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큰 그림
다음 날.
창문을 살짝 열어놓아서였는지 아니면 웃풍 때문이었는지 콧등에 찬바람이 스치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창문 밖을 보니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시간이었다.
새로 맞은 아침 기분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복수하면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그날이 오니 별다른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밤새 뒤척였는지 오히려 찌뿌둥하기까지 했다.
이상현에게 복수했다는 사실이 내게 마냥 성취감만을 주지는 않았다.
물론 원수를 갚았다는 만족감에 기분이 좋은 건 분명했다.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언짢은 감정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마치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초콜릿을 먹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가슴속에서는 홀가분하면서도 모순된 감정이 요동쳤다.
조윤경에게 복수했다고 해도 이럴까.
물론 철천지원수, 그리고 벌을 받아 마땅한 자에게 처벌을 가했다는 점에서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앞서겠지만 복수한 후의 공허함 또한 지금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하지만 쌉싸름할지라도 초콜릿은 초콜릿.
공허함이 그 치명적인 달콤함을 누를 수는 없다.
복수가 내 찬란한 앞날에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결과가 조금은 씁쓸할지라도 달콤함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해봤다.
어느새 해가 떴는지 어둠이 물러가고 집안이 불을 켜놓은 듯 환해졌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회사 가기가 싫다.
아니 회사에 간다기보단 그 전에 샤워하고 옷 입고 하는 준비과정들이 너무 귀찮다.
한참 동안을 빈둥대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다.
슬슬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귀찮아서 회사도 안 간 마당에 밥을 해 먹기도 그렇고 나가서 사 먹는 것도 너무 귀찮았다.
그냥 라면에 햇반이나 말아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찬장을 열었다.
"에이 깜짝이야!"
찬장 안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퀴벌레는 날 보고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앞다린지 더듬인지 길쭉한 걸 하늘로 향해 뻗은 후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쇼생크 탈출의 팀 로빈스처럼 한동안 갇혀있다 탈출이라도 한 모양이다.
찬장 안에 햇반과 라면은 있었으나 말아먹을 조합은 아니었다.
햇반은 발아 현미밥에 라면은 온통 짜장라면뿐.
완전 최악의 조합이다.
물 안 버리고 밥에 말아 먹을까라고 잠시 헛된 생각을 해보았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짜장 국이라니 생각만으로도 토가 나올 듯했다.
그럼 밥 빼고 짜장라면만 먹을까 생각하니 그것도 귀찮다.
물 버리고 소스 부어서 쓱쓱 비비고 나서 먹기 직전에 유성스프까지 부어야 한다니.
차라리 다른 요리를 하고 말지 그깟 짜장라면에 쏟을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해준 따스한 계란말이가 생각났다.
그래 가자.
어머니 얼굴 한번 보고 오자.
너무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스런 마음도 있고 하니 오늘만큼은 한번 다녀오자.
어머니가 해준 계란말이에 소주 한잔하고 오는 거다.
대충 씻고 집을 나서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오후의 터미널 풍경은 아침 출근 시간만큼이나 꽤 부산했다.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고향 갈 마음에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부터 그냥 마실 삼아 나온 어르신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막 사회 진출한 신입사원처럼 보이는 직장인은 한 손엔 노트북을 들고, 일을 보고, 담배를 피고 있는 와중에 전화까지 받는 묘기를 선보였다.
수염 깎은 지 일주일은 넘은 듯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은 옷 전체가 흙과 먼지로 뒤덮인 작업복 차림을 갈아입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며칠간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모습 같았다.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에 한껏 미소를 보이고 있었지만 자글자글한 주름에서는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출발시간을 조금 남기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우등버스인데다 표도 여유가 있어서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자리도 남아있었지만.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2인석 자리 복도 쪽을 선택했다.
내 번호 자리를 찾아가니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한 오 분쯤 흘렀을까.
출발하기 직전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서 봤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아리따운 여성분이 아닌 덩치가 산 만한, 딱 봐도 그냥 씨름 아니 스모선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남자가 낑낑대며 올라오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마치 방지턱이라도 넘는 것처럼 버스가 출렁거렸다.
멀미약이라도 챙겨올 걸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속으로 '제발 지나가라, 지나가라', '뒤로 가라', '여기는 아닐 거야'라고 수없이 외쳤건만.
역시 내 옆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옆자린데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아. 네 그럼요."
매너 있는 척 태연하게 말을 건네고 쳐다봤지만 내 썩은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나 보다.
상대방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급격히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두 다리를 복도 쪽으로 빼 그 사람이 자리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내 눈썰미가 부족했었는지.
우등이라서 충분할지 알았는데 모자랐다.
들어가려고 몸을 집어넣었는데 앞자리 좌석과 내 얼굴 사이에 이 남자의 배가 끼어버렸다.
"으악!"
아픈 것보다는 모르는 남자 배에 얼굴을 댔다는 사실이 매우 치욕스러웠다.
물론 아는 남자 배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지만.
내 앉은키가 조금 작았다거나 이 사람의 키가 조금 컸었더라면 정말 헬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 삼았다.
결국 비집고 들어갔지만 내 얼굴까지 쓸려가면서 고개까지 돌아갔다.
자기도 미안했는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깥쪽에 앉을 걸 그랬나 보네요."
'이런 씨'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물론 이 남자에게 하는 욕이 아니었다.
이런 헛된 기대를 품고 최악을 선택한 나에 던진 욕이었다.
그냥 혼자 앉는 자리로 살걸.
아니면 창가 쪽이라도.
아니면 복도 쪽을 양보하고 내가 창가로 옮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쪼금 귀찮더라도 다리만 빼지 말고 일어나서 들어가게 한 다음 다시 앉을걸.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뒤에서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봤어도 웃겼을 거다.
결국 영화에서 많이 보던 그림은 나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영화일 뿐이다.
현실은 이런 거다.
우등버스지만 일반버스보다도 훨씬 좁은 듯.
스모아저씨는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옆에 나에게 피해 주진 않을까 일부러 팔을 감싸고 몸을 움츠린 듯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그런다 한들 오른쪽 팔뚝은 내 자리의 1/3도 넘게 침범했다.
최선을 다한 분께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조용히 오른쪽으로 붙어서 불편하게 앉을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의 버스 여행.
오랜만의 설렘은 개뿔.
마치 군대에서 유격훈련이나 PT체조라도 하는 것마냥 힘만 들었다.
아무리 '이제 곧 어머니를 볼 수 있다' '어머니가 해준 집밥을 먹을 수 있다'라고 즐거운 상상을 마구마구 떠올렸지만, 지금의 고통을 잊게 해줄 수는 없었다.
'엄마 미안.'
정말 힘들게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서프라이즈 해줄 생각에 미리 전화를 드리지 않아서인지 어머니가 나와서 기다리지는 않았다.
당연히 동네 할머니들하고 화투라도 치겠지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게 아예 집에도 안 계신 듯했다.
서프라이즈는 개뿔, 미리 전화라도 해놓을 걸 하고 후회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배 속에선 밥 달라고 아우성 친지 벌써 여섯 시간도 넘게 지났다.
이쯤 되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잊을 법도 한데.
내 신경은 어찌나 예민하고 뒤끝 있는지 이런 거 하나 절대 잊고 넘기는 법이 없다.
배고파 죽겠는데 그냥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 내가 왔다는 소식을 알려야겠다.
핸드폰을 들어 어머니 번호를 누르려 했지만,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최근 통화목록에도 없고 즐겨찾기에도 없었다.
연락처를 들어가 한참을 드래그해서 내린 후에야 겨우 어머니 번호를 찾을 수 있었다.
불효자식 인증했다.
얼마나 전화를 안 걸었으면 이 정도일까 라고 잠시 뉘우쳤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바로 받았다.
"태평아. 무슨 일이야? 뭔 일 있어?"
"무슨 일이라니. 그냥 한 건데."
"난 또 무슨 일 있는지 알고 놀랐잖아."
평상시 오죽 안부 전화를 안 했으면 아들 번호가 뜬 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는지 알고 겁이 덜컥 나신 모양이다.
난 정말 불효자식이 맞다.
"아니야. 엄마. 나 지금 집에 와있어."
"집이라고? 미리 전화 좀 하고 오지. 그랬으면 맛있는 거라도 해놨을 거 아냐."
"맛있는 거는 무슨. 있는 거 그냥 먹으면 되지."
"집에 반찬 해놓은 거 아무것도 없을 텐데. 찬밥도 없고."
"그래?"
그냥 터미널 근처에서라도 사 먹고 올걸.
오늘 초이스 족족 죽 쓰는 패만 들었다.
"그러지 말고 배고플 테니깐 찬장 열어봐. 거기 라면 있을 거야."
결국 라면인 건가.
라면은 사양이다.
"아니야. 괜찮아. 엄마. 언제 와? 그냥 기다리지 뭐."
"나 지금 못가. 잃고 있는 중이거든."
오늘은 어머니가 원정경기 나간 모양이다.
하필 지금 잃고 있다고 하니 본전치고 오려면 귀가 시간이 꽤 늦을 것이다.
"알았어 엄마. 나 신경 쓰지 말고 돈 많이 따서 와."
"알았어. 오늘 자고 가. 내일 아침에 맛있는 거 해줄게."
"그래 엄마."
할 수 없다.
라면 먹을 수밖에.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보았다.
헉!
보자마자 바로 닫았다.
여기도 짜파게티와 짜짜로니뿐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란 말인가.
짜장라면을 피해 여섯 시간을 넘게 헤맸지만 결국 짜장라면으로 돌아왔다.
서울 가자마자 국물 라면으로 꽉 채워 넣겠다고 다짐 한번 해봤다.
꾸덕꾸덕한 짜장 면발을 젓가락에 돌려가며 소주 한잔 곁들이고 있는데 마침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아들!"
오랜만에 아들 얼굴을 봐서 그런지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엄마 왔어?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본전이 아니라 따따블됐다."
잠시 오해했다.
물론 나도 반가웠겠지만, 그보단 원정경기 역전승의 희열이 더 컸을 것이다.
"아들! 웬 짜파게티에 소주야? 신라면이나 먹지."
찬장에 국물 라면이 있는 줄 아시나 보다.
"짜파게티에 맥주는 이상하잖아."
"그건 그렇지."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옷 갈아입는 것도 잊은 채 옆에 앉아 아들 먹는 것 구경만 하시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말을 건넸다.
"태평아. 요즘 왜 이렇게 네 친구는 안 보이니?"
"친구 누구?"
"누구라니? 상현이밖에 더 있어? 그러고 보니까 통 안 보이네. 전화도 없고."
하긴 친한 친구라고 해봐야 그놈 한 명밖에 없었을뿐더러 여기도 자주 인사드리러 오곤 했었는데 몇 년간 통 안 보이니 궁금하셨나 보다.
"그 자식 얘기하지 마."
"아니 왜? 싸웠어? 그러고 보니 일 년에 한두 번은 안부 전화 꼬박꼬박하더니만 한동안 전화 한 통 없는 거 보니깐 심하게 싸웠나 보네."
"싸운 거 아냐. 그냥 안 보는 거야."
"아니 왜 안 봐? 친구를"
친구란 말에 정색하듯 쏘아붙였다.
"에이 쫌. 그만 좀 하라니깐. 그 자식 얘기하기 싫다고."
내 반응에 어머니도 혀를 찼다.
"태평아. 그러는 거 아냐. 넌 충분히 좋은 아이인 건 아는데. 그래도 부족한 게 있어."
"부족하다고 내가?"
"맞아. 꼭 진심으로 우러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한테 작은 거 하나하나 배려하는 게 살면서 가장 중요하거든."
"그건 위선이잖아.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데도 척한다는 건."
"아니야. 세상 살면서 그런 게 꼭 필요해."
"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잘할 거라고 믿어."
티격태격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머니는 이내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셨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니 어느덧 밤 깊어 버스도 끊길 시간이 됐다.
오랜만에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러나 잠은 안 오고 어머니가 해준 말씀이 자꾸 떠올랐다.
오죽하면 아들한테 면전에서 대놓고 부족하다고 했을까.
엄마는 이제껏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작은 배려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내 맘대로 혹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추구하며 살아온 것을 뻔히 알고 있어서 진심으로 충고 한마디 건네주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알게 모르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줘왔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이상현이 나에게 적개심을 키워왔을 수도 있다.
복수했는데도 왜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