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인사
다음 날 아침.
잠자리가 바뀌었는데도 어찌나 곤하게 잤는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잠들기 전 나를 돌아본 시간이 도움이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간만에 숙면을 취했다.
부엌에서 계란말이라도 하고 계셨는지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방까지 퍼져왔다.
인기척에 내가 일어난 걸 아셨는지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부르셨다.
"아들 밥 먹어. 계란말이 했어."
"역시 우리 엄마 최고야."
한 숟가락 입에 물고 우걱우걱 씹고 있는데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셨다.
"아들 솔직히 말해 봐. 천하태평인가 뭔가 망한 거지?"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평일에 와서 라면에 소주를 마시지 않나 친구한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도 하지 말라고 하질 않나 오늘도 회사 안 나가고 미적대잖아."
"내가 대표니깐 가든 말든 내 맘이거든. 그리고 회사는 안 망했고 잘 나가."
"잘 나가는데 용돈도 안 보내냐?"
본론이었다.
"깜박했지. 이제부턴 자동이체 해 놓을게."
오랜만에 단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을 나섰다.
바로 용돈 부쳐드리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대문 밖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셨다.
다음 날.
며칠 만에 회사로 출근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하자.
지금 여유자금 20억으로 잘만 굴린다면 머지않아 20조도 될 수 있다.
내가 중얼거리는 게 이상했는지 성환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싸우러 나갑니까? 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는 거지?"
"스무 장 가지고 있는 거 있잖아. 그거 크게 터트릴 생각하니 그렇지."
"네? 스무 장?"
"지난번 천하제일 주식 잠깐 샀다가 다 팔고 현금화해놓은 돈 20억 있잖아. 이제 우리 슬슬 본업 다시 해야 하지 않겠어? 그 큰돈을 현금으로 들고 있을 필욘 없잖아."
"에이. 난 또 뭐라고. 스무 장이라고 해서 큰돈인지 알았네."
일억을 한 장이라 표현한 게 소소했단 말인가.
도대체 이놈에게 한 장은 얼마일까?
물론 지금은 이놈의 한 장 단위가 나보단 클 테지만 수년 후엔 달라질 거다.
그땐 나한테 한 장은 일조가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겐 그리 큰 도전은 아닐 거다.
"야. 이십억이 먼저 있어야 그게 튀어서 이천억도 되고 이십조도 될 거 아냐!"
"네 그렇죠.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멘트 자체는 긍정문이었지만 표정은 정말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거냐라며 비웃는 듯 보였다.
몇 군데 비상장주식에 투자한 거 외에 법인 계좌에 20억 원이 찍혀있다.
언제 비트코인을 살 수 있을지 모르니 적당한 포트폴리오를 짜서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도 골고루 분산투자 하는 건 필수다.
하지만 수익성이 높은 비상장주식이나 부동산, 이런 것들은 내가 알고 있는 마지막 미래. 즉 동작대교에서 떨어질 그 시절까지 현금화할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여러 포트폴리오 운영하면서 언제든지 상당 부분 현금화할 준비를 해 놓은 채 비트코인 거래소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는 거다.
거래소가 생기면 초창기에 싸게 잡기만 하면 된다.
수천 배까지도 충분히 수익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장비 사서 직접 채굴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을 수 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암호화폐 거래소가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최근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원모야!"
대답이 없다.
"야!"
"네."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쑥 올라왔다.
예전 같으면 안 자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한동안 천하제일 일에 신경 쓰느라고 회사를 한참 비우다시피 했더니 이놈이 이젠 아예 대놓고 잔다.
"그냥 더 자라."
"네. 그런데 급하신 건가요?"
"네라니? 정말 자기라도 할라고?"
"지난번엔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자거나 책보거나 그냥 집에 가거나 아무렇게나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린 직원이 아니라 주주라고요?"
말은 맨날 깨어있는 사람인 척하지만 내 안에 꼰대 감성은 억누른다고 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 나의 참모습을 일깨워주곤 한다.
"알았어. 그럼 자면서 들어."
"네."
정말 자면서 들으려는지 고개를 처박았다.
그래.
내가 뱉은 말도 있거니와 막말로 듣는 자세야 각 잡고 서 있거나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난번에 내가 말한 거 있잖아. 찾아보라고 한 거."
원모는 답답했는지 고개를 들어 답했다.
"네? 알아보시라고 한 게 한두 개여야지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거 있잖아. 매일매일 뉴스 검색 보라고 한 거. 비트코인!"
"아. 네 부루마블 돈 같은 거 말씀하신 거죠?"
"부루마블이라니. 암호화폐라니깐."
"네 아무튼요. 매일 보고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답만 하고는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오늘은 안보냐? 매일 본다며?"
"네. 보통은 오후에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전이구요."
"그럼 그냥 오후에 출근하지 왜 아침부터 오냐? 아니 그냥 집에 있지 뭐하러 나오냐?"
"죄송합니다."
원모가 이제야 눈을 비비더니 모니터를 쳐다봤다.
뒷자리 책장 유리에 비친 화면을 보니 정말 초록 창을 켰다.
몇 분쯤 지났을까.
원모가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나왔습니다."
"뭐라고?"
"부루마블인지 비트코인인지 그거요. 거래소 생긴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네 귀엔 부루마블하고 비트코인이 비슷하게 들리냐?"
"아, 또 그러시네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럼 뭣이 중헌디?"
"거래소요. 지금 준비하고 있어서 내년 하반기쯤에는 오픈한다고 합니다."
됐다.
마침 투자 가용자금 20억도 통장에서 잘 자고 있으니 거래소 생기면 몰빵하기만 하면 된다.
수년간의 등락 차트를 기억하고 있다면 오를 때 팔고 떨어질 때 다시 사면 좋겠지만 회귀 전에는 그리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대신 회귀 전 최고가가 얼마였는지는 대충 기억하고 있으니 무조건 사서 그 가격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됐어!"
옆자리 성환이 끼어들었다.
"뜬금없이 뭐가 됩니까?"
"알 거 없어."
"혹시 임원발표 말하는 거예요?"
"임원발표라니? 우리 모두 임원인데 웬 발표?"
"천하태평 말고 천하제일이요. 오후에 그룹 임원인사 발표날 거에요."
"천하제일 임원인사야 매년 있는 건데 내가 뭐하러 신경 쓰냐?"
"올핸 다르잖아요."
"다르다니?"
"그때 기자회견 하면서 회장님 물러나셨잖아요. 이제 싹 다 물갈이될 텐데."
그렇다.
조회장이 지배구조 개선을 이유로 모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후 후속 인사가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사주 일가의 페이퍼 컴퍼니 보도 등 악재를 만나 자연스럽게 연기된 것이었다.
이상현의 개인적인 일탈행위로 위장하고 그에게 모두 뒤집어씌워 의혹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래서 이제야 미뤄왔던 임원인사를 발표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렇지. 넌 뭐 들은 거라도 있냐? 특히 조윤경 소식?"
"전문경영인 체재로 간다니 누나는 이번엔 승진 못 할 테고. 대충 들은 바로는 외부 영입 인사가 좀 있나 본데요? 파격 인사라는 말도 있고."
당연히 지배구조 개선한다고 하면서 사주 일가를 승진시켜서 요직에 앉힐 수는 없을 테다.
성환은 누나가 이번 승진에 누락한다는 말을 하면서 입이 귀에 걸렸다.
자기는 발도 못 붙이고 있는 와중에 누나가 홀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을 테니 꼬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 그건 그렇고 외부인사 누구? 그리고 파격 인사라니?"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뭐야? 쫓겨난 거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회장님께서 일절 언급을 안 하세요."
"비서실에서도 모른데?"
"네. 비서실에서도 입 꾹 다물고 있는지 아무 말도 안 돌고 있더라구요."
통상 임원인사 발표 나기 전날 여기저기 축하 인사가 오가는 등 대부분의 윤곽이 드러나는데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조인철 회장과 함께 그 수족 같은 임원들이 뒤로 물러나는 등 대폭적인 물갈이가 예상되니 그럴 만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늦은 오후.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건환이다.
이 시간에 전화면 뭔 일이 생겼다는 얘긴데.
벨 소리가 채 한 번도 끝나기 전에 바로 받았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네. 대표님. 천하제일 임원인사요."
"그래. 오늘 발표 난다는 얘기는 들었어."
"네. 방금 났습니다."
"근데 그게 왜? 설마 조윤경이 부대표로 승진이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니구요. 최동욱차장님이요."
"최동욱차장이 왜?"
"지주사 기획조정실장으로 영전하셨습니다."
어느새 인간적인 교감이라도 나눈 걸까.
건환이 말투에선 단순히 보고라기보단 뿌듯함, 자랑스러움 같은 감정들까지 묻어있는 듯했다.
그나저나 기획조정실장이라니.
권한이나 책임 등으로 볼 때 지주사에서 손에 꼽히는 자리다.
그냥저냥 임원이 아닌 적어도 부대표급 정도는 되어야 오를 수 있는 막강 보직이다.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한 것도 아니고 차장에서 부대표라니.
이건 로열패밀리에서도 보기 힘든 파격적인 인사다.
사실 로열패밀리는 맞지만 어쨌든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외적으로 최동욱은 그냥 비서실 직원일 뿐 그것도 차장급에 불과한데 이런 인사라니.
몇 달 전 건환이가 말해준 게 떠올랐다.
최동욱한테 계열사 대표 몇몇이 찾아왔다는 그 얘기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미리 눈치라도 챈 자들이 줄을 댄 거였다.
그러나 몇몇 계열사 대표들까지 알고 있는 사실을 조윤경과 성환이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이는 이미 최동욱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포진하고 있으며 비서실까지 장악했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이쯤 되면 이복남매들간 승부의 결과를 쉽게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전화를 끊자 마침 옆에서 성환이도 같은 내용으로 통화하는 중이었다.
"뭐라고? 최동욱차장이?"
"……."
"그 사람은 또 누군데?"
성환이 잔뜩 흥분한 채로 수화기를 책상에 던져버렸다.
최동욱이 그저 만만치 않은 상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를 내쳐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일 거다.
"이게 말이 돼요?"
"임원인사 말하는 거야? 나도 건환이한테 들었어. 아주 죽 쒀서 개 줬네."
"이게 다 최동욱차장의 큰 그림이었단 거에요?"
"그게 아니지."
"뭐가 아니에요?"
"최동욱차장이라니. 이제 최동욱실장님이지. 부대표급 아닌가 그 자린?"
"뭐라고요?"
성환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이제 좀 나아진 듯했다.
회귀 전 같았으면 저 눈을 보고 오금이 저렸을 법했는데.
막 회귀했을 때도 가끔 예전 버릇에 저절로 몸이 움찔움찔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벗어났다.
"힘 빼라. 눈깔 빠지겠다."
"아니 내 말이 그 말이 아니잖아요."
"아니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직급이나 직책을 봐도 이제 지주사 넘버투인데."
"그것도 그렇지만 지주사 대표이사 누가 됐는지 못 들으셨어요?"
"대표이사? 못 들었는데. 누가 승진했는데?"
"승진 아닙니다."
"그러면?"
"김창욱이라고 경쟁사 대표하다가 물러난 사람이라는데요."
"K그룹에 있던 그 김창욱대표?"
"네. 그런데 그 사람 혼자만 오고 자기 사람들은 안 데려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래? 혈혈단신으로 온다고?"
경쟁사 대표를 지주사 대표에 앉히다니.
이건 어쩌면 파격 승진보다도 더 큰 임팩트를 줄 수 있다.
이제껏 순혈주의를 고집하던 천하제일 그룹이 드디어 외부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면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딘다고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김창욱이라면.
회생 전에는 여기저기 얼굴마담 삼아 다니나 실속 하나 없이 그저 자리보전만 하는 스타일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게다가 자기 사람들 한 명 심지 못하게 되다니.
이 사람은 딱 봐도 그냥 허수아비다.
이 모두 조인철회장의 큰 그림이다.
최동욱과의 상의나 교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각본을 짠 건 조회장이다.
대표이사를 외부에서, 그것도 경쟁사 출신을 앉히고 가장 핵심 보직인 기획조정실장엔 몇 단계를 뛰어넘는 깜짝 승진을 통해 혼외자 최동욱을 앉혔다.
대외적으로는 아들도 아닌데다 성도 다르니 회사 내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서 앉힌 꼴이 되었다.
로열패밀리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발탁 승진을 통해 젊은 나이에 핵심 경영진에 오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 직원들에게 줄 수도 있는 일거양득 전략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허수아비를 앉혀놓고 자기 아들을 통해 그룹 운영의 헤게모니를 놓지 않겠다는 조회장의 큰 그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