연하지. 너도 이 회사의 주주니깐."

"그렇긴 하죠. 그리고 동시에 천하제일 직원이기도 하고요."

정체성의 혼란이라도 왔는지 애매모호하게 답을 했다.

건환이는 두 손에 짐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이게 뭐야! 자기 회사 오는데 무슨 선물을 이렇게 들고 와?"

"네. 그래도 빈손으로 오기 뭐 해서요."

은근슬쩍 거리두기라도 하려는지 애매모호하게 마치 다른 회사라도 방문하는 것처럼 얘기했다.

아무래도 최동욱 밑에 있으면서 어느새 반쯤은 넘어간 모양이다.

"큰 건 아니구요. 탕비실에 넣고 드시라고 조금 들고 왔습니다."

원모가 반갑게 선물 보따리를 받아서 풀어보며 놀랐다.

"우와. 이렇게 비싼걸."

종이백 안에는 육포랑 위스키 등 탕비실에 어울릴 만한 그리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이 잔뜩 들어있었다.

"비싸진 않습니다."

"에이 왜 이게 안 비싸?"

원모는 뭐가 좋은지 헤죽헤죽하면서 물었다.

"건환이 비서팀 들어가니깐 월급도 많이 받나 보네. 신수가 확 폈구나. 이렇게 비싼 것도 사 오고."

"월급이 많긴요. 아시면서. 그냥 적지는 않은 편이죠."

특별히 부정하지 않는 답변에 원모는 잔뜩 부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하태평에서는 아직 제대로 된 배당 한번 한 적 없거니와 고정수입도 없으니 더더욱 그랬을 거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해서 내가 끼어들었다.

"건환아! 웬일로 금요일에 다 방문하셨지? 천하제일 이제 출근 안 할라고?"

"아니요. 오늘 연차냈습니다."

"연차 내면 집에서 쉬거나 할머니랑 시간 보내드리지, 웬일로 여기로 온 거야?"

"그게…… 주간 업무 보고 말씀인데요. 최동욱차장님. 아니 이제 실장님이죠."

"그 사람이 왜?"

"이제 그일 못하게 됐잖습니까. 최동욱 실장님이 기획조정실장으로 발령나셔서요."

그렇다.

그러고 보니 건환이는 애초에 조윤경 제안으로 최동욱의 동태를 살피러 비서실로 꽂아준 거였다.

최동욱이 다른 데로 가버렸으니 이제 건환이의 쓰임이 없어진 거다.

이제 천하태평으로 복귀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래? 그럼 복귀해야지. 다음 주에 올 거야? 아니, 그럼 지금 여기로 출근한 건가?"

내 말을 들은 건환이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아 보였다.

마치 미안해하면서도 말을 꺼내기 곤란하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왜 그래?"

"그게요. 당분간은 천하제일에 계속 있으면 안 될까 싶어서요."

"뭐라고? 왜?"

"할머니께서 요즘 건강이 별로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많이 들락날락하셔서요. 이것저것 들어갈 게 많습니다."

직계가족 병원비 지원 등 천하제일 복지 때문에 당장 나오는 게 곤란하다는 거였다.

"어차피 재입사 후 발병한 게 아니니깐 지원 안 되는 거 아냐?"

"그게. 최동욱실장님이 제 사정 아시고 배려해주셨거든요."

건환이가 최동욱을 따르게 된게 납득됐다.

회사 규정에 어긋나면서까지 배려도 해줬으니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건환이가 천하태평으로 돌아와 봐야 당장 특별한 역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땐 쿨하게 들어줘야 한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면 나도 얼마든지 배려해줄 수 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자. 할머니 많이 보살펴드리고."

건환이 이제야 안도한 듯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비서실에서 계속 있는 거야?"

"아뇨. 최실장님이 기획조정실로 불러주셨습니다. 어차피 회장님께서 이제 회사로 안 나오시니깐 비서실이 대폭 축소돼서 다른 데 가긴 가야 하니깐요."

아예 최동욱이 데려간다는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건환이도 한편으로는 최동욱 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분명히 최동욱도 건환이가 우리 사람이란 걸 아는데 왜 이렇게까지 곁에 두려고 하는 것인가 궁금했다.

설마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하게 하려는 것일까?

아니다.

건환이는 좀 흐리멍덩하고 특이한 면이 있어도 인간적으로는 그럴 놈이 아니다.

"알았다. 그런데 같이 기조실로 가는데 주간보고는 왜 못 한다는 거지? 이제 하기 싫다는 거야?"

"아닙니다. 실장님하고 이제 막 과장된 저하고 직급 차이가 커서 직접 부딪칠 일이 많지 않을 거 같아서요."

"그래. 그럼 특별한 일 있을 때만 연락해 줘."

"네, 알겠습니다."

마침 김철수이사까지 출근하고 오랜만에 모든 주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건환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점심 드리러 가지 말입니다. 제가 쏘겠습니다."

"우리 전부 출근했는데 다 감당할 수 있겠어?"

건환은 가소롭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래봤자 람지 한 명한테도 안 될 텐데요."

그렇지. 이미 충분히 단련됐겠지.

사겠다는걸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다.

"그래? 그럼 어디 갈까? 중국집?"

내 답에 원모가 질색하듯 물었다.

"대표님 좀 아까는 점심 안 드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중국집도 안 땡기시다면서요?"

"그랬지."

"그런데요?"

"아깐 내 머리가 답한 거고 지금은 내 배가 답한 거야. 오늘 얜 기름기가 땡긴데."

내가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키자 원모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쳇!"

"그리고 원모야. 다음주 월요일 중국집은 이걸로 퉁치는거다."

"네? 월요일은 월요일이고 오늘은 건환이가……."

"건환이가 나 혼자 사준다는 거 너까지 껴준 거니까 내가 산 거나 마찬가지잖아."

"헐!"

원모는 어처구니없는지 마치 '알았다. 내가 졌다'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해결됐다.

월요일엔 아침에 출근해도 된다.

자리에 일어나서 성환이를 찾았다.

"성환아 가자. 건환이가 쏜댄다."

"생각없다고 몇 번을 말해요. 좀 혼자있게 놔두시죠."

성환이는 최동욱이 급부상한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듯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알았어. 그럼 이번 것도 사준 걸로 친다. 두 번 사준 거다."

"그러시던가요."

"너 분명히 그러라고 했다. 원모야 들었지 방금?"

원모를 쳐다보자 어이없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성환을 제외한 네 명이 나름 괜찮은 중국집에 가서 배에 기름칠을 두둑이 하고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출입문 쪽엔 정장 위쪽에 천하제일 배지를 단 남자 한 명이 서 있었고 회의실에서는 성환이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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