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94화 (94/191)

94화 복수

걸음을 멈춰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는 귀를 기울였다.

"은철이형! 기사 왜 아직 안 나오는 거야?"

"상현아. 그거 취재할 게 좀 남아서. 걱정하지 마 곧 나올 거니깐. 그런데 전화라도 하고 오지 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어? 괜히 너 번거롭게."

"연락이 닿아야 말이지."

"미안 요즘 워낙 바빠서. 기사 나가기 전에 바로 연락할게. 조금만 기다려."

"딴맘 먹고 있는 건 아니지? 형 말고도 언론사 많이 아니깐 단독보도 놓칠 수 있다는 거 명심해."

"에이 상현아. 왜 그래? 조금만 기다리라니깐. 난 약속 있어서 먼저 간다. 연락할게."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긋난 거다.

이은철이 피하려고 하는 게 너무 티 났다.

조회장을 찾아간 건 취재가 아니라 아마도 거래하러 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런 자료를 들고 있는데 짬 시켜드릴 테니 원하는 걸 달라.

뭐 대충 이런 그림이 그려졌다.

이상현도 눈치챘는지 돌아서서 가는 이은철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건물 밖을 나간 이은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상현.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기분에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도 수정이가 이은철과 사귀고 있다는 걸 들었을 때의 내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잠시 후 이상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죠?"

"……."

"저희가 따로 만나서 할 얘기는 없을 거 같은데요."

분위기상 조윤경이다.

"……."

"그럼 거기서 보는 걸로 하죠. 20층 회의실이요."

20층 회의실이라면 천하제일이다.

조윤경과 만난다고 하니 먼저 가서 자리해야겠다.

재빨리 택시를 잡아타고는 성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 지금 볼일 있어서 그리고 가고 있거든. 내려와 있어."

"네? 또요?"

"10분 뒤 도착!"

다행히 이상현보다 먼저 도착했다.

마중 나와 있던 성환 덕에 리셉션도 안거치고 통과할 수 있었다.

성환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키를 대고는 21층 버튼을 눌렀다.

내가 20층을 따로 누르자 놀란 듯 물었다.

"나 보러 온 게 아닌가?"

"배 아파서. 20층 화장실이 젤 좋아. 볼일 보고 올라갈게."

"영역표시에요? 자기 회사 냅 두고 왜 여기까지 와서."

20층에 내려 회의실 근처 탕비실에 자리했다.

잠시 후.

몇몇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이라 다른 회의실이 모두 비어있었다.

탕비실에서도 조윤경과 이상현의 대화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뭡니까?"

조윤경이 무언가를 건넸나 보다.

"가족들 주소도 모르나 보지?"

"주소라니?"

잠시 후 이상현이 큰 충격을 받았는지 끙끙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회장님을 협박하고도 무사할 거 같아? 순진하게 언론사에 넘긴다고 그게 보도라도 될 줄 알았나 보지?"

"으……."

"그리고 그 넓은 미국 땅에 가족들 숨겨놨다 한들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지난 몇 년간 미국 왔다 갔다 하면서 자리 마련해놓은 거 모를 줄 알았냐고? 어디 한번 다른 데라도 다시 옮기라고 해보시지."

며칠 전 회장실을 나오는 조윤경한테 최동욱이 주소라며 건네준 쪽지가 떠올랐다.

퍼즐이 맞춰진 듯 풀렸다.

재벌과 거대 언론사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다.

서로 없어선 안 될 존재다.

게다가 재벌의 정보력 혹은 뒷조사 수준은 최소한 직원들에 대해서만큼은 국정원을 능가할 정도다.

아무리 약점을 쥐고 있다고 한들 개인의 힘으로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밖에 안 된다.

이상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무너졌다.

저 느낌을 알 것 같았다.

바로 이상현이 어머니를 협박했을 때 받았던 바로 그 느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심할지도 모른다.

미국에 잘 숨겼으니 걱정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니 충격이 배가 됐을 것이다.

"개가 주인을 물고도 살아남을 거 같아? 그런 개는 바로 때려잡아서 저녁상에 올린다는 얘기 못 들어봤나 보지?"

개와 비유하다니.

역시 부전여전이다.

한참을 흐느끼던 이상현이 나지막하게 답했다.

"네. 제가 뒤집어쓰겠습니다."

"뭐라고? 뒤집어쓰다니? 그게 무슨 말?"

이상현이 알아들은 듯 다시 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거죠. 제가 한 일은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전무님 한 가지 부탁이……."

"됐어. 두 번은 안 속아!"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면서 조윤경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증거자료 다 넘겨. 체포영장 발부시킬 수 있게."

정말 악랄하다.

가족들 협박으로 굴복시키면서 자수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니.

아무튼 이상현이 무너지는 걸 보니 후련해지긴 했지만.

조윤경을 같이 엮지 못한 아쉬움도 컸다.

한참 동안 이상현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큰 충격에 멘탈이 나갔을 것이다.

잠시 뒤 성환에게 전화가 왔다.

"대표님? 변비가 이렇게 심하면 병원에 먼저 가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도 오랜만에 익숙한데 오니까 성공했다. 일 봤으니까 간다."

"간다고? 나 보러 온 거 아니에요?"

"누가 너 보러 온다고 했냐? 일 보러 온다고 했지."

"그 일이 그 일?"

"그래. 간다."

뚜뚜뚜뚜.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천하제일을 빠져나와 회사에 돌아왔다.

퇴근 시간쯤.

약속 있다고 먼저 나간 김철수이사가 돌아왔다.

"천대표! 방금 소식 하나 들었는데."

"네? 무슨 소식이요?"

"이상현 곧 체포영장 나온다고 하는 거 같아."

"체포영장이요?"

"얼마 전에 보도된 홍콩 페이퍼 컴퍼니 건 말야. 횡령 혐의라더군."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런 말이 돌다니.

이상현을 제칠 수 있다는 통쾌함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는 회귀하기 전에 나도 이 꼴로 당했단 게 생각나니 다시 한 번 재벌가의 무서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 * *

한참 뒤 늦은 밤.

초록 창 뉴스 면을 통해 관련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 그룹의 모 직원이 회장 일가의 지시인 것처럼 위장해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해외로 빼돌렸으며 범인으로 지목된 그 직원은 지금 도주하여 행방이 묘연하다는 내용이었다.

규모 면에선 훨씬 작았지만 분명 회귀 전에 내가 뒤집어썼던 죄목과 비슷했다.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

이전 생에서 나에게 했던 파렴치한 짓거리를 지금 이상현이 똑같이 겪고 있는 거다.

정말 자수하기도 전에 터트려버렸다.

달아났다고 하는 걸 보니 지금쯤 이상현이 어디에 있을지 떠올랐다.

내가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리던 날 이상현과 술잔을 기울였던 그 포장마차.

바로 거기다.

택시를 타고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돈 없던 대학 시절 이상현과 함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소시지 야채 볶음 안주 하나에 소주 서너 병을 같이 비우고 하던 그 집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금요일만 되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그 집으로 향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도 점점 고급스러워지면서 '이 집이 안주가 맛있는 집은 아니구나'라는걸 깨달은 뒤에도 발길을 멈출 순 없었다.

뒷마당에 앉아있는 듯한 포근한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고기는 거의 없이 전분 함량만 무지하게 높은 분홍색 소시지가 그저 좋았다.

이상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포장마차 철제문을 열자 드르륵 하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역시 이상현이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드럼통 테이블 위에는 쏘야 안주가 반 이상 남아있었고 소주 세 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웬일로 모두 참이슬이었다.

이미 제법 취한 듯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사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죽일 놈의 자식을 어떻게 할까?

동작대교로 끌고 가 강물에 던져버리기라도 해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갔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나를 죽음으로 몰아낸 건 회귀 전에서였지, 회귀한 후의 삶에서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조윤경과 함께 나를 찍어누르고 몰아내려고 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일 뿐.

아직 죽어 마땅한 짓을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생에서의 짓거리까지 없는 셈 칠 수는 없겠지만.

택시에 내리면서 지은 결론은 '물어나 보자'였다.

'회귀 전에 나한테 왜 그랬냐' 할 수도 없고.

그저 언제부터 나를 적으로 대하기 시작한 건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가 알고 싶었다.

쫓기는 상황이라 꽤 경계한 듯.

이상현은 살짝 풀린 눈으로도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내가 들어온 걸 바로 알았다.

맞은편에 앉자 이상현이 눈을 치켜떴다.

"또 너냐?"

말투를 들어보니 아직 혀까지 꼬이진 않은 듯.

"오늘은 웬일로 참이슬이냐? 설마 이 집에 처음처럼이 떨어지기라도 했냐?"

"내 이럴 줄 알았어. 자기만 아는 새끼. 난 원래 참이슬 좋아해. 처음처럼 좋아하는 건 너고. 넌 원래 다른 사람 의견은 묻지도 않고 뭐든지 네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하잖아. 하다못해 이깟 소주 한 병까지도."

내 죽음의 원인이 겨우 이것 때문이었다니.

설마 참이슬 안 시키고 처음처럼 시켜서였을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참이슬 좋아하면 네가 시켰으면 되는 거잖아."

이상현 답답했는지 한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답했다.

"사는 사람이 정하나? 얻어먹는 사람이 정하는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럼 내가 살 때 네가 시켰으면 됐겠네."

"네가 사기는 했냐?"

그렇다.

로펌에 취직도 못 하고 백수로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내 덕에 천하제일로 취직시켜줬다는 명목으로 뜯어먹기만 했다.

한 번을 제대로 산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술 한잔 안 샀다고 소주도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만 시켰다고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잠시 예전의 나를 떠올려보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의 고민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그 정도는 별거 아니야'라고 가벼운 일인양 치부해버리면서 쉽게 재단하고 평가내렸다.

그리고는 위로라도 하듯 무미건조하게 '힘내'라는 말을 건네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재수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뒤통수치듯 함정을 파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정당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친구라면 단점을 스스로 깨닫게 해서 바른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더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자기는 사시도 패스한 변호사니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막상 사회에서는 내가 더 인정받고 더 잘나가고 하니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불편한 감정을 풀지 못하고 쌓아두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너무 커져서 돌이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나를 날려 버리고 싶었을 거다.

이상현이 소주 한잔을 따르고는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술을 마신다고 해도 고민이 없어지지는 않을 텐데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듯.

술이라도 취해 잠시라도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거다.

"그러게 내가 마님 조심하라고 했잖아."

"이 와중에 또 충고질이냐?"

"혼자 뒤집어쓸 거야? 조윤경한테 이용만 당하고 그렇게 버려질 거냐고?"

조윤경 얘기에 이상현의 눈빛이 이글거렸지만 이내 수그러들었다.

절망에 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가족들이 떠오른 모양이다.

가족들 협박하라고 꼬드긴데다 미국 주소까지 넘겨준 최동욱이나 그걸 또 실행한 조윤경이나 정말 악독하기 그지없다.

이상현은 이미 굴복한 듯 의지가 없어 보였다.

이놈 꼬드겨봐야 소용없을 듯 그냥 이놈 하나 보낸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왔던 복수 방법을 떠올렸다.

연거푸 소주 몇 잔을 더 들이킨 이상현은 술이 과한 듯 고개를 처박고 쓰러졌다.

그렇다고 안주 하나 건드리지도 않은 내가 낼 수도 없고.

이상현의 지갑을 뒤져 계산을 하고는 부축해서 택시를 잡아탔다.

20분이나 지났을까. 목적지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가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 건넸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술 깨고 가려고요."

우리가 내린 곳이 동작대교 남단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이놈의 계략으로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던졌던 바로 그 장소.

이상현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찬 바람에 술이 깼는지 이상현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너에 대한 복수는 여기서 하는 걸로 마음먹었었지. 수백 번을."

이상현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복수라니?"

"네가 한 짓…… 아니지, 엄밀히 말하면 앞으로 할 짓이지만 이제는 못 하게 될 짓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여기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네가 가야 할 곳이지."

"뭐라고? 가다니 가긴 어딜 가?"

"어디겠어? 좋은 데지."

주먹을 배에 내리꽂았다.

신음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이상현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눈을 부라리고 쳐다봤다.

자세를 고쳐잡고는 덤비려는 순간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왔다.

택시 안에서 불렀었는데 마침 제때 도착했다.

"뭐야? 네가 불렀어?"

"한때 친구로서 널 위해서다. 어차피 붙잡힐 거 시간만 가다가 딴마음 먹을지 모르잖아. 너 하나야 상관없겠다만 네 가족을 생각해라."

이상현은 한동안 말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이상현은 형사들에게 붙잡혀서는 경찰차에 올라탔다.

비록 내 힘만으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먹었던 장소에서, 생각했던 방법으로 해냈다.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조윤경에 대한 복수심이 그만큼 더욱 타올랐다.

조윤경!

너에게도 조만간 여기서 심판을 내릴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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